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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습기자의 ‘교활’한 특종 보도[내 인생의 취재기] 중앙정보부가 폐쇄시킨 야학…편집국장 남산에 끌려가
〈박래부 전 한국일보 기자(현 자유언론실천재단 이사)〉
  • 관리자
  • 승인 2017.03.1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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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백여 근로자 향학열에 찬물’
-‘서울시교위 구로공단 7개 야학시설 폐쇄’…‘무인가 사설강습소로 몰아’

벌써 40년이 다 돼가는, 1979년 5월 23일자 한국일보 사회면 톱으로 나간 기사의 제목이다.
“박래부가 견습 기자의 생명을 걸고 넘기는 기삽니다”
이 기사를 하장춘 시경 캡에게 넘길 때, 웃음과 과장으로 말의 무게를 애써 감추면서 말했다. 곁에 앉았던 노기창 선배가 “무슨 기산데 그렇게 비장하냐?”고 역시 웃으며 바라보았다.
“야학에 관한 기삽니다.”
부장과 캡에게 죄송한 얘기지만, 나는 이 기사가 혹시 못 나갈 경우에 대비해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리고 그런 어법으로 못 박듯이 말했던 것이다. 기사는 다시 김해도 (사회)부장에게 넘어갔다. 기사의 전문은 이렇다.

구로공단 주변 공단 근로자들의 배움터가 사라졌다. 상록수 그늘 아래서 배움의 갈증을 달래던 근로 청소년들은 배움터를 잃었고 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던 대학생 야학 교사들은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길을 잃었다.
이것은 서울시 교육위원회가 지난 4일 공단 주변의 백합성경구락부, 수산나회의 자매복지원, 새 얼의 집, 유네스코야학, YWCA야학, 구로제일야학, 한민교회야학 등 7개 야학을 비인가 사설 강습소란 이유로 폐쇄했기 때문이다.
7개 야학은 고향을 떠나 스스로 벌어서 공부하려는 근로 청소년들의 꿈의 요람이었다. 이들은 못 다 한 배움의 소망을 이곳에서 찾고 보람을 가져왔다.
그토록 소중했던 배움터를 갑자기 잃어버린 7백여 근로 청소년들은 겨우 1백명만 공단본부의 공단새마음직업청소년학원과 남서울 직업청소년학교에 수용됐을 뿐 나머지 6백명은 배움을 중단해야 했다.
학생 수가 3백명이나 되던 백합성경구락부는 임시 조치로 서울시교위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경기도 시흥군 서면 철산리로 이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나머지 6개 학원은 가르치고 배운다는 열성으로 이어온 인고의 역사에 종말을 고했다.
지난달 28일 경기 시흥군 서면 철산리 466 전 OK목장으로 이사 간 백합성경구락부도 20일 만에 학생 수가 반으로 줄었다. 전에 자리 잡았던 가리봉 시장보다 교통이 나빠 시간이 맞지 않는 데다 교통비가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학교가 이사를 간 첫날 조광림양(20)과 이복자양(20)은 수업을 마친 후 너무 늦어 집엘 못가고 가리봉동의 친구 자취방에서 잤다.
목공실을 개조한 교사도 허름하기만 하다. 그나마 3개 반은 목공실을 합판으로 칸막이 해 쓰고 있으나 나머지 2개 반은 목공실 밖으로 이어 판자로 벽을 하고 비닐천막을 덮은 교실에서 공부한다. 이런 불편 때문에 배우던 과정을 마저 마치려고 바라왔던 학생들도 많이 떨어져 나갔다.
이처럼 야학이 수난을 당하는데 대해 2년간 이 학생들을 가르쳐 온 주영진군(중앙대 법과 3년)은 “이 학생들은 수출 산업의 진정한 공로자들이다. 이들에게 좀 더 나은 교육의 기회를 준다 해도 결코 과분한 것이 아니다. 당국에서 실시하는 야간 특별 학급의 혜택도 충분치 못하다.”고 지금의 실정을 한스러워 했다.
실제로 근로 청소년들에 의하면 영등포여상 등에 위탁교육 시키는 당국의 산업체 야간 특별학급이나 공단본부의 복지관에 입학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입학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 나이가 많아 학교 때 배운 것을 많이 잊었고 대개의 회사는 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좋아하지 않는다.
이들이 일단 입학을 하면 회사는 하오 5시면 학교에 가도록 배려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잔업을 시키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1시간 일을 덜 시키는 결과가 된다. 그 실례로 모 회사에 다니던 이숙자양(18)과 이승주양(21)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하오 6시에 퇴근하는데도 잔업을 안 한다는 이유로 회사 측이 “야학엘 다니겠느냐, 회사를 그만두겠느냐”고 다그쳐 지난 3월 초에 야학을 계속하기 위해 회사를 나왔다.
이제까지 같은 조건 때문에 타 회사에도 취업을 못하고 보증금 10만원에 월세 3만원으로 다른 친구 1명과 함께 그간 모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축내고 있는 실정이다.
당국이 실시하는 교육 기관에만 근로 청소년을 취학시키기에는 취학 수용 능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렇다고 이들의 4만원 안팎의 봉급으로 사설학원에 다닌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구로공단 내의 근로 청소년은 약 7만명인데 이 중 중졸 이하의 학력이 과반수가 넘는다.
그러나 야간 특별학급이나 복지관의 수용 능력은 이의 10분의 1도 안 되며 복지관은 중학과정 뿐이다. 고교과정은 더욱 배우기 어렵다.
서울시교위는 이들 야학을 사설강습소로 취급했지만 이 야학들은 새들어 있는 건물 임대료를 내기 위한 최소한의 경비를 학생들에게 부담시켰고 대부분 교회 건물을 빌어서 하는 등 오히려 대학생 본인들의 용돈을 털어가며 유지해 왔다. 〈박래부 기자〉


넘긴 지 며칠이 지나도록 기사는 나가지 않았다. 안양의 야학 후배들도 기사를 학수고대하고 있을 텐데, 나는 초조해졌다.
어느 날 아침 출입하던 서대문 경찰서 형사과에 들르니, 〈조선일보〉 이원섭 선배가 “박래부씨 오늘 좋은 기사 썼데”라고 칭찬해 주었다. 당시는 조간신문이 우리와 〈조선일보〉뿐이어서 기자들끼리 날카롭게 경쟁도 했지만, 평소에는 그 이상으로 친하게 지냈다. 경쟁지 기자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도 각별한 맛이 있었다.
급히 형사계장실로 가 우리 신문을 펴 보았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번듯하게, 검은 컷의 제목과 함께 사회면 톱을 장식하고 있었다. 내가 기사를 보지 못한 것은 기사가 전국적으로 미칠 공원모집 등에 관한 부정적인 효과 등의 파장을 감안, 서울 시내판에만 실었는데 나는 안양에서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시내판을 읽지 못한 것이었다.
조금 뒤 시경 캡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학 기사 팩트는 다 맞나?”
“숫자에서 약간의 오차는 있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다 맞는 기삽니다.”
“그 기사 때문에 (권혁승 편집)국장이 남산(중앙정보부)에 끌려갔다. 너도 오늘은 멀리 취재하러 가지 말고 서대문(경찰서)에만 있어라.”
너도 연행돼 갈 수 있으니, 붙잡아 가기 편한 곳에서 대기하란 말이었다.
새삼 죄송한 마음도 솟았다. 나는 데스크를 속인 것이었다. 야학을 폐쇄한 것은 형식적으로는 서울시교위였지만, 사실상 중앙정보부가 모두 지휘한 것이었다. 중앙정보부는 공단 내의 여러 야학이 불온한 대학생들에 의해 남녀 공원들이 의식화하는 곳이라고 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기사에도 이 부분을 쓰지 않았고 캡이나 부장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만약 중앙정보부 얘기를 조금이라도 비친다면, 기사가 아예 햇빛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의 ‘교활’이 그 분들에게 송구했지만 다른 방법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물론 그 분들도 중앙정보부가 개입된 사건이라는 점을 바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보통 기사는 시경 캡과 차장, 부장 등 최소 3명의 손을 거치게 돼 있었다. 그런데 이 기사는, 더구나 견습기자가 쓴 이 기사는, 한 줄도 데스크 작업을 거치지 않은 것이다. 문제가 생길 것이 예상돼 누구도 손을 댐으로써 연루되고 싶지 않았던 셈이다. 농담을 좀 하자면 견습기자가 쓴 오리지널 기사 치고는, 지금 읽어도 괜찮게 정리된 글 같다^^

나는 하루 종일 서대문 경찰서에서, 남산에 끌려가 혼날 일에 대한 각오를 다지며, 빈둥댔다. 저녁 무렵 국장이 무사히 회사로 돌아왔다는 전갈을 받았고 나도 자유로워졌다. 타협이 이뤄졌다고 한다. 한 선배가 두 개 학교에 설치된 산업체 야간 특별학급이 얼마나 근로청소년에게 많은 도움을 주면서 잘 운영되고 있는가 하는 홍보용 기사를 써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맙고 신기한 것은 편집국장이 정보기관에 연행돼 갔는데도 다음날에는 ‘향학에의 가냘픈 촛불-불우 근로 청소년의 야학 길 넓혀주자’라는 사설이 실렸다. 참 잘 되고 존경스런 일이었다.

그 얼마 전 후배 이종태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 전화가 이 기사를 취재하게 만들었다.
“형, 중앙정보부가 서울시교위의 이름으로 구로공단의 모든 야학을 문 닫게 했어요. 우리 백합(성경구락부)만 공단 건너편 철산리로 이사 가서 계속하는데, 학생이 반쯤 떨어져 나갔어요.”
백합은 내가 안양 후배 몇 명과 참여하던 야학이었다. 신문사에 들어오면서 시간을 낼 수 없어 못 나가고 있었다. 그날 당장 가리봉동에서 후배들을 만나 취재를 시작했다. 민감하고 위험할 수 있는 기사이니 만큼 각 야학의 상태를 정확히 확인하는 일이 중요했다. 가리봉동은 내 취재구역도 아니어서 퇴근 후의 시간을 내며 1주일 정도 걸려 기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
내가 직접 관련된 야학문제가 기사 거리가 된 현실이 가슴 아팠다. 한편으로는 내가 기자가 되었기 때문에 고발할 수 있었구나 하는 씁쓸한 생각도 들었다.
동료가 전해준 말에 따르면, 이 기사가 나가고 담당인 영등포 경찰서 기자실은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고 한다. ‘이 특종기사를 받아서 기사를 써야할 것이냐, 말 것이냐.’ ‘그런데 이 기사 때문에 〈한국일보〉 편집국장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갔다고 한다.’ 결국 다른 모든 언론이 이 문제에 침묵하고 말았다.
나와 후배들이 열정을 가지고 참여했던 백합구락부도 2년 정도 간신히 더 유지되다가 문을 닫음으로써, 구로공단의 야학시대는 모두 끝나고 말았다.
정보기관의 국민에 대한 사상통제는 당시에 이미 어둡고 짙게 드리워졌음을 말해주는 우울하고 두려운 기억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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