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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청년회, 나를 고발하다[내 인생 취재기] 4·3의 추억…사과 요구 거부, 소송에서 이겨
〈강기석 경향신문 전 편집국장〉
  • 관리자
  • 승인 2017.04.03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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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제주 4.3항쟁 혹은 4.3학살 69주년이다. 내게도 이 날의 아픈 기억이 하나 있다. 지금은 20년 가까운 옛날 일이 됐지만 상당 기간 동안 내 기자 생활의 트라우마로 작동했던 사건이다. 논설위원 재직 시 이 사건에 관한 글을 하나 썼는데 이것이 ‘서북청년단’이란 고약한 집단의 비위를 거스르는 바람에 곤혹을 치른 것이다.

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날이 밝으면 가톨릭계 신부를 맞아 결혼함으로써 오랜 박해의 두려움에서 헤어날 수 있게 된다는 들뜬 기쁨 속에 신랑 앙리 나바르를 비롯한 위그노(프랑스 내의 프로테스탄트)들은 늦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간 신부 오빠 샤를 9세를 비롯한 가톨릭교도들은 결혼식 참석을 위해 전국에서 상경한 위그노 지도자들을 일거에 제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누구를 죽일 것인가에 논의가 이르렀을 때 샤를 9세는 말했다. “짐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단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서 내 책임을 묻지 않도록 모조리 참살하시오.” 이튿날 1572년 8월 24일 새벽, 성당의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신호로 ‘바르톨로뮤의 대학살’은 시작되었다.

1948년 4·3사태 당시 남한의 치안 총책임자는 “전 섬(제주도)에 휘발유를 붓고 빨갱이는 모두 죽여도 좋다.”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400년 가까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서도 종교나 이념이 다른 정치적 반대자들을 말살하고자 하는 광기는 신통하게 닮았다. 4·3사태 때는 특히 이념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양민들이 당시의 민병대라 할 수 있는 서북청년단 등에 의해 주민의 10분의 1이 넘는 3만 명이나 학살당했다.

동티모르에 대한 전투부대 파병 여부를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서 4·3사태 관련 재판기록들이 새로 발견됐다는 소식이 곤혹스럽다. 우리가 이제는 인권수호자로 자처할 정도가 됐지만 우리 자신의 무자비한 양민학살 사건에 대해서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역사에 부끄럽지 않은 공식 해석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섬뜩한 자각 때문이다.

재작년 8월 23일 파리에서 열린 세계가톨릭청소년대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400년 전 ‘바르톨로뮤 대학살’에 가톨릭이 개입했음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은 믿음이 굳세지도록 하는 정직하고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4·3학살’은 누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억울한 넋의 한이 풀릴 것인가. (경향신문 1999년 9월17일 ‘여적’ 「4.3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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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여적’은 사회적으로 화제가 되는 토픽을 매일 1개씩 뽑아 딱딱하지 않게 수필 식으로 논평하는 형식이다. 당시 논설위원 8명이 매일 번갈아가며 썼다. 토픽 선정은 주필 주재 아래 토론을 통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만 일단 선정된 후에는 담당 논설위원이 전적으로 작성에 책임을 진다. 문제가 된 ‘여적’의 경우 당시 4·3사태 관련 수형자 명단이 국회 조사단에 의해 새로 발견됐다는 뉴스에 착안해 내가 발제한 것이다.

글이 나가자 ‘서북청년 중앙회’라는 단체에서 나에 대한 형사 고발은 물론 나와 〈경향신문〉에 대해 12억에 이르는 민사소송까지 제기했다. 이 단체 임원진이 회장 이하 12명이었기 때문에 1명당 1억씩 손해배상을 요구한 것이다. 나는 해방 정국의 살인마 집단 ‘서북청년단’이 그때까지 ‘중앙회’라는 이름을 붙인 친목단체 형태로 유지되고 있는지를 꿈에도 몰랐다. 당초 이 단체에서는 나의 공식 사과와 지면을 통한 사과만 있으면 문제를 덮어 줄 수도 있다고 제안했고 회사는 이를 받아들일 태세였는데 내가 거부했다.

그때부터 고난이 시작됐다. 우선 회사 도서실에 틀어 박혀서 30쪽에 이르는 ‘4·3사태’ 여적 칼럼 관련 서북청년 중앙회 고발에 대한 소명서를 준비했다. 여기에는 언론인의 현대사 인식의 방법과 태도, 명예훼손의 고의성 여부, 서북청년단이 주장하는 여러 사실들의 허위성, 양민 사망자 수 3만 명의 사실성 등이 들어갔다. G-2 보고서 등 여러 증거자료들과 관련 서적, 신문 보도 등을 덧붙였다. 88년~90년 노조활동을 같이 했던 <제주도민일보> 동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는 검찰에 불려가 4시간 동안 딱딱한 의자에 앉아 조사를 받았다. 내가 89년 평화방송 파업 주동자로 구속 기소되어 감옥생활까지 한 적이 있지만 글을 써서 필화를 입을 줄을 몰랐다. 유죄가 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고 젊은 검사에게 취조 비슷한 것을 받으니 자존심도 상했다.

다행히 형사에서 무혐의가 떨어졌고 민사에서도 단 한 푼 내지 않아도 됐다. 정의와 진실의 승리였다고 믿긴 하지만 당시가 민주정부 1기였던 김대중 정부였던 점도 무혐의 처분받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만일 이명박이나 박근혜 정권 때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면 절대 못 벗어났을 것이라고 믿는다. 기자들에 대한 ‘flak(외부에서의 압력)’이 언론 활동을 얼마나 위축시킬 수 있는지 생생한 사례다.

이 사건은 언론 관련 판례집에도 수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직접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끝으로, 당초 제목은 ‘4?3 항쟁’으로 달았으나 친절한 실장께서 ‘4?3사태’로 바꾼 것이다. 당시 김대중 민주정부가 들어섰고 경향은 한화로부터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경향신문〉은 여전히 앙샹레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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