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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그라운드를 빼앗긴 자의 슬픔[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21)] 이태호 전 동아방송 사회문화부 기자
  • 관리자
  • 승인 2017.03.1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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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70년 가을에 25살의 나이로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1년 동안 수습기자 생활을 마치고 방송뉴스부로 배치돼 경찰서만 5년 가까이 출입한 사건기자로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활동했다. 동아일보사 기자로 활동했던 이 시기를 나는 내 생애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으로 간직하고 있다.

중고등학생 시절 모교에 있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 적힌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명제를 가슴에 새기고 자랐으며 서울로 올라와 역사학과에서 공부하며 기록의 중요성을 절감한 나는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자마자 사회정의와 자유언론의 실현을 위해 일선 취재 현장에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뛴 바 있다

다른 회사 기자들이 자기 집에서 편하게 발을 뻗고 자던 시각에 나는 경찰서 기자실에서 잔 적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심야에 경찰서의 무전실과 수사과에 드나들면서 기사거리를 챙겼다. 서울시내의 각 경찰서로 출입처가 바뀔 때마다 나는 하숙방이나 자취방을 그 경찰서 부근으로 옮겼다. 그리고 유력한 취재원을 다수 확보했다. 그래서 나는 특종기사를 많이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사건기자로서 전성기에 도달할 무렵인 1975년 3월 17일 30살의 나이로 권력의 강압에 의해 동아일보사로부터 축출되면서 실업자가 되고 경찰과 정보부의 사찰까지 받으면서 창살 없는 감옥으로 쳐넣어진 느낌이 들었다.

우리 집안은 가난했다. 중고등학교 학생 때부터 점심을 굶고 공부할 정도로 가난했던 우리 집안은 내가 동아일보사 기자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어머님이 행상을 하면서 근근이 연명하느라 밑으로 남자 동생 2명은 학력이 별로 없다. 나는 비록 해고는 됐지만 여동생 4명 중 당시 고1, 중2에 다니던 두 여동생 학비를 마련해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가톨릭 신부님 몇 분의 일을 도와드리고 약간의 생활비를 받아 쪼개 써야만 하는 등 극빈 생활을 하느라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다.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우리는 거리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를 조직하고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에게 배포하기 시작했다. 나는 해고되기 전 마지막 출입처가 서대문경찰서, 마포경찰서, 서부경찰서 및 그 관할 구역에 있는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 등이었기에 세 대학교의 민주의식이 강한 교수들에게 동아투위의 유인물을 전달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 무렵 이화여자대학교 학생 몇 명이 동아투위를 돕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판화 등이 그려진 손수건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서대문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그 손수건을 압수하고 학생들을 모조리 연행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돌린 유인물이 학생들을 선동한 것으로 짐작하고 같은 지역을 분담했던 이영록 위원을 1975년 6월 24일에, 나를 6월 25일에 연행했다.

나는 연행되던 당시 마포구 아현동의 산동네에 있던 1.5평짜리 사글세 쪽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해고되기 직전까지 출입했던 서대문경찰서에서 피의자로 조사받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이 출입했던 경찰서에서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받으면서 나는 말할 수 없는 굴욕을 참아야 했다.

공안 검찰도 인정이 있었다

경찰서에 출입하는 기자들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복무한다는 사명감으로 수시로 경찰을 접촉하고 피의자나 참고인들의 수사기록도 열람하는 등 대체로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취재활동을 한다. 그러나 바로 엊그제까지 출입하던 그 곳 수사과에서 낮에는 종일 조사를 받고, 밤에는 즉심 대기실에서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는 취객들, 무전취식자들과 섞여 웅크리면서 밤을 새고, 또 낮에는 조사를 받고 밤에는 난장판에 들어가 잠을 설치는 14일 동안 식욕이 뚝 떨어져 식사를 거의 할 수 없었다.

이영록 위원과 나는 특정 교수에게만 유인물을 조심스럽게 전했을 뿐 학생들을 접촉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당연히 석방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당시 경찰서를 출입하며 전 수사과정을 감독하고 지시했던 중앙정보부 조정관에 의해 경찰이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영장을 청구하면 검찰이 수사를 보강하라고 지시하고, 다시 경찰이 영장을 청구하기를 10여 차례 반복하는 동안 침이 말랐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울지방검찰청 공안부는 불구속 입건으로 수사를 지휘하여 이영록 위원과 나는 7월 9일에 석방됐다.

나는 석방된 후 동아투위 동료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사필귀정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후 동아투위 선배로부터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에는 불구속이 없는데 우리가 특별한 예외를 인정받았다는 말을 들었다. 즉 동아투위의 한 선배가 자신의 고등학교 선배인 공안부장을 만나 “이태호 씨는 동아일보사를 쫓겨나서도 동생들의 학비를 마련해야 할 만큼 가난하니 구속시키지 말아주세요”라고 인간적으로 호소해서 정상이 참작된 것이란 설명이었다.

선배가 그렇게까지 노력했으며 서슬 퍼런 권력을 휘두른 피도 눈물도 없는 것으로 알려진 공안검찰도 인정이란 게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가슴이 뭉클했다.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일할 뿐 어떤 종류의 인간을 동지와 적 또는 은인과 원수로만 구별하여 흑백논리를 세우고 이에 따라 죽기 살기로 대응하는 것이 때로는 편협한 사고의 발현일 수 있다. 그 후 이영록 위원과 나는 검찰로부터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비장한 결단

한 고비를 넘긴 나는 대통령긴급조치 9호로 말하면 서대문경찰서 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 준비하며 쌓아두었던 자료들을 분산시키느라 몇 달 동안 동료들과 연락을 취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유신독재에 치명타를 날릴만한 극비 작업을 구상하고 목숨을 건 취재활동에 임했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극심한 인권유린 사례를 세계적으로 알려서 그 정권을 고립시키거나 없애자는 프로젝트이므로 만일 도중에 발각이 되면 자료를 뺏겨 극도로 허탈할 것이 틀림없는 데다가 상상할 수 없는 고문을 당해 죽을 수도 있기에 목숨을 건 취재활동이라는 나의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나는 비록 현역 기자는 아니었지만 노동운동, 도시 빈민운동 등 기층 민중의 인권운동 현장에 눈에 띄지 않게 접근하여 본격적인 취재활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 평화시장, 동일방직, 원풍모방, 콘트롤데이타, YH무역, 시그네틱스 등 격렬했던 노동자들의 인권운동에 관한 생생한 기록을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확보했다. 그 무렵 나의 생활수준은 생산직 노동자들보다 훨씬 못했지만 배고픔과 불편함을 감내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취재활동을 한 나에 대한 수사망이 좁혀올 것에 대비하여 언제나 취재원을 직접 만나지 않고 몇 단계를 거쳐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마지막 단계에는 반드시 외국인 성직자를 통해서 확인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런 취재 방식은 신경이 많이 쓰이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등 나를 극도로 피로하게 했다.

나는 아현동 쪽방을 내놓고 주민등록을 연고가 없는 성남시로 퇴거한 후 전입을 하지 않은 채 일부러 말소되도록 하고 1977년 여름부터 1년 동안 권력의 상징이었던 중앙정보부와 수도경비사령부가 가까운 필동에 사글세방을 얻어 비장한 각오로 자료 수집과 집필을 계속했다.

좁은 방에는 자료들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내가 작업하는 동안 나의 아지트를 목격한 유일한 사람은 청계피복 노동자로서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온몸에 석유를 뿌리고 분신자살한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 씨(그는 나중에 영국으로 유학해 한국 노동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음)였다.

나는 전태일 열사에 관한 자료도 보충해서 취재할 겸 혹시 들이닥칠 수사관에 의해 나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기에 전순옥 씨로 하여금 나의 작업과정을 관찰한 유일한 증인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나는 1978년 8월 15일 원고를 완성했다.

일본에서 출판된 〈불꽃이여 이 어둠을 비춰라〉

그 원고는 5?16 군사쿠데타 직후 중앙정보부가 한국노총을 어용조직으로 만든 세세한 과정과 모 기관의 수사관이 한 여성노동자를 연행하여 조사한 후 일단 석방하고 나서는 더 수사할 것이 있다는 이유로 부근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강간하여 임신케 한 사건을 비롯하여 그 때까지 알려져 있지 않던 독재권력의 야수적인 횡포를 고발하면서 “박정희 독재정권을 타도하자”고 결론을 맺었다.

내가 그런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동아투위 동료들은 거의 몰랐다. 나는 취재비와 방값 명목으로 작고한 해위 윤보선 선생님으로부터 20만 원, 미국 국적의 친구로부터 20만 원을 받았으며 몇 사람에게는 작업의 내용을 이야기할 수 없으므로 몇 십만 원을 빌려서 작업비로 충당했다. 아무튼 나는 피를 말리는 심정으로 탈고하여 그것을 비선(秘線)에 전하기까지 낮이건 밤이건 한 순간도 안심하지 못했다.

그 비선은 얼마 후 가명으로 출판해야 한다는 조건으로 내 원고를 무난히 일본으로 밀송해 그곳 인권운동단체들로 하여금 번역하게 했다. 나의 원고는 김일철(金一哲)이란 가명으로 〈火花よこの闇を照らせ(불꽃이여 이 어둠을 비춰라)〉는 제목으로 일본 신교출판사(新敎出版社)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저격돼 사망하기 4개월 전인 1979년 6월 30일 발행되었다.

결코 자랑이 결코 아니지만 그 책은 일본의 지식인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고 일본 소식통들이 뒤에 전해왔다. 번역자는 한국문제그리스도자긴급회의(대표 中嶋正昭 목사)와 한국민주화기독자동지회(대표 金在俊 목사) 등 쟁쟁한 단체들이었다.

일본 국민은 종교를 갖지 않거나 불교 취향인 사람이 많다. 그러나 개신교와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지식인 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일본의 개신교 목사들이 연대를 형성하여 한국의 인권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김대중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 시절 일본에서 납치되기 전 망명정부 문제를 논의했던 곳도 도쿄였다.

어떻든 졸저 〈불꽃이여 이 어둠을 비춰라〉는 나이 어린 불쌍한 여성노동자들을 학대한 박정희 정권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여론에 불을 질렀다고 한다. 그리하여 나는 졸저가 주로 기독교 라인을 통해 한국의 인권운동을 돕는 운동을 거세게 불붙게 하는 데 조그만 역할이나마 한 것으로 만족한다.

급성 간염으로 6개월 동안 정양하고

그러나 나는 아슬아슬한 일을 진행한 현장에서 하루속히 벗어날 겸 원고를 작성하던 1년 동안 진 빚을 갚기 위해 필동의 방을 내놓아 그 돈으로 부채를 청산했다. 그러고 보니 갈 곳이 없었던 나는 책과 책장 등을 친지 댁에 맡기고, 약 7개월 동안 선배나 친구들 집으로 동가식서가숙 하기도 하고, 야외의 벤치나 정자에서 긴 밤을 새기도 했다.

어느 날 밤 나는 구속자가족협의회 총무 김한림 여사의 수유동 댁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대문 앞에서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누르려다가 그만두고 부근 산으로 올라가 바위에 앉아 새벽을 맞은 일도 있다. 스스로 택한 고난의 여정에서 찬 이슬을 맞으며 노숙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고행 기간 중 나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간장이 타는 듯했다.

나는 취재비를 지원해준 몇 분외에는 작업 자체를 발설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으므로 도와달라는 말을 어느 누구에게도 할 형편이 못 되었다. 1978년 가을은 빨리 왔다. 초저녁에 내려가기 시작한 수은주는 방이 없어 공원 벤치에 누워 밤을 새야 했던 나를 새벽쯤이면 오들오들 떨게 했다. 그해 겨울은 당시 필동에 살았던 백기완 선생 댁 2층 거실에서 지냈다.

1979년 이른 봄 노동운동의 대모라 할 수 있는 조화순 목사가 노숙자 아닌 노숙자 생활을 하고 있던 나를 격려하기 위해 남대문시장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약속한 시각에 그곳으로 갔다. 조 목사는 나의 얼굴을 멀리서 보더니 “왜 이렇게 됐어요?”라고 놀랐다. 그는 가까이서 나의 눈을 쳐다보더니 “이 기자 눈이 달걀의 노른자 같지 않아. 황달인 것 같아. 간이 심하게 상했구만” 하면서 영양 섭취를 하면서 충분히 쉴 곳을 마련하자고 나의 팔을 끌었다. 그리하여 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시절엔 6?3사태에 관여했으며 1974년 4월엔 민청학련사건 주동자로 연행돼 사형선고를 받고 옥중에서 투쟁하고 있던 이현배 씨의 고향 집인 충남 홍성군 홍성읍의 한 목장에서 6개월 동안 싱싱한 소젖을 마시면서 정양하여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기간에 나를 보살펴 준 이현배 씨 가족의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둬 전달해준 동아투위 위원들과 나를 아는 후배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책을 쓰기만하면 금서(禁書)로 묶여

나는 동아투위의 선배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언론 현장에서 쫓겨난 후 다른 언론사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 까닭은 권력의 총본산 중앙정보부가 우리들을 사찰하면서 다른 언론사로 입사하는 것을 철저히 배제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시사문제와 관련이 없는 글을 쓰거나, 번역을 하거나, 출판사를 운영하는 등 언론과 전혀 무관한 업종을 찾아서 생계를 꾸려나갔다. 당시 결혼을 못하고 있던 나는 월급을 받을 곳이 없었지만 결혼해서 자녀를 둔 선배나 동료들보다는 생계에 대한 압박감이 덜해 권력의 눈을 피해 인권문제를 취재하고 르포 형식의 글을 써서 이곳저곳에 기고하여 받은 쥐꼬리 만한 원고료로 생활했다.

중앙정보부는 국민 여론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언론을 직접 조종하고, 여러 가지 정보 라인을 통해 잡지사나 출판사에까지 압력을 넣어 우리들의 생계를 막았다. 문화공보부는 출판한 모든 책들을 납본하도록 해서 검열하고 국민을 의식화한다고 판단하는 책들에 대해 ‘납본필증’을 발부하지 않는 방법으로 ‘판매금지’시켰다.

일반적으로 책의 정가와 판매 부수를 곱해 그 1할을 인세로 받는 저자들은 고생해서 쓴 책이 ‘판매금지’ 당하면 경제적으로는 헛수고를 한 셈이다. 출판사들도 제작비를 건지지 못해 고통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책일수록 기다리는 청년 학생들은 ‘판금서적’들을 비밀 루트를 통해 구입해갔다. 하지만 출판사 측은 정상적인 판매루트를 통해 팔 수 없으므로 경영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980년대에 내가 썼던 책 중에 판매금지 된 책은 〈1980년대의 상황과 논리〉(아침), 〈근로자의 벗〉(일월서각), 〈노동현장의 진실〉(금문당), 〈최근 노동운동 기록〉(청사), 〈민중과 자유언론〉(아침), 〈르뽀시대〉(실천문학사) 등이었다.

이밖에 나는 군소 잡지 등에 기고해 받은 원고료를 생계의 수단으로 삼았다. 내 글을 실은 잡지의 편집장들은 한 번 이상 청탁을 해오지 않았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9호는 비록 사실이라 하더라도 권력자의 비위에 맞지 않으면 유언비어로 몰아쳐서 탄압했으므로 글을 쓰거나 싣는 사람들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언론 현장에서 쫓겨난 나는 권력의 억압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양심의 가르침에 따라 “아니오!”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면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심경을 억누를 수 없었으며, 억강부약(抑强扶弱)의 원칙에 따라 힘이 강한 박정희 정권의 학정을 비판하고 힘이 약한 그들을 조금이라도 격려하기 위해 집필하는 등 나름으로 공평한 처신을 했다고 자부한다.

광주 민중항쟁 초기에 광주를 탈출한 까닭

나는 해방 직후 대한노총 위원장을 역임한 노동운동의 원로이며 가톨릭 신자였던 김말룡 선생의 추천으로 주교회의 직속기구였던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초대 간사로 1979년 여름부터 일하게 됐다. 그 때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은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겸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였다.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내가 수행해야 할 임무는 인권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천주교 입장에서 발언해야 할 부분을 선택하며 발표할 성명서의 초안을 작성하는 것 등이었다. 그 가운데 자료를 수집하는 일은 급조치 9호 아래서 박정희 대통령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유언비어로 몰아 단속하고 사실을 보도해도 실형을 선고받는 풍토였기에 애로가 많았다. 나는 그 시기에 주한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대사관의 정무담당 서기관이나 참사관들의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정의평화위원회에 들러가기도 했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한국의 인권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갖도록 촉구했다. 그들 또한 나를 격려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이로써 엄혹했던 10월 유신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동시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부 실력자 전두환 보안사령관에 의해 더욱 험악한 군사독재가 시작됐다. 그는 1979년 12월 12일 쿠데타에 의해 집권의 기반을 공고히 한 후 대통령까지 역임한다.

1980년 5월 16일 나는 정의평화위원회 간사의 자격으로 광주에서 활동하는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으로부터 노동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하광했다. 거기서 자료를 모으고 취재한 나는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다는 뉴스를 당일 새벽에 접하고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5월 18일 당시 금남로에 있던 가톨릭광주대교구청으로 가서 윤공희 대주교를 뵙고 인사한 후 시국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다. 오전 11시경 일단의 전남대학교 학생들이 “계엄철폐” “김대중 석방” “전두환 타도”등의 구호를 외치며 금남로를 거쳐 도청 쪽으로 행진하는 모습이 교구청에서 내려다 보였다.

그날 오후 기동경찰과 대학생 및 시민들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무장 군인들도 트럭을 타고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학생과 시민들이 경찰과 군인들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며 저항했다. 경찰의 페이퍼 포그 차량이 흰 연기를 뿜어댔다. 그러나 학생과 시민들은 흩어졌다가 공격하는 등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거리는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결로 살기가 등등했다.

5월 19일 새벽부터 무장군인들이 더욱 많아졌다. 나는 데모대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취재 노트를 조심스럽게 꺼내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의 모습은 군의 요격 대상으로 찍힐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군인이라도 노트를 꺼내 기록하는 자는 군의 작전에 해를 끼치고 소식을 밖으로 알릴 수 있으므로 사살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5월 19일 저녁부터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날 밤 월산동 집에서 밤을 새며 고민했다. 비록 정의평화위원회 간사였지만 나는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이래 홈그라운드를 못 가진 재야의 기자일 뿐이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나를 희생하면서라도 빛나는 지면을 통해 계엄군의 만행을 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이 나의 사기(士氣)를 극도로 저하시켰다.

5월 20일 새벽 ‘작전상 후퇴’하기로 결정한 나는 며칠 동안 모은 자료를 가방에 넣고 계엄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광주를 탈출해 정의평화위원회에 보고하고 몇몇 외신 기자와 주요 국가의 외교관들에게 상황을 브리핑했다.

다시 광주에 잠입하여

내가 서울에 머무는 동안 광주에서는 무장한 계엄군과 이에 맞서 무기고를 털어 무장한 시민군의 교전으로 희생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가족과 친지들, 그리고 이름만 불러도 친숙한 인권운동 동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모교의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 적힌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라는 명제를 가슴에 새기고 자랐으며 일생을 통해 바른 길을 걷기로 결심했던 나는 ‘작전상 후퇴’란 구실이 비겁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느꼈다.

나는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윤공희 대주교에게 문안도 드릴 겸 양심의 가책도 지우고 더욱 중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5월 23일 심야에 시민군과 계엄군이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바스락 소리만 나도 총을 쏘아대는 판에 혈로(血路)를 뚫고 무사히 광주로 잠입했다. 계엄군과 시민군의 사활을 건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던 당시 나는 면밀하게 보안을 유지하면서 평소에 믿을 수 있었던 사람들 중 극소수만 접촉하면서 시민군의 피해 자료를 수집하느라 1주일 동안 머물렀다. 그 사이에 계엄군은 시민군이 끝까지 사수했던 전남도청을 점령하고 데모의 주동자들을 색출하느라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내가 할 일을 마치고 열흘 만에 서울로 돌아와 보니 몸무게가 5kg이나 줄어 있었다. 가톨릭의 한 평신도 지도자는 “이 선생님이 몰래 서울을 떠나 광주서 활동하고 있을 무렵 안기부(중앙정보부의 후신)의 한 간부가 ‘이태호가 광주로 들어가 무엇인가 하는 모양인데 걸려들기만 하면….’이라고 해서 크게 걱정했었다”고 전해주어 나는 모골이 송연했다.

나는 위험한 고비를 넘기며 수집한 수 백점의 자료(각종 유인물, 사진, 광주민중항쟁 주도자들의 활동 일지 등)를 내 목숨보다 소중히 간직하고 광주를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는 줄곧 폭탄을 들고 지뢰밭을 피해간 심경이었다. 미묘한 시점에 체포된 사람은 빈손인 경우 크게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권력자가 자신의 만행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증거를 소지한 사람에 대해서는 혹독한 고문을 하는 것은 시의 고금과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대동소이하다. 이런 식으로 자료를 빼앗긴 사람은 자료를 보존하지 못한 자책감과 가혹한 보복 때문에 2중의 고통을 당한다. 내가 그런 비극을 겪지 않은 것은 얼마나 다행인가!

특히 내가 입수한, 계엄군이 난사한 M16 총탄에 의해 목이 꺾여 달랑달랑한 시민군의 끔찍한 시신, 온몸이 피로 물든 시민군, 시민군을 총검으로 난자하는 계엄군의 모습을 담은 사진 등은 비선을 통해 미국과 유럽의 인권운동단체들에게 전해져 주요 외신에 크게 소개되기도 했다.

나는 참혹한 현장을 취재해보았지만 상반신이 피로 물들고 목은 꺾여 떨어져나가기 직전인 시신을 보고 머리를 쇠망치로 얻어맞고 가슴은 천리쯤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광주민중항쟁 때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열사들 한 분 한 분을 신은 보살펴주시리라.

취재 보도론을 강의하며 눈물 흘리다

나는 2004년 2학기부터 3년 6개월 동안 한국외국어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시간강사로 나가면서 취재보도론을 강의했다. 시간강사 월급이래야 3학점짜리 한 과목에 50만 원 가량이었다.
취재보도론이란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거나 부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자가 사건을 취재하는 방법과 기사를 쓰는 요령을 가르치는 과목이다. 현역 기자 시절 기사를 가장 잘 썼다는 말을 듣지는 못했지만(그만큼 기사를 잘 쓰는 기자들이 언론 현장에는 많다) 취재를 아주 잘 한다는 말은 자주 들었던 나는 취재하는 방법만큼은 대학에서 강의할 자격을 갖추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강의에 임했다.

강의를 시작한지 몇 학기 되지 않아 타교에서 청강하러 오는 학생도 생겼다. 나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해당 학생이 실토하여 나중에야 알았다. 그만큼 나는 열정을 다해 강의했다. 동아일보사로부터 타의로 해고된 후 30년이 가까워진 시점에 취재와 기사 작성에 관해 강의하던 나의 심경은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말 그대로였다. 나는 기자가 취재 현장에서 겪는 아슬아슬한 체험을 목숨을 건 선배 기자들의 사례와 나의 경험 등을 통해 학생들에게 강의했다. 취재란 고급 취재원을 확보하고, 사건 당사자들의 눈에 띄지 않게 확인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확인된 내용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킬만한 것이고 신속하고 정확하게 보도했을 경우 특종기사가 된다.

그러나 나는 광주민중항쟁 당시 다른 일로 광주에 내려갔다가 항쟁의 초기 과정을 목격했지만 현역기자가 아니라는 데 의기소침해 광주를 탈출했으며 그 후 양심의 가책을 받아 광주에 잠입하여 중요한 자료를 수집한 과정을 설명하면서 학생들 앞에서 눈시울을 적셨다.

취재 현장은 목숨을 건 투쟁의 마당이다. 현장은 일회적이다. 어느 누구도 어떤 현장을 미래에 복원할 수는 없다. 인생도 그렇다. 오늘 우리의 현재는 영원히 지금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현재의 한 순간 한 순간이 모여 인생이 된다. 크게 보면 역사도 그렇다.

그렇다면 나는 역사의 현장을 언론계 밖에서 놓친 사례가 얼마나 많았던가. 취재보도론을 강의하면서 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다. 언론은 시시각각 현장에서 승부한다. 권력은 그 현장과 나를 힘으로 분리시켰다. 새롭고 싱싱한 취재 경험담을 들려줄 수 없었던 시간강사는 강단에 설 때마다 외로웠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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