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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 명예회원으로 함께한 38년[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24)] 이해동 목사
  • 관리자
  • 승인 2017.04.03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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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의 동지들이 박정희 유신독재의 언론통제와 탄압에 맞서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한지가 금년으로 39주년이 되고, 고용된 깡패들에 의해 꼭두새벽에 130 여명이 동아일보사를 강제로 쫓겨나 마침내 동아투위를 결성한 지도 38주년을 맞게 된다. 당시 나와 동지들의 머리는 흑발에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홍안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 늙은이가 되어 이른바 ‘지공선사’(지하철 공짜로 타는 사람들)가 되어 버렸다. 가장 나이 적은 동지가 우리나이로 65세이다. 이미 유명을 달리한 동지들도 여러분이다. 애석하기 이를 데 없다.

장장 40년이 가깝도록 자유언론 실천을 향한 동아투위 동지들의 치열하고 처절한, 그러나 아름다운 투쟁은 아직 진행형이다. 앞으로도 우리의 이 선한 싸움은 멈출 수 없고, 끝내 이겨내야 할 싸움이리라.

한빛교회 목사로 동아투위를 만나다

동아투위 동지들과 나의 관계는 한 식구나 진배없이 밀접하고 끈끈하다. 나는 한국을 떠나 있었던 1983년에서 1988년까지 5년간 말고는 동아투위 행사에 거의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로 인해 나는 동아투위 동지들로부터 명예회원으로 불릴 정도다. 이렇게 된 데에는 사적 인연도 있고 공적 동기도 있다. 사적 인연이라 함은 개인적 친분을 일컬음이요, 공적 동기라 함은 반독재투쟁에 뜻이 맞아 함께하였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두 관계가 서로 상승작용을 함으로써 동아투위 동지들의 투쟁과 아픔은 나 아닌 타자의 것이 아니고 나로서는 회피하거나 방기해서는 안 될, 곧 나의 아픔이요 나의 투쟁이었다.

내가 한빛교회 목사로 부임한 것은 1970년 3월이었다. 나이 서른여섯, 젊음이 한창인 때였다.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사람을 일컬어 ‘던져진 존재’라 이른다. 나는 하느님에 의해 한빛교회라는 운명적 생활공간에 던져진 셈이었다. 내가 한빛교회 목사가 된 것은 어쩌면 나의 삶의 방향과 질을 결정해 주는 결정적 계기였는지 모른다.

한빛교회는 문익환 목사님의 아버님 문재린 목사님께서 일제강점기에 담임목사로 시무하셨던 북간도 용정중앙교회의 피난교우들 중심으로 1955년에 설립된 교회로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신 문익환 목사님께서 14년간 설교하신 교회였다. 1960년대 말, 문익환 목사님께서는 구약성서 공동번역(개신교와 가톨릭이 공동으로 히브리 원전에서 직접 우리말로 옮긴 최초의 번역) 작업을 위해 다른 모든 일을 정리하고 오직 번역하는 일에만 전념하려고 대학 교수직도 사임하시고, 한빛교회 목사직도 내어놓으셨다. 그래서 내가 문 목사님의 뒤를 이어 한빛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문익환 목사님은 한국신학대학에서 나를 친히 가르치신 스승이다. 구약 예언서도 히브리어도 배웠다.

문익환 목사님은 우리나라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기신 어른이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간 우리나라 민주·인권회복운동과 민족통일운동에서 그분의 역할과 영향은 막대한 것이었다. 특히 남북 분단 극복과 통일운동에 큰 획을 그은 선구자시다. 나는 한빛교회 목사가 됨으로써 문 목사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그 어른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생활했다.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아마도 내가 가장 긴 세월을 문익환 목사님과 지근거리에서 생활한 사람일 것이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되어 간 나의 첫 번째 감옥행도 사실은 문 목사님 심부름하다 걸려든 것이었다. 이렇듯 사람의 삶은 그물코처럼 얼기설기 얽힌 인간관계의 끈으로 엮어져 가게 된다. 나는 한빛교회 목사라는 신분으로 이런저런 일에 참여하여 역할을 했고, 그것이 내 삶의 방향과 질을 결정했다고 하겠다.

내가 동아투위 출범 당시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데에도 한빛교회 목사였다는 점이 한 몫 거든 셈이었다. 한빛교회에 부임하여 첫 번째로 주례를 본 결혼식이 다름 아닌 동아투위 동지 조민기와 홍정선의 결혼식이었다. 홍정선은 한빛교회 교우였다. 얼마 안 되는 한빛가족들 가운데 교회의 중심 역할을 하던 안인숙 권사(당시는 집사)의 맏딸로, 이화여대 국문과를 갓 졸업한 곱고 발랄한 규수였다. 신랑 조민기는 서울사대를 나와 동아방송 프로듀서로 일하던 선비 타입의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였다. 내가 한빛교회에 부임한 날이 1970년 3월 15일이었고, 이 두 사람의 결혼 날자는 3월 30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한빛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 불과 보름 만에 본 교인가정의 혼사였다. 결혼식장은 서울 명동에 소재한 YWCA 강당이었고, 주례는 당시 서울상대 학장인 최문환 박사였다.

무려 43년 전의 일인 조민기·홍정선의 결혼식에 대해 내가 이렇듯 소상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내 기억력이 출중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나는 지난 일에 대한 잊음이 몹시 심한 사람이다. 사람 이름 기억 못하기로도 뛰어난 사람이다. 꽤나 많은 젊은이들을 직접 주례했지만 나는 그들의 결혼식 날자나 장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서만은 기억이 생생하다. 까닭은 조민기·홍정선 내외와 나의 관계가 목사와 교인이라는 사적인 관계를 넘어 바른 삶을 향한(자유언론실천과 민주회복이라는) 공적 지평에서 동지적 관계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동아투위 조민기 위원의 영결식 집례를 맡다

조민기, 그는 너무도 짧게 살고 갔다. 동아투위 동지들 가운데 가장 먼저 우리와 유명을 달리했다. 1977년 정월에 갔으니 그의 결혼 생활은 고작 7년에 머물고 말았다.

두 사람의 신혼 둥지가 교회 근처여서 우리 내외와는 수시로 오가며 다정하게 지냈다. 신혼이지만 혹 두 사람 사이에 말다툼이라도 있는 날이면 우리를 찾아와 푸념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흉허물 없이 지냈다. 두 사람 사이에 예쁜 딸이 태어났다. 얼마나 좋았던지, 이름을 ‘아라’라고 지어 아빠 성과 이어 부르면 ‘조아라(좋아라)’로 불릴 수 있게 했다. 그런데 마냥 즐거워야 할 그 새 가정에 감당하기 벅찬 시련의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 자유언론을 말살하려는 박정희 유신독재의 언론탄압으로 말미암은 재앙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독재권력과 야합한 악덕 사주에 의해 유신독재에 맞서 자유언론을 실천하려던 130여명의 동아투위 동지들이 1975년 3월에 거리로 쫓겨났고, 한빛교회 교우인 조민기도 그 투쟁대열 한 복판에 함께 있었다.

조민기는 당장 세 식구의 생활이 문제였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동아투위 동지들 모두가 겪게 된 공통의 고난이었다. 조민기·홍정선 내외는 전혀 경험한 바 없는 장사마당에 나서서 조그마한 아동복 가게를 열었다. 가게 이름은 딸아이의 이름을 따 ‘아라네 가게’라 붙였다. 아내인 홍정선이 갓난아기 ‘아라’를 돌보며 가게를 보았고, 남편인 조민기는 가게 문 여닫는 일이며, 꼭두새벽에 동대문시장이나 남대문시장에 나가 물건 사들이는 일이며, 또 동지들과 함께 투위 활동에 적극 참여하느라 쉴 새 없이 동분서주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조민기는 병을 얻고 말았다. 신장이 망가진 것이다. 과로 탓이었다. 그러나 쉴 수가 없었다. 점점 병이 짙어져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조민기 동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1976년 말경 서울구치소 안에서 들었다. 당시 나는 ‘3·1 민주구국선언’사건에 연루되어 1976년 3월부터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었다. 면회 온 아내로부터 조민기 동지가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있고, 위독한 상태라는 말을 들었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마음은 당장에라도 병실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다행이 나는 1976년 12월 29일 2심에서 집행유예가 선고되어 구속된 지 10개월 만에 출감함으로써 임종 전에 병상의 조민기 동지를 보고, 마침내 1977년 1월 21일 그의 임종을 지킨 뒤 장례를 집례할 수 있었다.

조민기 동지의 요절은 130여명 동아투위 동지들에게 큰 충격이었고, 모두의 슬픔이었다. 그의 죽음은 동지들이 겪은 첫 번째 죽음으로서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얼마든지 닥칠 수 있는 위험이고 아픔이었으리라. 조민기 동지의 사인은 단순 병사라고 할 수만은 없다. 그의 득병은 과로 때문이었고, 그의 심적·육체적 과로의 원인은 박정희 유신독재권력의 언론탄압 때문이었으니 결국 단순한 병사가 아니라 악한 독재권력에 의한 간접 살해였다고 해서 틀린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유신투쟁의 중심지가 된 목요기도회

내가 동아투위 동지들과 얽힌 사연들을 더 이야기하자면 개인사를 조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말한 대로 나는 1970년 3월 15일 한빛교회에 부임했다. 당시 한빛교회당은 장충단공원 근처에 있는 장충모자원 구내의 자그마한 임시건물에 있었다. 나는 교우들과 협의하고 합심하여 1971년에 현재 한빛교회가 소재하고 있는 강북구 송중동(당시는 미아4동) 136-118번지에 대지를 마련하여 아담하게 교회당을 신축했다. 그리고 비록 수는 적었지만 순하고 선량하기 이를 데 없는 교우들과 더불어 교회 가꾸기에 힘을 쏟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작은 교회의 지극히 평범한 목사였다. 교우들과 더불어 예수 바르게 잘 믿고, 이웃과 올곧게 어울려 살기를 바라던 작은 교회 목사였다. 그런데 세상이, 시대가 나를 역사의 회오리바람 한 복판으로 몰아넣었다.

주지하다시피 1971년 4월에 제7대 대통령선거가 있었고, 1972년 10월에 ‘유신’이 선포되었으며, 1974년 1월에 긴급조치 1호가, 4월에 긴급조치 4호가, 1975년 5월에는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됨으로써 헌법기능이 정지되어 박정희의 말이 곧 법이 되는 무법, 불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1974년 1월에는 유신을 반대했다는 혐의로 장준하 선생을 비롯한 민주인사가, 또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실에서 유신 반대 성명을 발표한 사건으로 권호경·김동완·이해학·이규상·박윤수 등 젊은(당시로서는) 전도사들이 구속되었으며, 4월 긴급조치 4호로는 이른바 ‘민청학련사건’으로 200명이 넘는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이 구속수감되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어 5월에는 ‘민청학련사건’ 배후세력으로 북의 지령을 받고 활동했다는 이른바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으며,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된 1975년 5월 이후에는 유신헌법에 대해 비난만 해도 잡혀가는 공포통치가 온 세상을 얼어붙게 하면서 침묵을 강요했다.

이러한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신변과는 직접 관계없는 일이니 강 건너 불구경하듯 구경꾼으로 있어야 하는가? 고민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초교파적으로 무거운 마음을 지닌 젊은 목사들이 이심전심 자리를 함께하여 의논한 끝에 기도회를 갖자고 합의했다.

성직자와 교수, 수많은 청년학생들이 나라의 민주회복과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위해 영어의 몸이 되어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분들과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성직자들로서 두 손 놓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싶어 최소한 기도라도 드리자고 한 것이었다. 그래서 1974년 7월 초순경의 한 목요일 오전 10시 종로5가 기독교회관 1층에 있었던 소회의실에서 20여명의 젊은 목사들이 모여 기도회를 시작했다. 이것이 1970년대 인권회복과 민주회복을 위한 개신교 투쟁의 상징적 집회가 된 목요기도회의 출범이었다. 이렇듯 목요기도회는 젊은 목사들의 자생적 기도회였다.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이던 고 김관석 목사님의 숨은 후원은 목요기도회가 계속 발전해가는 데 절대적인 힘이었다.

목요기도회는 처음부터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대중집회는 아니었다. 단지 목사들의 기도회였다. 집회시간과 요일이 이를 증명해준다고 할 수 있다.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가 집회시간이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했다면 어떻게 평일인 목요일로, 또한 오전 10시로 집회시간을 잡을 수 있었겠는가? 목요기도회는 암울한 시국에 대한 당시 젊은 성직자들의 고민이 담긴 자성과 신앙고백적인 작은 몸짓이었다. 따라서 목요기도회는 단순히 구속자들의 석방을 위한 기도회만도 아니었다. 구속된 분들의 투쟁대열에 동참하고자 하는 성직자들의 의지가 담긴 기도의 행진이었다. 수많은 구속자들은 감옥 안에서 기도하고, 우리는 밖에서 그 분들의 투쟁대열에 함께 한다는 결의를 다지는 기도회였다. 그래서 우리는 목요기도회의 공식 명칭을 ‘구속된 동지들과 함께 드리는 정의, 자유구현 목요정기기도회’ 라 정하고, 이 명칭을 현수막으로 제작하여 뒷벽에 걸고 매주 목요일 기도회를 가졌다. 애석하게도 그 현수막은 지금은 실종상태다. 1975년 4월에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압수해 가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사진으로는 어디엔가 남아있을 것이다.

목요기도회는 진지하고 경건했다. 시대의 아픔이 깊고 컸기에 절실한 기도가 드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1974년 8월 15일은 목요일이었다. 내가 아직까지도 그 날이 목요일임을 기억하는 까닭이 있다. 우리가 기도회를 진행하고 있는 중에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8·15 기념행사장에서 총격에 의해 육영수 여사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회를 거듭할수록 목요기도회의 열기는 뜨거워졌고, 참여하는 사람들도 불어났다. 마치 예수께서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신 말씀과 같았다. 마태복음 13장 31-32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다. “하늘나라는 마치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뿌렸다. 겨자씨는 모든 씨 가운데 가장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푸성귀보다 더 커져서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된다.” 목요기도회는 점점 더 큰 나무로 자라났다.

우선 구속된 학생들의 부모님들이 기도회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북의 지령을 받고 활동했다”는 정부의 일방적 발표에 의해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이른바 ‘인혁당’ 가족들도 기도회에 나와 처절한 억울함을 호소하기에 이른다. 또 박정희 유신독재의 서슬 퍼런 위협에 짓눌려 숨죽여 지내던 의식 있는 민주시민들이 차츰 목요기도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처음 목요기도회 장소였던 소회의실은 포화 상태가 되어 몰려오는 사람들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마침내 기도회 장소를 기독교회관 2층 대강당으로 옮겼다.

목요기도회의 열기는 마치 용광로와 같았다. 기도회 참석자들의 마음은 모두가 하나로 뜨겁게 어우러졌다. 고난당하는 가족들의 호소에 다 같이 공감하고, 그들이 겪는 억울함과 아픔을 공유하며, 같이 울고 웃었다.

구속학생들의 어머니들은 목요기도회에 참석함으로써 위로를 얻을 뿐만 아니라 생각에 변화가 발생했다. 애지중지 기르고 가르쳐서 입신양명을 기대했던 자식들이 구속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감과 함께 자식들이 못내 원망스러웠고, 이웃이 부끄러웠던 부모님들이었다. 그런데 목요기도회에 나오고서부터 차츰 변화가 일어나 원망스러웠던 자식들이 이제는 도리어 자랑스러웠고, 이웃이나 사람들 앞에서 위축되었던 마음과 행동에 기가 살아나 떳떳하고 당당해졌다.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어머니들의 가슴보다 더 뜨거운 가슴이 어디 있겠는가? 목요기도회의 열기는 어머니들의 그 뜨거운 가슴과 더불어 활화산처럼 솟아올랐다. 드디어 가족들이 조직화되었다. ‘구속자가족협의회’가 생겨난 것이다. 회장은 공덕귀(윤보선 전 대통령의 영부인) 여사가, 부회장은 김윤식(김학민 씨의 아버지) 전 의원이, 총무는 김한림 여사가 맡았다. 오늘날 민가협의 모체가 구속자가족협의회였고, 그 모임의 산실은 다름 아닌 목요기도회였던 것이다.

가족들과 더불어 목요기도회가 활성화되는 데 크게 기여한 분들이 있다. 그 일등 공신이 당시 동아일보 서권석 기자를 주축으로 한 신문기자들이었다. 목요일마다 기자들이 기도회에 참석했고, 비록 1단이긴 하지만 목요기도회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기에 이르렀다. 당시만 해도 동아일보의 영향력은 막강했고, 목요기도회의 열기를 확산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서권석 기자는 목요기도회의 진지함과 열기에 매료되어 그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그는 동아투위 동지로서 지금 미국 뉴저지에 살고 있으며 충실한 교회 제직으로 봉직하고 있다.

‘인혁당 사건’은 조작이라고 폭로하다

1974년 10월 24일에 마침내 동아일보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기에 이르고, 그 후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탄압이 시작되었으며, 언론역사상 전무후무 한 전 국민들의 격려광고가 쇄도했다. 이런 언론투쟁에 따른 기자들의 고발현장도 바로 목요기도회였음은 기억해 둘만한 일이다.

가톨릭의 신부님들도 목요기도회에 동참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소속된 신부님들이었다. 함세웅·문정현·양홍·안충석·김택암 신부 등을 아직도 기억할 수 있다. 특히 문정현 신부님은 매주 목요일마다 전주에서 오전 10시까지 꼭꼭 참석하시는 목요기도회 극성파 회원이었다.

당시 가톨릭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주관하는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미사가 명동성당에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로 개최되었다. 이 미사는 매머드 집회였다. 그 무렵 가톨릭의 인권미사와 개신교의 목요기도회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는데, 신부님들이 목요기도회에 참석하고, 개신교 목사들이 또한 인권미사에 참석하여 신·구교가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연대했다.

목요기도회를 말하면서 조지 오글 목사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오글 목사는 목요기도회에 매주 참석한 것은 물론이고 목요기도회로 하여금 새로운 기도 제목을 더하도록 만들었다. 즉,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섣불리 거론하기를 주저하고 있던 인혁당 문제를 끌고 들어온 것이다. 당시 목요기도회의 진행과정은 매우 자유스러웠고 생동감이 넘쳤다. 미리 짜인 순서에 따라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현장의 소리를 듣고 거기서 기도의 소재를 받아서 기도하곤 했다. 누구나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고발하고 호소할 수 있었다. 목요기도회를 시작하고 달 반이나 두 달쯤 지났을 때라고 기억되는데 웬 낯선 부인들이 기도회에 참석했다. 인혁당 가족들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목요기도회가 인혁당 문제를 기도 제목으로 삼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인혁당 관계자들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글 목사가 끈질기게 인혁당 사건은 조작된 사건이라고 주장하면서, 가장 억울한 사람들이니 당연히 돌보아야 한다고 했다. 한 번은 서남동 목사님께서 나를 따로 불러 “적을 치려면 적의 가장 큰 약점을 공격해야 하는 법인데 인혁당 사건이야말로 박정희 정권에게는 가장 큰 약점”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조작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마침내 인혁당 사건이 조작된 사건이라는 것을 목요기도회에서 폭로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이 일로 인해 오글 목사가 추방당하는 극단의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가 되면 종로5가 기독교회관 대강당에서는 어김없이 하늘에 사무치는 기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고, 또 부정기적이지만 명동성당에서는 정의구현사제단이 개최하는 인권미사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민주회복과 인권회복을 부르짖는 국민들의 뜨거운 염원을 안은 채 1974년이 저물고 1975년으로 해가 바뀌었다. 1975년 2월 15일, 이른바 ‘2·15조치’로 인혁당 관계자들을 제외한 250여명의 시국 관련 구속자들이 전원 석방되기에 이른다. 독하기로 소문난 박정희였지만 민주회복과 인권회복을 부르짖는 백성들의 거센 압력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2·15조치를 이끌어내는 데 종로5가 기독교회관의 목요기도회와 명동성당의 인권미사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목요기도회는 축제가 되었다. 자식을 감옥에 두고 한 끼도 편한 밥을 먹지 못하고, 하루도 편한 잠을 잘 수 없었던 어버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석방자들을 맞는 모두의 가슴은 승리감으로 부풀었다.

2·15조치로 그때 석방된 사람들의 면면을 오늘에 와서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국민들을 대표하여 국정을 논하는 어엿한 선량이 된 분들이 많다. 특히 이철 전 의원이나 유인태 의원 등은 당시 사형선고도 받았던 분들이다.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이 감옥살이를 한 기간은 1974년 4월에서 1975년 2월이니까 약 10여 개월이다. 사형을 선고할 만큼 중한 죄인을 고작 10개월 만에 석방하다니 시세말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실은 당시의 인권유린 사태가 얼마나 심각했나를 반증하고 있다고 하겠다. 죄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감옥에 가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15조치로 말미암은 흥분된 분위기도 잠시 잠깐이었다. 유신독재권력의 탄압의 손길은 한층 더 교활하고 집요했다. 들불처럼 타오르는 국민들의 격려광고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의 악덕사주와 경영진은 독재권력과 결탁하여 자유언론 실천투쟁을 말살하기 위한 수순에 들어갔고, 마침내 1975년 3월 17일 새벽, 농성 중이던 동아투위 동지들은 폭도들에 의해 거리로 쫓겨났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 일들을 돌이켜보면 마치 파노라마처럼 생생하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열화같이 일어난 격려광고는 실로 장관이었다. 내가 섬기던 한빛교회는 비록 작은 교회였지만 교우들이 열성적으로 격려광고에 동참했다.

동아투위 동지들이 거리로 내쫓기기 전 농성 중일 때, 목요기도회에서 즉석 헌금을 거두어 광화문 동아일보 사옥을 찾아갔으나 경찰들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우리는 바깥에서, 동지들은 본관의 창문 또는 본관과 이어진 별관 옥상에서 손을 흔들며 함께 구호를 외쳐 화답했다. 우리는 가져간 헌금을 비닐봉지에 담아 던져주었다. 고 조민기 동지의 장모인 안인숙 권사를 비롯한 한빛교회 여신도회원들이 정성스레 김밥을 말아 라면상자에 담아서 용달차에 싣고 가 농성하는 동지들에게 들여보내기도 했다. 동아일보 악덕사주에게 고용된 폭도들에 의해 3월 17일 새벽 동지들이 거리로 내쫓겼을 때 안타까움과 분노로 발을 동동 구르며 광화문 주변을 서성이던 일, 쫓겨난 동지들 가운데 일부가 오랜 단식농성으로 기진맥진하여 당시 혜화동 로터리에 있던 우석대병원 응급실로 실려 가고, 나머지는 종로5가 기독교회관으로 집결했던 때 박영숙 선생(고 안병무 박사 부인, 지금 심각한 암 투병 중임)과 내 아내 이종옥 둘이서 녹두죽과 흰 죽을 쑤어서 큰 들통에 담아 용달차에 싣고 우석대 병원과 종로5가 기독교회관을 오가던 일 등등, 38년 전의 일이지만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선교 자유 수호’에서 ‘살인정권 타도로’

박정희 정권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노골적으로 탄압을 시작했다. 한국교회의 정의와 자유, 인권선교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정면으로 비수를 들이댄 것이다. 이른바 ‘수도권 선교비 횡령’이라는 날조된 사건이 일어났다. 독일의 BFW(Brod fur Welt)가 한국의 NCC를 통해 수도권선교위원회에 보낸 선교비를 횡령했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앞에서 말한 대로 1974년 연초에 젊은 교역자들이 유신반대선언을 함으로써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대거 구속되었는 바, 거기에는 수도권선교위원회에 소속된 일꾼들이 거의 포함되어 있었다. BFW가 보낸 선교비의 일부를 그들의 변호사비용 및 가족들의 생계비로 지불했는데 그것이 선교비 횡령이라는 것이었다. 후일 독일 BFW의 책임자가 직접 내한하여 재판과정에서, 선교비 목적에 합당하게 사용되었다고 증언을 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 일로 인해 1975년 4월 3일 NCC 총무 김관석 목사님이 연행되어 끝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목요기도회의 활성화는 물론 인권 신장을 위한 적극적인 선교활동에서 김 목사님의 존재는 매우 큰 것이었다. 그래서 김 목사님 구속은 교회의 선교자유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요 노골적인 탄압이었다.

김관석 목사님이 연행된 1975년 4월 3일은 목요일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 목요일인 4월 10일의 기도회 제목을 ‘선교자유 수호’로 정했다. 때마침 그때 영국의 BBC방송이 한국의 인권상황을 취재하기 위해 내한했던 바, 4월 10일의 목요기도회 현장을 녹화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목요기도회의 주제를 바꿔야만 할 엄중한 사태가 벌어졌다. 4월 8일 대법원이 인혁당 관련자들에 대한 판결에서 원심을 확정하자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이 판결 후 채 24시간도 되기 전인 9일 새벽에 전격적으로 여덟 사람에 대해 사형을 집행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우리들의 가슴은 분노로 차올랐고, 하룻밤 사이에 목요기도회의 이슈가 선교자유 수호에서 살인정권 타도로 바뀌어버렸던 것이다.

드디어 4월 10일, 목요기도회장은 “살인정권 물러가라”는 함성으로 뒤덮였다. 인혁당 가족들의 피맺힌 절규는 기도회장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이런 관경을 영국의 BBC가 녹화하여 방영함으로써 한국 인권탄압의 심각성이 온 세계에 생생하게 알려졌다.

지금도 나는 그때 그 목요기도회의 광경을 내 기억에서 지워버릴 수가 없다. 그날 설교는 문동환 박사님이 했고, 나는 기도회 사회를 봤다. 성명서는 김상근 목사가 작성했다. 기도회 중에 사형 당한 사람들의 가족에게서 전갈이 왔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님들과 목요기도회의 목사님들이 오시기 전에는 서대문구치소에서 시체를 인수해가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우리는 즉석에서 사형 당한 사람들의 유족을 위해 헌금을 했다. 정확한 액수는 기억되지 않지만 상당히 많은 헌금이 들어왔다.

기도회를 마치고 많은 사람들이 서울구치소로 몰려갔다. 그러나 거기에는 시신이 없었다. 이미 강제로 어딘가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전해주는 말에 의하면 어느 한 분의 시신은 유족의 끈질긴 요청에 의해 응암동성당으로 갔다고 한다. 당시 응암동성당 주임신부는 함세웅 신부였다.

우리는 응암동성당으로 가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가던 도중에 응암동 로터리에서 앰뷸런스를 놓고 경찰과 시민들이 대치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차에서 내려 가 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송상진 씨의 시신을 실은 차였다. 유족은 응암동성당으로 가겠다고 하고, 경찰들은 못 간다고 하며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마지막 작별인 장례절차마저도 유족의 의사에 따라 치러질 수 없는 비정하고 안타까운 사태가 빚어졌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의 죽음 앞에서만은 누구나 숙연해지는 법이요, 죽은 자에 대해서만은 관대한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를 자유마저도 철저히 봉쇄당했다.

밀고 당기는 몸싸움은 처절했다. 내 아내 이종옥이 껌을 씹어 문정현 신부에게 주어서 시신을 실은 앰뷸런스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자동차 열쇠 구멍에 넣음으로써 시동을 걸 수 없도록 만드는가 하면, 차 배기통에 신문지를 말아 넣기도 했으며, 차바퀴 밑으로 몸을 던져 누어버리기도 했다. 마침내 경찰은 대형 크레인차를 가지고 와 앰뷸런스를 달랑 들어서 시신을 탈취해 벽제화장터로 직행하여 화장해 버렸다. 그 과정에서 문정현 신부는 차바퀴에 치어 치어 지금도 다리를 저는 불구가 되었다. 폭력화한 거대한 국가권력에 맞선 맨몸의 저항은 실로 중과부적이었다.

4월 10일의 치열했던 목요기도회를 계기로 정부당국은 목요기도회를 없애기 위한 본격적인 작전에 착수했다. 다음날인 4월 11일 저녁때 문동환 목사, 김상근 목사 그리고 나는 당시악명 높던 중앙정보부 제6국으로 연행되었다. 양심수 가족들 가운데 조정하 여사(박형규 목사 부인), 임인영 씨(인혁당의 무기수였던 전창일 씨 부인) 등도 연행 당했다. 우리의 혐의는 공산주의자의 죽음을 미화함으로써 ‘공산당 고무 찬양 죄’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것은 아니기에 ‘자생적 공산주의자’라는 신조어를 붙여 몰아세웠다.

내가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조사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몹시 불안하고 초조했다. 아무리 태연하려고 마음을 다져먹어도 입에 침이 마르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답답했다. 목요기도회에 관한 내용들을, 특히 4월 10일의 목요기도회에 대한 전말을 수없이 되풀이해서 쓰는 자술서의 글씨가 비틀거렸다. 그렇게 며칠 밤낮을 시달렸다. 수염은 길고 얼굴은 꺼칠해져서 내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밤이었는지 낮이었는지는 기억되지 않지만 수사관이 나를 다른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 방은 다름 아니라 김상근 목사가 조사 받고 있던 곳이었다. 수사관들은 나더러 김상근 목사와 의논해보라며 우리 두 사람만 남겨 두고 나가버렸다. 내용인즉, 다음 목요기도회는 사정상 개최하지 않는다는 광고를 신문에 내달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우리를 연행해 간 목적은 구속이 아니라 어떻게든 목요기도회를 중단시키자는 것인 모양이었다. 눈치 빠른 김상근 목사는 그들의 의도를 잽싸게 간파했고, 그들이 광고를 제안하자 나와 의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우리는 두 사람의 의사만으로는 결정할 수 없으니 밖에 있는 동지들과 의논하겠다고 말했다. 마침내 우리는 안국동 해위 윤보선 전 대통령 댁에 어른들을 모시도록 하고 중앙정보부 차로 그곳에 갔다. 어른들은 여러 날 만에 만난 우리들을 반겨주셨고, 초췌해진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 하셨다. 그분들은 진지하게 의논을 한 뒤 어떻게든 나와 김상근 목사를 비롯한 연행된 이들이 나와야 하니 그들의 요구대로 신문광고를 내도록 하자는 데 뜻을 모아주셨다.

이튿날 아침 더욱 희한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당시는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탄압으로 인해 국민들의 격려광고가 한창이던 때임과 동시에, 회사에서 쫓겨난 동아투위 동지들이 매일 아침 출근시간이면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에 도열해 있던 때였다. 그런데 그 낯익은 동지들이 도열해 있는 곳에 김상근 목사와 내가 중앙정보부 차를 타고 와서 광고를 내려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것도 “이번 주는 사정상 목요기도회가 모이지 않습니다” 라는 광고를 그 뜨거운 격려광고 틈새에 싣기 위해 들어가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얼마나 낯 뜨거운 일인가! 지금 같았으면 필경 비겁하다고, 타협했다고, 배신자라고 비난하고 매도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아무도 우리를 비난하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겨주었다. 38년 전, 1970년대 중반, 민주회복과 인권운동에 헌신했던 동지들 사이에는 이처럼 깊은 신뢰와 뜨거운 애정, 그리고 지극히 인간적인 여유와 낭만이 있었다.

안종필 위원장의 죽음은 ‘병사’ 아닌 ‘타살’

“1975년 4월 17일의 목요기도회는 사정상 모이지 않는다”는 광고가 치열했던 시민들의 격려광고 틈새에 끼어 동아일보에 게재되었고, 그 후 우리는 풀려났으며, 그로 인해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의 목요기도회는 마침내 몸살을 앓게 되었다. 기독교회관측에서도 목요기도회 장소로 강당을 대여하기를 거부했다. 당국의 압력 때문이라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그 후 몇 번인가 회관 로비나 인권위원회의 비좁은 사무실에서 모이기도 하다가 마침내 구속자 가족들의 집을 돌아가며 기도회를 열었다. 목요기도회의 유랑 시기라 이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 한 주도 목요기도회를 거르는 일은 없었다. 어디에선가 기도회는 계속되었고,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의 숨결은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났다.

1976년 3월에 ‘3·1 민주구국선언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내가 시무하던 한빛교회당에서 오후에 모이던 갈릴리교회 핵심인사들인 문익환·문동환·서남동 목사님과 안병무·이문영 박사가 구속되었고(이우정 선생 등은 불구속), 나도 말미에 묻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목요기도회는 한빛교회 담임목사인 나를 감옥에 담보해 놓고 마침내 한빛교회당으로 입성하게 되었다. 그 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는 10·26사건이 터질 때까지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면 어김없이 한빛교회당에서 ‘구속된 동지들과 함께 드리는 정의. 자유구현 정기목요기도회’가 열려 하느님께 뜨거운 기도가 바쳐졌다.

가장 절친한 친구요 심복이었던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살당하는 10·26사태와 더불어 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포고령에 의해 모든 집회가 금지됨으로써 마침내 목요기도회는 강제로 그 운명을 끝내게 되었다. 물론 그 후에도 한빛교회 교육관 등에서 목요일이면 소수이긴 하지만 기도의 행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격렬했던 불길이 지나간 다음 채 꺼지지 않은 불씨에서 이는 연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더욱이 10·26사태가 빚어지자 이제 박정희 유신독재는 끝나고 민주회복도, 인권회복도 곧 이루어지리라는 기대 속에서 사람들에게 기도의 필요성은 전처럼 절실하고 절박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큰 아쉬움을 남기고 일찍 돌아가신 고 죽재 서남동 목사님께서는 목요기도회가 활화산처럼 폭발적인 열기를 뿜어내고 있을 당시 목요기도회를 일컬어 ‘제3의 교회’라 명명하신 적이 있다.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전의 초대교회가 제1의 교회요, 정치권력과 결탁한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의 교회를 제2의 교회라고 할 수 있고, 콘스탄티누스 시대를 넘어 선 새 시대의 교회를 제3의 교회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목요기도회는 바로 그 제3의 교회의 성격과 모습이라고 여기신 것이다.

목요기도회의 분위기는 매우 독특하고 신비스런 것이었다. 거기에서는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유식한 자나 무식한 자의 간격이 전혀 의식되지 않고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기독교 신자냐, 비신자냐 하는 구별도 전혀 없었다. 아픔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가깝게 느껴지고 다정해졌다. 신자, 비신자를 막론하고 목이 터져라 찬송을 합창했고, 하느님의 말씀 앞에 ‘아멘’으로 응답했으며, 하늘에 사무치는 절실한 기도를 드렸다. 진한 아픔으로 함께 울기도 하고, 그 아픔을 뚫고 치솟는 기쁨으로 얼싸안고 춤을 추었다. 목요기도회는 분명 성령에 취한(새 술에 취한) 사람들의 기도의 축제였다. 목요기도회는 동아투위 동지들과도 뜨겁게 어우러져 함께 아픔을 나누고, 투지를 다지며 희망을 공유하는 소중한 자리였다.

나는 이 글 맨 앞에서 내가 동아투위 동지들과 밀접해질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사적 인연과 공적 동기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실로 나는 운명적으로 동아투위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고 할 수 있다. 조민기 동지와 홍정선 내외는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본시 한빛가족이었고, 동아투위가 결성된 이후 1975년 후반에 박종만 동지와 윤수경 내외가 멀리 화곡동에서 미아동까지 찾아와 한빛가족이 되었으며,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1976년 한 해 동안 내가 옥고를 치르고 나온 이듬해인 1977년 5월에는 당시 동아투위 2대 위원장으로 투쟁하던 안종필 위원장 내외분이 등록을 하고 한빛가족에 합세했다. 이렇듯 나는 동아투위와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얽혀 살았다.

동아투위 동지들의 자유언론 실천 의지와 투쟁 열기는 굳고 뜨거워서, 온갖 방해와 탄압을 무릅쓰면서도 보도되지 못한 사건들을 유인물로 만들어 세상에 알리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1978년 ‘10·24 민주인권일지 사건’으로 열 분의 동아투위 동지들이 구속기소 되기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두 분이 한빛교회 가족이었다. 고 안종필 위원장과 박종만 동지다. 다른 일곱 분은 윤활식·장윤환·안성열·성유보·이기중·김종철·정연주 동지였다. 그분들은 모두가 1년 안팎의 감옥살이를 해야만 했고, 독재자 박정희가 김재규에 의해 살해된 1979년 10·26사건 이후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안종필 위원장이 열악한 옥중생활 중에 병을 얻게 된 것이었다. 1979년 12월 4일 성동구치소에서 석방된 후 이내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청천벽력과도 같이 간암이라는 것이었다. 본인과 가족은 물론이고 동아투위 동지들의 놀람 또한 말로 다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나도 정말이지 기가 막힌 아픔을 느꼈다.

안종필 위원장은 훌륭한 인품을 지닌 분으로 품성이 온화하고 말수가 적으셨다. 마음과 생각이 곧아, 옳고 바른 일을 위해서는 결코 굽힘이나 꺾임이 없는 전형적인 선비였다. 겉은 부드럽고 속은 단단한 자유언론실천투쟁의 투사요 훌륭한 리더였다. 온전한 자유언론 실현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은 때였고, 아직 한창 왕성하게 일할 연령이었다.

안 위원장의 처절한 투병이 시작되었다. 동아투위 동지들을 비롯한 수많은 민주인사들이 그분의 쾌유를 빌었다. 나와 한빛가족들도 합심하여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 1979년 12월 23일자 한빛교회 주보 교우소식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안종필 선생께서 원자력병원 301호실에 입원하셨습니다. 쾌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가 모자라서였을까, 아니면 하느님이 무심해서였을까? 1980년 2월 29일(그해는 윤년이었음. 평년이었으면 3월 1일 즉, 3·1절이었을 것임), 수많은 동지들과 민주시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뒤로하고 안종필 위원장은 끝내 영면했다. 내 가슴이 그토록 쓰리고 아팠는데 유족과 동아투위 동지들의 아픔이야 오죽했으랴.

안 위원장의 장례는 5일장으로 3월 4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거행되었다. 영결식은 유족과 동아투위 동지들의 억장이 무너지는 오열과 수많은 민주시민들의 애도 속에 엄숙히 치러졌다. 나는 그 장례를 집례하면서 안 위원장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고 안종필 위원장의 죽음은 ‘병사’가 아니라 ‘타살’이고, ‘자연사’가 아니라 ‘순직(자유언론 실현을 위한)’입니다.” 이 말 때문에 내가 많은 시달림을 당한 일도 있었다.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가 일으킨 1980년 5월 17일의 군사쿠데타로 말미암아 나는 그날 한밤중에 남산에 있던 중앙정보부로 강제연행되어 두 달 동안 모진 고문과 고초를 겪고 구속 기소되어 군사재판에서 4년형을 받고 두 번째 감옥살이를 했다. 그때 즉, 중앙정보부 지하 2층에서 혹독한 조사를 받을 때 그들은 나에 관한 파일들을 하나하나 들추어 보면서 평소 나의 언행에 대해 꼬치꼬치 추궁하는 가운데, 고 안종필 위원장의 장례 때 ‘병사가 아니라 타살이고, 자연사가 아니라 순직’이라고 한 말을 잡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타살’이라고 했는데 누가 죽였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고 안종필 위원장의 죽음의 성격과 내용에 대한 나의 이 판단은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진실이라고 확신한다.

동아투위 동지들, 내게는 매우 소중한 분들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만나면 늘 반갑고 즐거운 벗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사적인 이해관계로만 얽혀 사는 삭막한 세상에서 사익이 아닌 공익을 위해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만난다는 것은 우리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고 아름답고 즐겁게 해주는 일이 아닐 수 없다. 40년 가까이 동아투위 동지들과 같은 뜻을 품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아왔다는 사실은 나의 삶에 있어서 큰 보람이요 축복이다.

동아투위 동지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평생 벗들이다. 아직도 진행 중인 자유언론 실천 투쟁 대열에 나도 함께하려고 언제나 노력하고 있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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