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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 위원들의 생애를 연구하다[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23)] 김세은 강원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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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4.10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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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세은 교수가 동아투위 위원들을 직접 면담하거나 전화 또는 이메일로 대화해서 들은 내용, 그리고 민사재판부에 제출한 개인기록을 바탕으로 작성한 논문('해직 언론인에 대한 생애사적 접근 연구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중심으로')에서 주요한 부분을 발췌한 것입니다. 긴 논문을 알기 쉽게 줄여 기고해주신 김 교수께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주


1. 문제 제기


역사는 오늘날을 살아가고 미래를 예측하기 원하는 모두에게 성찰의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중요한 준거로서 작용한다. 이 연구는 해직 언론인의 생애사를 통해 한국 사회와 정치, 언론 간의 복잡다기한 국면과 상호관계에 대해 접근하려 한다. 회고와 의견으로 구성된 주관적 해석으로서의 생애사는 해직 언론인이 가지는 사회적, 역사적 특수성으로 인해 한국의 언론과 언론인이 가지는 사회성과 역사성을 도출하고 그 의미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한국 언론이 놓인 환경적 조건은 언론을 간섭하고 통제하려는 정치권력으로부터 어떻게 자유언론, 독립언론을 지켜나갈 것인지 계속 고민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김영삼 정권의 언론세무조사, 김대중 정권의 통합방송법과 언론세무조사, 신문고시, 노무현 정권의 이른바 ‘취재선진화방안’, 이명박 정권의 미디어법 개정 등은 언론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정치권력의 의지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정치권력의 시도는 언론사의 상업적, 정치적 목적에 따라 여과되고 굴절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며, 언론기업이 이윤 추구를 위해 정치권력에 동조함으로써 민주주의에 해악을 끼치게 된다.

(Cohen & Fraser, 2007; McChesney, 2000) 그렇기에 한 사회에서 언론인이 차지하는 위치는 저널리즘 분야뿐 아니라 그 사회 전반의 수행의 실제성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게 대두된다. 언론인은 자신의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일차적인 판단자이며 의지자일 뿐 아니라, 그 사회의 문화와 이데올로기가 투영되는 종합적 존재이기 때문이다.(Shoemaker & Reese, 1995/1997) 즉, 언론인을 통해 우리는 언론의 작동방식을 이해하고 그 실천의 수준과 각종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으며, 해당 국면에 작동하는 다양한 힘과 관계에 대해 살펴볼 수 있다. 더욱이 정치권력에의 저항이라는 민주화 과정에서 파생된 해직 언론인이 가지는 역사적, 사회적 의의는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해직 언론인에 대한 연구는 매우 드문 실정이다. 이 연구는 독재정권 아래에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벌이다 1975년 3월 17일 해직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들의 생애사를 추적하기 위해 회고록, 자서전, 심층인터뷰 외에 2010년 법원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된 개인기록 등을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해직 언론인 집단은 동아투위 외에도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와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가 있지만, 조선투위는 그 수가 상대적으로 적고 지금은 더 이상 ''조선투위''라는 이름 아래 모이거나 활동하지 않는다는 점, 80년 해직 언론인은 반대로 워낙 그 숫자나 범위가 광범위하며 조직적인 활동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75년 해직 이후 4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랜 기간 정기모임을 가지면서 복직과 보상 등 명예회복을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활발히 수행해 온 동아투위를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며,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해직 이후 그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추적하고 그 궤적에 투영된 한국 사회와 언론의 모습을 유추함으로써 자유언론, 독립언론의 가치에 대해 진지한 성찰의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목적을 가진다.

이러한 생애사 연구는 역사를 분석하고 해석함에 있어 그 수준을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곳에서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곳으로 끌어내리고, 기존의 연구들이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던 것으로부터 새로운 설명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따라서 이 연구는 동아투위라는 해직 언론인 집단의 생애를 통해 그 정체성을 추적함으로써 한국 사회와 언론의 변화와 특성을 읽어내려는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 빚어낸 해직 언론인과 그 삶을 다양한 자료와 심층인터뷰로 재구성함으로써, 언론인의 생애 그 자체가 개인사의 경계를 넘어 의미있는 사회사로 통합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언론인이 수행하는 시대적, 사회적 역할을 조망하고자 한다.


2.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와 한국 사회


1) 민주사회로의 이행과 언론인 해직

언론의 자유가 민주사회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핵심 가치로 당연하게 여겨지는 데에는 언론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한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언론이 정당한 감시자요 비판자 역할을 수행하려 하는 한 권력과 언론의 불편한 관계는 숙명이요 본질이라 할 것이다. 그렇기에 권력이 불편해하는 언론, 불쾌한 언론은 민주주의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필수요소가 된다.(Schudson, 2008, p. 51) 언론에 대한 권력의 부당한 간섭이나 억압은 매우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나며, 언론인의 ''해직''은 직접적인 고문이나 물리적 테러 못지않게 그 충격이나 효과 면에서 강도가 매우 센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권력과 언론의 갈등은 보편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 갈등의 양상은 민주화 정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국경없는 기자회(Reporters Sans Fronti?res)에 따르면, 언론 자유의 정도는 대개 정치적 민주화나 경제적 수준과 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언론인에 대한 연행, 투옥, 고문 등 물리적 위협은 민주화 수준이 낮은 사회에서 자주 발생하곤 하며 언론인의 해직 역시 그런 맥락에서 흔히 보고되는 일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언론인의 해직은 독재정권과의 대립과 갈등에서 야기된 비극적 결과물로 그 발생빈도나 수가 매우 많았을 뿐 아니라 사회적 파장도 무척 컸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75년 박정희 정권 아래에서 벌어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의 무더기 해직이며, 80년 전두환 정권이 언론 통폐합과 더불어 사이비, 부패 언론인 숙정을 빌미로 자행했던 해직 사태는 그 범위가 전국적인 동시에 규모도 더욱 커서 무려 1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에 비하면 규모는 작지만 노태우 정권 하에서도 강제 해직된 언론인은 62명에 달했다.(김영성, 1992, 168쪽)

해직 이후에도 그들의 언론 활동은 계속되었다. 이미 비판적 성향의 언론인은 수차례 자행된 해직의 여파로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고, "쫓겨나는 것보다 남아있는 것이 더 괴로웠을지 모르는" 대부분의 기자들은 각종 세제 혜택이나 연수 등의 혜택을 누리며 ‘독재정치의 선전자로 전락해버린(강명구, 2007) 상황에서, 답답하고 우울한 현실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것은 여전히 해직된 이들의 몫이었다. 해직 언론인은 번역과 출판을 통해 한국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이성의 깨우침을 위해 노력했고, 84년 결성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민권일지』, 『말』등을 발간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비판적 지성이 한켠에서나마 역동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활동은 88년 5월 한겨레신문이 창간되기까지 계속되었고, 그로 인해 정권의 감시와 고문, 투옥이 지속적으로 행해졌다.

2) 동아투위 생애사 연구의 필요성과 연구방법

이처럼 언론인의 해직은 그 원인이나 책임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정치적, 역사적 국면이 상징적으로 투영되었다는 점에서, 해직 언론인은 한국 역사의 구체적 산물이며 한국 언론의 대표적 증표로서의 위상을 가진다. 따라서 해직과 그 이후의 삶은 그 자체가 한국 사회의 다양한 국면과 변화상을 드러내는 유용한 실체이며, 그에 관여하는 정치사회적 관계요인을 유추해볼 수 있는 적절한 자료가 되는 것이다.

당시 우리 언론은 부당한 정치권력의 간섭과 통제에 대항하기는커녕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거나 아예 권언유착에 나섰으며, 정권의 선전도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면서 왜곡된 정치질서 하에서 권력 공유를 즐겼다.(장경섭, 2001, 61쪽) 즉, 대다수 언론인들이 즐기거나 길들여졌으며 최소한 그런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을 대다수 언론인과 달리 행동하게 만들었는가?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왜 그들만이 수많은 언론인 가운데 해직을 당해야 했는가? 해직 이후 이들의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고 한국 사회와 언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이 연구는 바로 이러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선행연구(김세은, 2010)에 의하면, 해직 당시 동아투위의 평균연령은 33세이며 대부분 평기자나 PD, 아나운서였지만 차장과 부장도 13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출신지역에서는 경상도와 서울이 각각 30명, 28명으로 가장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으며, 전라도는 14명, 충청도는 16명, 이북은 9명, 기타 6명으로 되어 있다. 출신대학은 거의 절반에 가까운 54명이 서울대 출신이며 서울소재 대학과 고려대가 각각 24명, 22명으로 비슷한 분포를 보이고 있는 반면 지방대학은 9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175~176쪽) 더 입체적으로 해직 언론인의 생애사를 추적하기 위해 이 연구에서는 회고록, 자서전 등 이미 출판된 기록물과 2010년 공판을 위해 작성, 제출된 개인 기록, 그리고 2009년 2월부터 2010년 7월까지 진행된 심층인터뷰 등의 자료를 사용했다. 심층인터뷰와 개인 기록 자료는 모두 익명으로 처리했다. 인터뷰를 개인기록으로 대신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고, 인터뷰 내용 중 특정내용에 대해서는 아예 출처를 밝히지 말아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수집된 자료는 부분별로 경험이나 사건, 인식, 감정 등을 중심으로 핵심어나 어구 등을 추출하여 소주제를 구분했고, 전체 자료의 내용을 소주제별로 해체, 통합한 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재배치하는 작업을 수행함으로써 동아투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대략의 ''생애사''로 정리했다.


3. 한국 사회에서 해직 언론인으로 살아가기 : 동아투위 생애사


1) ''자유와 민주''의 유전자가 형성된 학창 시절과 동아일보/동아방송 입사

동아투위의 학창 시절은 무엇보다 1960년 4·19 혁명과 그 영향으로 압축된다. 연령에 따라 차이가 있긴 있지만, 4월 혁명은 ‘태풍처럼 몰아쳐’ ‘평범하던 청소년’으로 하여금 "독재자와 독제체제는 왜 생기는가"를 생각하게 하고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민주화를 위해 내 힘을 보태겠노라”고 다짐하게 만들었다.(B) 4월 혁명이라는 충격적 경험은 이후의 삶을 지탱하는 자유와 민주의 중심축이 되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혼란스런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언론이었고, 따라서 동아일보 기자가 된다는 것은 한국의 민주주의에 기여하는 대단히 의미있는 일로 여겨졌다.(A, B). 동아일보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사랑은 이들에게 기자가 되고자 하는 염원을 구체화시켜주었다.

동아일보 깃발을 단 취재용 지프 한 대가 어렵사리 사람들 틈을 뚫고 전진해 오다가 마침내 사람들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 “동아일보다! 동아일보!” “길을 터줍시다!” “길을 터줍시다!” (···) 나는 그때 신문기자라는 직업에 큰 감명을 받았다. (···) 신문기자가 국민과 대의를 같이 할 경우 저토록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난생 처음 알게 되었다. -A

교사나 출판사 외에 달리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N), 동아일보 기자는 "인문·사회과학 계열의 대학생들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중의 하나"였다(C). 동아일보는 "발행부수 및 영향력 면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었고, 동아방송은 아직 흑백 TV가 널리 보급되지 못했던 그 시절 시민들이 가장 애청하는 방송"이었다(C). 다른 언론사에 비해 대우도 휠씬 좋았던(N) 동아일보나 동아방송 입사는 ‘100대 1의 경쟁률’(K)이 넘는 매우 ‘어려운 관문’(U)이었기에, "꿈에 그리던 동아일보 입사는 감지덕지"였다.(L)

한 열댓 명 뽑는데 중앙고 운동장이 꽉 찼어. 그 당시는 언론뿐만 아니라 모든 취직이 힘들었으니까. 하여튼 저희가 시험 볼 땐 유난히 은행도 안 뽑고 별로 안 뽑았어요. (···) 그 당시에 동아 들어간 건 자타가 공인을 하죠. -U

그렇게 들어간 동아일보는 "매우 자유롭고 활달하면서도 질서가 잘 잡혀 있"는, "‘무형식의 형식’이랄까, ‘무질서 속의 질서’"를 문화로 가진 곳으로 회상된다. "아무리 후배라 해도 굽힘없이 자유로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고, 선배나 상사도 불합리하게 후배들의 의견을 억누르는 일이 없었던" 동아일보 분위기는 바로 "자유언론운동의 토대가 되었다"(O). 더구나 학연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아 서로간의 강력한 유대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입사를 하고 보니까 선배도 있고 후배도 있는데, 밖에 나가면 동기가 되고, 신문사 안에서는 선배, 후배가 되고, 그러니까 금방 친해지지. (···) 인문학 계통이 많고, 그리고 정치(쪽도 많고). 그게 의미가 있는 거야. 리버럴한 사고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 형성돼 있었던 거지. -M


2) 독재 하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 : 언론인으로서의 각성과 자유언론실천운동

한국 사회 전반에 큰 파급력을 가져왔던 68년의 『신동아』 *당시 정권의 개입 양상은 편집국에는 중앙정보부에서 파견한 요원이 상주하는 ‘희한한 풍경’으로까지 나타났다. "분명히 동아일보사 임직원이 아닌 40대 중반의 사내가 정치부, 경제부, 사회부는 물론이고 편집국장석까지 오가면서 시시덕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무슨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N). 이렇게 ‘누구나 알아볼 정도로 변질돼 간’ 언론은 시민 특히 대학생들에게 분노의 대상이었고, 동아일보 앞에서의 대학생 시위와 화형식, 각종 구호와 플래카드를 보는 기자들은 "4·19 데모대의 꽁무니나 따라다니다가 멀쩡하게 살아남아 명색이 신문기자로 독재 권력에 굴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몰골에 참담한 심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A)

* 당시 대표적 월간지였던 『신동아』는 68년 12월호에 "차관이 정경유착의 표본이며 정치자금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내용을 실었는데, 이를 문제 삼아 박정희 정권이 자진폐간 압력을 넣었고 결국 동아일보는 굴욕적 사과와 함께 주필, 부장 등 책임자 3명의 사표를 수리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를 제외한 모든 언론사들이 신동아 사건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강준만, 2000, 422~423쪽) 김해식(1994)은 이 사건을 계기로 언론 경영자들이 권력에 완전히 굴복하고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하게 되었으며 언론계 안에서의 공동체 의식이 깨졌다고 보고 있다.(149쪽)

기사를 팔아 밥을 먹는 기자에게는 ‘불량기사’ ‘함량미달의 기사’를 제작하기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매 맞는 아픔보다 더 쓰라렸다. 바로 이 무렵 대학생들이 신문사 앞으로 몰려와 3층 편집국을 향해 돌을 던지고 삿대질을 하며 비난의 욕을 퍼부었다. 사실보도를 똑바로 못 하는 주제에 무슨 신문이냐고, 무슨 기자냐고 외치고 있었다. (···) 당장이라도 기자짓을 때려치우고 뭣이든 딴 짓을 하며 먹고 살아야겠다는 충동이 자주 솟구치는 시절이었다. -J

"대한민국 최고의 신문사 기자라고 우쭐대던 것을 부끄러워"하며(O) "언론인의 사명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대해 괴로워하"던(A) 이들은 마침내 "팔팔한 정의감과 패기로 가득한" "입사 3~4년의 젊은 기자들"(O) 중심으로 71년 4월 15일 언론자유수호선언을 결행하게 된다(A). 이러한 노력은 유신헌법 공포와 긴급조치 선포라는 엄혹한 상황에서 "단결 협력으로 용기를 얻기 위해" "1단으로라도 민주화운동 기사를 실어보자며 결의를 다"짐으로써(I) 74년 3월 언론노동조합의 결성으로까지 이어졌고, 이렇게 "귀중한 자유언론의 씨앗을 뿌린"(동아노조, 1989) 노조의 활동은 그 해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낳았다.

그 날 아침 편집국에서 열린 선언대회에 참석한 나는 치솟아 오르는 감격을 억누를 수 없었다. (···) 금단의 벽 안에 갇혀 있던 진실들을 자유롭게 보도하던 넉 달 반은 동아투위 위원들의 생애에서 가장 보람 있고 빛나던 세월이었다. -N

이렇게 10·24 선언은 1차 언론자유선언 이후 3년 동안의 조직화 즉 "동기생들, 신문사 입사동기들을 중심으로 또는 생각을 같이 하는 사람들 몇 명씩 모인다든지 하는 그룹운동"을 통해 "투쟁방향도 의논도 하고" 하던 것이 "유신체제로 들어서면서 이제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이심전심이 되어" 결실을 이룬 셈이었다(O). 그러나, "창립 집행부는 다음 날 해고되고 연이어 차기 집행부가 뭉텅뭉텅 몇 차례 난도질"을 당하며(L) "방송국 제작부장이 퇴근길에 괴한들에게 납치돼 심하게 폭행당하는 일도 생겨났다. 범인으로 군 특수부대원들을 지목하자 그들이 군복 차림으로 여러 날 동안 교대로 방송국에 몰려와 피해자를 협박"하는 일이 빈번했다(K). 그러나 자유언론을 향한 그들의 열기와 의지는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노조) 집행부를 하겠다는 자원자들이 줄을 섰다. 가슴이 뭉클했다. (···) 이들과 함께라면 무슨 일을 하든 함께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 전에 위축되었던 분위기가 활기를 찾게 되고 취재를 나서거나 친구들을 만날 때도 기운이 나고 자랑스러웠다. 동아일보라는 신문사가 자랑스러웠다. -L

당시의 공포 정치 상황에서 이들은 "‘독립운동 하는 심경’으로 자유언론운동에 매달렸다"(H). "앞으로 내가 이 일로 인해 어떤 고난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여한이 없다고 마음속으로 거듭 다짐"하도록 해준 것은(C) 바로 백지광고 사태에 대한 시민의 지지와 성원이었다.

3) 권력과 야합한 경영진의 해고와 복직의 압박

당시는 내수시장의 급속한 확대에 따라 광고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신문산업이 산업적 차원에서 높은 성장을 할 수 있었던 때여서(장용호, 1995, 22쪽), 광고 압박은 직접적인 통제 수단이었다. 정권이 광고주를 압박하자 실제로 동아일보 상품광고의 98%가 떨어져 나갔다.(강준만, 2000, 488쪽) 대신 국내외 각계각층으로부터 격려광고가 쇄도하면서 민주 회복과 자유언론의 열망이 번져나가자 당황한 유신 정권은 경영진을 압박했고, 사측은 결국 기자를 희생시켜 광고를 얻는 쪽을 선택했다.(동아노조, 1989, 95~97쪽). "그동안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외부탄압에 맞서 함께 싸워나가자던 동아일보 경영진은 언론의 정도와 국민들의 성원을 배신한 채 정부와 더러운 협상을" 했고(G), 이렇게 권력에 굴복한 사측에 대한 기자들의 배신감은 말할 수 없이 컸다.

그렇게 "자유언론의 열풍이 휩쓸고 간 뒤 그 자리에는 해고의 칼바람이 몰아쳤다"(L). "제자리로 돌아간 복직자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기자들은 언론계를 떠나느냐, 주는 월급이나 받으며 죽은 듯이 살아가는 비겁한 샐러리맨으로 남느냐, 아니면 결사항전 하느냐 하는 세 가지 선택 사이에서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O)

실감이 나지 않았다. 퇴직금을 받아가라는 통고에도 좀 지나면 없던 일이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깔려 있었다. 얼마나 좋아하고 자랑스럽던 동아일보였던가. 1968년 입사했을 때 하늘을 날 것 같은 그 기분이 아련하게 스쳐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동아일보가 있어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가. 동아일보마저 굴복하면 이민 가겠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지 않은가. (···) 우리는 계속 전진해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복직될 것이며 또 복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L

처음부터 동아투위가 113명이었던 것도 아니고, 또 모두가 원해서 해직기자로 남은 것도 아니었다. 장기적으로 투위를 끌고 가기 위해 전략적으로라도 복직을 원했지만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원래는 160명 정도가 나왔거든. 호남사람이 많이 흔들려서 복직을 해요. 초기에는 사람이 없으면 제작을 못하잖아. 그래서 들어온다고 하면 무조건 받아들였지. (···) 그러다 6월 들어서면서 문을 닫아버려요. 우리는 몰랐는데, 정부하고 광고를 푸는 것 가지고 이면에서 협상을 하고 있었던 시기예요. 그러면서 회사에서 경고장을 보내죠. 언제까지 출근하지 않으면 당직 처분한다, 해임을 하겠다, 이런 경고를 하니까 무서워서 들어가는 사람들이 한 4,50명 나왔죠. 심사단계까지, 회사가 오히려 큰 소리를 치는 거야. 광고가 풀리니까 심사를 하겠다. 복직의사를 밝혔는데 심사에서 떨어진 사람들이 여러 명 있어요. 그 당시 이런 의견들이 있었어요. 외부의 민주인사들이, 우리가 알아봤더니 20명은 안 된다더라, 20명만 빼고 전원 들어가는 것은 어떠냐. 우린 좋다고 했어요. (···) 그렇게 돼서 다 복직하게 되면 자기들이 봉급 받은 거 생활비도 도와줄 수 있고, 이 상태에서 100명 이상을 장기적으로 끌고 갈 수가 없거든. 그래서 우리는 원했는데 동아일보가 거절을 했어. -M

사측은 해고관련 소송 취하를 복직 조건으로 내걸었고 각서, 부서회의 등 각종 비열한 방식을 동원했다. 이들은 복직을 위해 “벌거벗는 심정으로 소송을 취하”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들어간 것은 몇 명 되지 않았다.(O)

동아일보가 참 치사하게 한 게, 몇 달 되니까 여름 되고, 그 여름철에 살기는 덥죠,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움직였어요. 마지막으로 여름에 복직 신청을 받는데, (···) 조건이 그거예요. 해고관련 소송 취하하라는 거. 그런 건 다시는 안 한다, 각서 쓰는 거 등등. 어떤 부서는 부서회의를 해서, 말하자면 인민재판을 하고···. (···) 그 당시 생각하면 진짜 눈물이 나는 거예요. 그럴 수는 없잖아요. -O

4) 거리에서의 언론운동과 감옥 생활 : 동아투위의 결성과 대안언론 활동

강제 해직된 후 “못 다한 자유언론 투쟁을 계속하기 위한 결의를 다지면서” 동아투위가 발기하였고, "비록 펜과 마이크는 빼앗겼지만 우리는 여전히 언론인이며, 따라서 언론인으로서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고"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이 되는 78년 10월 24일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운동 관련 소식 120여 건을 〉동아투위 소식〉에 게재했다."(O) 그랬더니 “바로 이날 저녁 귀가 길에 홍종민 총무가 연행”된 것을 시작으로 11월까지 동아투위 10명이 연행되어 입건, 구속되는 일이 벌어졌다(L). 이것이 바로『민권일지』 사건이다. 동아투위는 유신체제가 끝날 때까지 모두 17명이 구속되었고 7명이 구류처분을 받았으며 80여명이 중앙정보부 등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등 극심한 고초를 겪었다.(정대수, 1994, 365~366쪽)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뒤에도 감시와 압박은 계속되었다. 신군부의 등장으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80년 5·17 이후엔 동아투위 사무실마저 폐쇄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 여름 많은 동아투위원들이 수배를 받아 몸을 피해야 했다."(O) 그러나 "오랜만에 밤늦게 집으로 들어가다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에게 잡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1주일 동안 고초를 겪"기도 하고(O), 삼청교육을 이수하기도 했다.(H)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대안언론활동은 더욱 조직적으로 발전하였다. 84년 동아투위를 비롯한 해직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결성되었고, 월간지 『말』을 발행하며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대안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갔다. 그러니 자연히 탄압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말』이 발간될 때마다 13차례에 걸쳐 민언협 간부가 연행, 구류 처분을 받았고 사무실이 도청, 수색되었다. 드디어 86년 9월 특집호에서 보도지침을 폭로하며 그 탄압은 가중되었으며 이에 구속 언론인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이 전국민적으로 확산되기도 했다.(말, 1986.12.31, 59쪽) 보도지침에 대한 더욱 자세한 논의는 김주언(2008)을 참조할 것.

걸핏하면 잡혀가고, 압수당하고, 처음부터 곡예의 연속이었다. 나는 이러한 새로운 저항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적극 참여했다. 하고 있는 일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직장에 매여 있는 동료들을 대신해 자리를 메우는 일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D

한편 ''재야의 기자''로서 ''목숨을 건'' 개별적 언론활동도 있었다. "유신독재에 치명타를 날릴 만한 극비 작업을 구상하고" "70년대 후반 격렬했던 노동자들의 인권운동에 관한 생생한 기록을 위험을 무릅쓰고 확보했"으며,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을 찾아 취재활동을 벌이기도 했다.(P)

5) 뒤죽박죽 험난한 인생의 길 : 극심한 생활고, 다양한 직업전선

"무언가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던 절박한 상황에서 동아투위는 "구성원들의 생활난을 공동으로 타개하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다. 그중 하나가 번역출판사업''이었다.(J) 86년 여름까지 계속되었던 종각번역실은 이들에게 "가장 편하고 즐거운 일터"였으나(N), 번역된 책을 팔러 다니는 건 대단한 고역이었다.

나는 열권의 책을 보자기에 사서 가까운 서울신문사로 향했다. 내가 잘 아는 ㅇㅇㅇ기자가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 나는 다짜고짜 “자네 몫이 두 권이야”라고 말했다. “왜 그것밖에 안 되느냐‘면서 그는 보따리에서 다섯 권을 빼앗다시피 꺼냈다. 그리고는 지갑을 꺼내더니 책값을 잽싸게 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 사무실을 나설 무렵 미안한 생각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다시는 이런 일로 그를 찾아 올 수 없을 것 같았다. -J

실감조차 나지 않았던 실직 상태가 점차 장기화하면서 이들의 "손엔 돈이 말라갔"고(L) 당장 살아갈 일이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신문사에서 쫓겨난 직후부터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는 가운데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불안감"은 커져만 갔으며, "걸핏하면 중앙정보부로, 경찰서로 연행해 조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O. "돌반지를 팔아 쌀을 사는"(M, K) 생활도 한계가 있었다. "극빈의 생활"이 이어졌다.(P)

갈수록 무겁게 짓누르는 생활고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임시직으로 다니던 아내의 일자리마저 잃고 보니 앞이 캄캄해졌다. 결혼반지며 아들 돌 반지며 집안에 있던 금붙이는 모두 팔아 썼지만 그것으로 견뎌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O

"어디에 뿌리를 내리기 힘든 부평초 같은 생활", "항상 불안과 동거하고 초조와 동행하는 생활"이었지만(L, I), 작은 주간지나 출판사를 전전하는 이는 그래도 나은 편이었다. 아파트를 팔아 작은 스낵가게를 열기도 하고(O) 여럿이 어울려 복덕방을 차려도 보고(M) 파이프 장사에서 알로에, 꽃가게를 전전하거나(D), 시장에서 과일도 팔고 양말도 팔아보았지만(X), 그 작은 가게에도 정보원이 수시로 들락거렸고 또 장사 수완도 없어 대부분 금세 접고 말았다.

실업자가 된 나에게는 부모님과 처자식 일곱 식구가 수입원 제로 상태로 나동그라졌다.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아나섰다. (···) 무역회사를 몇 군데 알아봤으나 모두가 퇴짜였다. 기껏 술 잘 먹어주는 단추 외판사원 자리가 있을 정도이니 나의 재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I

취업 방해나 수감 생활로 인해 극심한 생활고가 이어지는 가운데, 가족의 지지는 이들에게 더없이 큰 힘이었다. "양심의 지배 하에 떳떳하게 살아가는 자식을 가진 내가 다행스럽다"는 어머니(O), 평생을 아동문고 외판에서 자동차보험까지(B) 무슨 일이든 해서 가족을 돌보는 것은 물론 심지어 남편 있는 곳을 대라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던 아내(정연주, 2011), 아버지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는 것을 봐야 했던 아들(N), 이들은 역사의 또다른 희생자이다.

6) 취업 방해와 좌절, 지속되는 감시

언론사는 물론, 일반 기업에도 취직할 수 없는 상태가 꽤 오래 지속되었다. 대부분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동아투위원들은 생존을 위협받으며 지극히 어려운 생활을 해나갔다. 당시에는 증권회사에도 형사가 출입하던 시절이어서, 회사 오너와의 친분으로 취직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으나 중부경찰서 정보과 형사가 ''불순분자''라며 ''무조건 반대''해서 무산되기도 했다(M).

한겨레신문이 창간되어 논설위원으로 일하기 시작하던 때까지 13년 동안 내가 ‘직장’에 다닌 것은 딱 9개월이었다. (···) 버젓한 직장을 구하려고 해도 박 정권이 만든 ‘블랙리스트’ 때문에 아예 면접도 해주지 않았다. -N

그렇게 3~4년이 지나자 정부의 취업 금지는 보도, 교육 분야를 제외하고 많이 풀리게 되어,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광고 등 다른 분야에 취업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그때 누구한테 들으니까 그러더라고요. "중앙정보부가 이제 정책을 좀 바꿨다. 이 사람들을 취직 못하게 하고 밥을 못 먹게 하니까 배고프니까 더 악을 쓴다. 차라리 배부르고 등 따시게 해주면 입 다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만들자"라고 해서 그 정책이 조금 바뀌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U

그러나 이렇게 다른 직종에서 ‘문간방 나그네’로 떠돌면서도 "언젠가는 본래 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은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K) "쫓겨나오면서 (···) 이 나라에 언론이 좌우간 제대로 바로 서고 가야 된다는 것이 머릿속에 박혔기 때문에" 이들은 회사에 다니면서도 열심히 동아투위나 민언련 활동에 관여하게 된다.(U)

회사 동료들과는 업무 이야기나 가벼운 일상사 얘기만 나눌 뿐 대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가 매월 17일마다 열리는 동아투위 모임에 나가면 종횡무진 백화제방 비분강개, 후련한 대화가 봇물처럼 넘쳐났다. 동아투위 연말 모임에는 해마다 많은 재야 민주인사들이 함께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 유신치하에서 동아투위가 여러 갈래의 민주화 세력을 연결하고 함께 엮어내는 구심점 역할을 해 온 까닭이다. -K

그러나 언론계나 교육 부문은 여전히 취업 금지였다. 친척의 주선으로 한국일보 장기영 사주를 면담하고 발령 준비를 하라는 얘기까지 들었지만 신원조회 이후 좌절되는 경우도 있었다. “미안하게 되었다.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은 국무총리실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당분간 국내 언론기관의 보도직에는 취업 불가라고 한다”는 것이었다.(C) 김민남은 78년 모교인 동아대학교 전임강사로 발령받았지만 "정보기관의 감시는 계속되었고" "80년 신군부에 의해 또다시 해직 교수가 된다."(오창호, 2009, 207~208쪽) 박지동은 해직 당한 지 14년이 지난 89년에야 나이 쉰에 광주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또 취업을 했다고 해서 감시가 느슨해진 것은 아니었다. 경찰서나 안기부에서 "매달 주기적으로 다녀가는 것"은 기본이고(L, I), "시도 때도 없이 직장으로 찾아와서 눈을 부라리며 겁을 주고 때로는 끌고 다니면서 괴롭"히기까지 했다.(I) 정보원에 의해 집도 감시당했고(H), 신원조회 때문에 이들의 ''신분''이 탄로나기도 했다.

제가 해외 나가는데 신원조회 하려니까, 그 당시 신원조회가 세던 때 아니예요? 어느 날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니까 우리 부서가 난리가 났어. “이상한 사람이 와서 너를 막 찾고 그러는데 어떻게 된 거냐?” “정보부 사람이 널 찾아.” 다른 사람들은 모르죠. 제가 어디 출신이라는 얘기를 거의 안 했거든요. -U

그렇게 ‘죽지 못해 살았던’ 세월이 이어지면서(A), "해직 당한 후의 좌절감, 재취업의 어려움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에 응어리로 남아 있"게 된다.(W)

7) 한겨레 창간과 갈등의 가시화

87년 6월 항쟁 이후 진보언론에 대한 국민의 열망과 재야언론운동의 분투의 산물(주동황 외, 1997, 233쪽)로서 한겨레 창간 준비가 본격화되면서 동아투위는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군부독재 시대를 살면서 다시 펜을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한 지 오래"였던 이들에게 한겨레 창간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정연주, 2002, 6쪽)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기쁘고 흥분된 마음으로 창간 작업에 참가했다. 열심히 일했고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정력적으로 일했다. -L

그러나 그 즈음에는 해직 후 12년이나 지난 상황이었고 한겨레에 대한 전망도 밝지 못했던 터라, 어렵사리 구한 직장을 또다시 그만두고 한겨레에 합류하는 것은 적지 않은 고민이 되기도 했다.

이때 나는 작은 주간지에서 주간으로 일하며 소일하고 있던 때였다. 동지들이 새 신문을 창간한다는데 참여하기도 그렇고 보고만 있기도 그런 어정쩡한 상태였다. (···) 이 자리도 간신히 얻은 터였다. -M

그런 이유로 송건호 선생의 제의에도 ‘나름대로의 선택’으로 거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V), 그렇다고 원하는 사람이 모두 한겨레에 합류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동아투위는 대외적으로는 환영하는 걸로 되어있었지만"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한겨레) 창간 4인방이 있었고, (···) 이면에서 (4인방의) 의견이 서로 안 맞으면 커트 당했어요. 동아투위를 놓고도 ㅇㅇ가 평가하는 거 하고, ㅇㅇ가 평가하는 거하고 달라. 합의가 안 돼. (···) 안 알려져서 그렇지 많은 사람들이 심사에서 탈락을 했어요.

그나마 송건호가 ‘이질적 인적 요소’를 조정, 통합했지만(고승우, 2004, 148쪽) 이러한 이질성에서 오는 갈등은 창간 준비 당시부터 내재되어 있었다. 한겨레는 출범 이후 지면 성격과 경영 방향, 정파와 파벌의 경계, 언론과 정치권력의 거리, 지배제도와 선출제도 등 네 가지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다.(한겨레신문사, 2008). 한편 고승우(2004)는 한겨레의 대표적인 갈등 사례를 경영전략의 시각차, 편집권을 둘러싼 갈등, 주총의 권한에 대한 갈등, 주주와의 관계 혼선 등으로 제시한다.(271~276쪽).

즉, 한겨레 창간의 주축인 해직 언론인들의 상당수는 새 신문 창간보다 그 해 겨울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에 더 큰 관심을 두었고, 또 그 안에서도 모두가 생각이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차이는 80년대 한겨레의 파벌 형성으로 이어져 이른바 비판적 지지파와 후보단일파로 나뉘게 된다. 이렇게 민주세력의 동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비지파'' A파와 언론 그 자체의 교유한 지위를 강조하는 ''후단파'' B파의 갈등은 사내 선거를 두고 거세어졌다. 91년 무렵 이 둘을 비판하는 C파가 등장함과 동시에 사내 경쟁구도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약화되기 시작했다>(한겨레신문사, 2008, 166~169쪽).

''비지파''는 동아투위와 호남 출신, ''후단파''는 조선투위와 영남 출신이 주도했다고 하지만(한겨레신문사, 2008, 169쪽) 엄격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어서, 동아투위 안에서도 "보수가 있고 진보가 있"으며 비지파와 후단파가 있었다.

우리 팀 내에도 그런 분열이 있었어요. 호남권을 중심으로 한 사람들은 비지파로 분류가 되고, 영남권을 중심으로 한 많은 사람들은 후단파 김영삼 쪽으로. (···) 한겨레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일 수가 없죠. 창간 이유가 뭔데. 독재권력과 투쟁하려고 만들어진 거지. (···) 경영난이 오면서 그런 (파벌 같은) 게 없어졌어요.

물론, "결국은 이것도 20여명 선의 핵심세력 얘기"이긴 하지만, 당시 한겨레의 노선이나 방향에 대한 동아투위원의 불만이 제기되기도 했다.

내가 한겨레 있는 누구한테, 우리가 원했던 것이 이런 언론자유는 아니다, 너무 극단적으로 나가고 좌파적으로 나오고 그러니까, 이게 내가 추구한 언론자유 결과는 아닌 것 같다, 잘못된 것 같다 했더니, 그 사람이 말을 아주 잘 알아듣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는데, 좀 그런 게 있더라고, 상당히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지 않겠냐고···. 그러니까 결국 정치집단이 맞는··· 신문도 그 정치집단이 만든 신문인 거지.

바로 이같은 점이 한겨레를 불편부당지라기보다는 당파지, 전문성보다는 투쟁성을 앞세운 언론인, 객관성보다는 가치성을 지향한 신문이라는 비판을 받게 하는 지점이다.(고승우, 2004, 286쪽)

8) 정계 혹은 공직으로 : 민주사회를 위한 또 다른 노력?

97년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한겨레의 정치적 갈등은 자연스레 해소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에 큰 의미를 부여한 비판적 지지파 중 일부는 언론계를 떠나 정치권으로 옮겼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비지파의 약화를 부추겼다.(한겨레신문사, 2008, 169쪽) 동아투위 역시 직접 정치에 투신하거나 정부나 공공기관에 진출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국회의원, 장관도 나왔고, 언론사 사장도 나왔다. 특히, 혹은 "노무현 정부와 코드가 맞"았던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서 동아투위는 정부위원회에 상당수가 참여하고 활약하게 된다. 여기서 비판 언론인으로서 정권에 직접 참여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는데, 이들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가진 것도 권력이긴 권력인데 우리의 권력은 상징적인 의미지 실질적인 힘은 없잖아요. 실효적인 어떤 권력은 아니거든. 그럼 어떤 생각을 갖게 되느냐면, 판을 바꿔야 된다. 그래야 이상을 실현할 수가 있다. 이런 고민에 부딪혀요. 판을 바꿔야 된다고 생각을 하니까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캠프에 들어가야 돼요. -M

동아투위원들이 해직 언론인으로서 정치권에 몸을 담거나 공직에 진출한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그다지 비판적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까워했다.''

언론자유운동을 하면서 정치에 뜻을 둔 사람들이 없잖아 있었을 거예요. 왜 그렇게 보는가 하면, 언론자유운동 하지 않았던 우리 선배들이 국회로 많이 진출했잖아요. 많지. 동아일보에도 얼마나 많아. 오히려 투쟁을 했기 때문에 그리로 가는 길이 차단이 됐지.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고 너무 일찍 현장에서 쫓겨났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중에 정치부 있던 사람들은 거의 다 국회의원으로 갔어요. (···) 그런데 동아투위 사람들은 별난 사람들이고, 그런 뜻이 너무 빨리 꺾였죠. 그대로 언론에 남아 있었으면, 그렇게 해서 자기 능력대로 혹은 어떤 관계를 통해가지고 정치권으로 나갈 수도 있었고 공직사회도 나갈 수 있었을 거예요. 근데 그런 것들이 다 막힌 것을 생각하면···. 그 재능이 언론자유라는 것을 쟁취하기 위한 좋은 것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점에서 아까운 거지.

그러나 비록 언론계는 떠났어도 해직 언론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이들의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다. "민주화운동과 정치참여의 길을 35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걸어왔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민주화 운동가나 정치인이기보다는 해직 언론인"이라는 것이다.(H)

9) 김영삼, 김대중도 외면했던 동아투위 복직 문제 : ''역사의 미아''가 되기를 거부하며

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동아투위는 복직을 기대했으나 무위로 돌아갔고, 93년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복직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기자협회, 언론노조, PD협회 등의 지원을 업고 동투, 조투, 80년 해직그룹이 공동보조를 취"한 결과, "80년 해직그룹 측에게는 복직·보상 등의 실마리가 풀렸지만 동아투위 문제는 회사와의 관계라며 외면당한다."(윤활식 집필분, 김학천, 2007, 546쪽) "75년 회사 안에서 농성하고 있을 때 농성장을 직접 찾아와 격려하고 성원했던 김영삼, 김대중 양 김 씨가 잇달아 대통령이 되었어도 이 사건에 대해서는 함구무언"이었다.(C)

이상하게 YS든 DJ든 (···) 말로만 뭘 해주겠다고 해놓고 던져버렸거던요. 그러니까 동아투위가 사실은 그 민주화정권, 김대중 정권이나 노무현 정권에서도, 말하자면 잊어버린 망각의 장소에 있었던가, 아니면 나쁘게 얘기하면 버림받은···. 그런 거죠. 왜냐면 DJ만 해도 5·18하고 80년 해직하고 딱 붙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만 신경 썼지. -U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모순적이게도 혹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동지라고 생각했던 ''민주정권''조차도 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주류 언론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떤 정부든지 현 언론에 대해서는 약해. 그러니까 언론을 장악하려 들지, 거스르려 하기보다. 그러니까 동아일보라는 큰 힘, 우리는 동아일보가 끝났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역시 큰 힘으로 존재하고 있고 그런 힘에 맞서 과연 우리 동아투위를 살리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결국은 몇 번 이야기해 봐도 결론이 거기에 딱 (걸리는 거죠). -S

그런 맥락에서 이들은 힘없는 ‘거리의 기자’로서(P) ‘비주류의 슬픔’(M) 속에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동아투위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한 것은 "궁핍해진 생활형편을 펴보자는 것도 아니고, 정부의 선처나 자비를 구걸해 보자는 것도 아니"다.(O) 동아투위는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 항소심에서 "국가 공권력에 의한 해직은 인정하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시효가 이미 지났다"는 이유로 2012년 3월 패소했고, 이에 대해 대법원 상고를 결정한 상태이다.(동아투위, 2012. 3. 23)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명예가 회복되고, 동아투위가 법정에서 승리했다는 역사의 기록이 남는 일이다. 우리가 재판에서 승소한다 하더라도 동아일보사가 우리를 복직시켜줄 것은 아니니 이 사람은 ''영원한 동아일보 해직기자''로 그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라 믿는다. -M

이들은 "비록 과거 정부가 저지른 잘못이라 해도 그 때문에 정의로운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다면 그 고초에 대해선 현 정부가 마땅히 배상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으며(O) "역사의 미아가 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C)

10) ''영원한 해직 기자'' : 지금도 돌아가고 싶은 언론현장

동아투위는 과거의 결단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잘 나가던 직장, 알아주던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생애를 살아왔지만 결코 후회는 없다고 한다. 이들의 염원은 단 하나, 그저 "할 수만 있다면 정말로 직업윤리에 충실한 하나의 기자이고 싶"었고(O), 그렇기에 "굴절된 현대사의 큰 흐름 속에서 바른 길을 가려고 나름대로 몸부림했으며"(김동현, 2006), 그런 고통의 세월도 보람이라 여길 수 있었다. 일부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극심한 시련을 겪으며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삶을 살고 있어도(P), "내가 속한 동포사회의 평등과 민주화된 이성적 질서를 통해 평화로운 삶을 이룩해보려는 끊임없는 노력과 좌절에서 오는 육체적·정신적 고통의 세월 속을 헤매어온 몸부림의 과정"(I)이기에 그만큼 의미가 있다고 자부한다.

서른다섯 나이에 방송국을 쫓겨나서 이리 저리 떠돈 지 35년. 어느 직장을 가도 스스로 ‘문간방 나그네’로 생각하고 지냈으니 이룬 업적도 없고 가진 재물도 없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현실의 길을 버리고 역사의 길을 선택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나마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시대를 함께 살아온 나의 보람으로 충분하다. -K

동아투위에 대해 한국 사회는 "‘아 그 사람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평가"와 "예우를 해"준다.(M)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불철주야 고심하고 땀 흘렸던 그 시절은 나에게도 우리 사회의 민주화 과정에서도 전성기"였지만(P), 그러나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 어찌 크지 않으랴. 이들은 요즘도 그 옛날 동아일보 기자 시절의 꿈을 꾼다고 한다.

나는 요즘도 가끔 동아일보 입사 시절의 꿈을 꾼다. 밤새도록 술 마시다 미처 술이 깨지도 않은 새벽 시간, 경찰서 취재 가기 위해 서둘러 시내버스 첫차를 타던 일 같은 고달팠던 기억의 한 토막말이다. -M

동아일보사에서의 기자 생활 5년은 너무나 짧았다. 그 시절이 몹시 그리워서일까? 나는 가끔 취재 현장으로 돌아가 펜을 쥐고 뛰어다니는 꿈을 꾼다. 그 때마다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모른다. -P

동아투위가 원하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자랑스런 직장에서 ‘시련의 땅(권도홍, 2010, 103쪽)이 되어버린 동아일보, 그 동아일보 기자로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동아일보는 애증의 대상이다. "너무도 사랑했던 동아일보가 끝내 잘 되기를 바랐"는데, "지금 이토록 무너져버린 동아일보를 보면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측은하면서 한쪽 가슴이 시리기도 한 것이 솔직한 심정"(L)이라고 한다. "과거의 상처를 씻고 화해할 수 있도록" "단 하루라도 동아일보사로 돌아가서 자유롭고 공정한 신문과 방송을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이들의 ‘평생소원’이다(N).

나는 아직도 그 동아일보에 돌아가고 싶다. 단 하루라도 편집국 한켠 내가 있었던 자리에 가서 앉아보고 싶다. (···)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어 3등 신문, 찌라시 신문으로 불리는 그 신문 제작의 현장에 서서 왜 그 신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지금의 동아일보 사람들과 얘기해보고 싶다. -E

5. 맺음말 : 또다시 민주주의와 언론의 문제로

해직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이들이 쉰이 다 되기까지 ''거리의 언론인'' 혹은 ''문간방 나그네''로 살며 겪어야 했던 고통은 "35년이 넘도록 잦은 악몽으로 재현되어 반복적으로 정신과 육신을 괴롭"(I)힐 만큼 크고 깊었다. 자유언론을 위해 자신과 가족의 삶을 희생했던 동아투위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빚을 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5년 이래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기까지 정권은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그들의 복직이나 명예회복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당대 가장 영향력 있는 단일 신문사가 160명 이상의 언론인을 한꺼번에 해직했던 동아 사태는 오늘날 한국사회와 언론에 어떤 시사점을 던지고 있는가? 70년대의 해직 언론인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해직 언론인이 생겨나는 한국사회의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언론은 시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시민들은 그 기사를 통해 정보를 습득하며 더 많은 정보를 습득할수록 민주적 토론에 참여하게 되고 이를 통해 민주주의는 실현된다.(Gans, 2003/2008, 112쪽) 시민에게 가치있는 정보를 제공하려면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전제되어야 한다. 언론에 대한 권력의 간섭과 통제는 자유언론에 대한 열망과 공정보도에 대한 소신을 지닌 일련의 언론인에 의해 어느 정도 견제될 수 있다는 것이 동아투위 사례를 통해 증명되었지만,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이행 지체 현상은 오늘날 언론이 처한 현실에서도 쉽게 포착될 수 있다. 낙하산 인사와 언론인 감찰을 통해 언론을 통제하려는 정치권력, 권력의 감시와 비판보다 권력 창출에 총력을 기울이는 언론권력, 자유롭고 공정한 보도보다 사업 확장에 관심을 쏟는 언론기업, 소명의식보다 샐러리맨 의식이 강한 언론인 등, 우리 언론이 당면한 상황은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미 많은 진단과 처방이 나왔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신문은 넘쳐나고 방송 채널은 수없이 많은데, 권력을 비판하고 국민에게 진실을 말해주는 언론은 어디에 있는가?

87년 민주화 이래 ''유사국가기관''이라 할 정도로 막강한 정치·사회적 권력을 지니게 된 한국 언론이지만(박승관·장경섭, 2001, 91쪽) 그에 대한 정치권력의 간섭과 개입은 늘어나고 있고, 그 결과 언론 자유도는 지속적으로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 국경없는 기자회(Reporters Sans Fronti?res)의 발표를 보면, 2011년에는 12.67점으로 세계 44위라는 저조한 상황임을 보여준다.(출처 : http://en.rsf.org/press-freedom-index-2011~2012,1043.html)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의 평가는 32점으로 ''부분적 자유국''으로 전락했으며, 정치적 제약이 14점, 법적 제약 9점, 경제적 제약 9점으로 특히 정치적 제약이 매우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출처:▶http:// en.rsf.org/, http://www.freedomhouse.org/report/freedom-press/2011/south-korea)
이는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불완전하며 후기 권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정태철(2005, 446쪽)의 지적과 부합하는 지점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는 그 양상이 더욱 심각해서 정권과의 갈등으로 해직된 언론인이 2012년 4월 현재 YTN 6명, MBC 5명, 국민일보, 부산일보 각 1명 등 총 13명에 이르고(장우성, 2012. 4. 11), KBS와 MBC, YTN 등 방송사의 파업이 수개월째 장기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동아투위로 대표되는 해직 언론인에 대한 관심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절실하다. 그들은 자유언론의 가치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인이며, 그들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수많은 질곡을 그대로 담고 있는 거울이다. 이 연구는 해직 언론인의 삶의 역사를 추적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그들의 삶의 계기마다 담겨 있는 이면의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드러내고 그 사회적 의미를 추출해내고자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생애도 방대한데, 수십 명의 이야기를 동아투위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어 간략히 추려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랐다. 특정부분을 덜어내는 과정에서 의도하지 않은 왜곡이 생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더구나 동아투위 113명의 결코 같지 않은 생애 과정을 스무명 남짓으로 대표하여 버무려낼 수 있는지도 무척이나 조심스런 부분이다. 되도록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하였으나 제한된 분량 속에 함축성과 일관성을 갖추어 추려낸다는 것은 결코 녹록치 않은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가 언론인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개인의 삶을 기꺼이 희생했던 해직 언론인들의 결단과 고난을 기억하고 그것을 사회적, 역사적 맥락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다면, 나아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정권의 언론 통제 시도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여 민주주의와 자유언론, 공정언론의 숭고한 가치를 조금이라도 되살릴 수 있다면, 그리하여 우리 언론이 제자리로 돌아가 신뢰를 회복하는 데에 일조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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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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