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 자유언론실천재단

헌법재판관 중 한 사람은 나하고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내 대학 1년 후배인데 그냥 동창 정도가 아니고 대학 내내 같은 건물에서 한 솥밥 먹으며 옆방에서 자고 공부한 그런 동문수학이다.

그때 연구실 지도교수가 이 사람 장인이 됐다.

내가 1년 휴학하고 2학년 때 학교에서 유신 반대 데모가 벌어졌다.

내가 주동자 중 한 사람이었다.

다행히 내 배후가 없고 조직도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교수님들이 형사 앞에서 “이 친구는 공부만 하는 친군데 이상하네?”하고 열심히 고개를 갸우뚱했던 덕분에 20일 구류만 살고 복귀했다.

그때 이 친구가 “여기는 (고시) 공부만 하는 학생들이 공부만 하는 곳인데 데모하는 학생은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며 나를 인민재판에 건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아이들이 없어 내가 쫓겨나는 일은 없었지만, 그때의 한이 지금까지도 가슴에 못 박혔다.

나는 3학년(1976년) 때 외무고시 2차까지 합격했지만 데모 주동사건으로 인해 3차 면접에서 떨어졌다.

이 놈의 나라에서 절대로 공무원 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씩씩대며 서슴없이 언론을 택했다.

그는 이듬해인가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됐다.

동창회에서 가끔 만났지만 서로 소 닭 보듯 했다.

그런데 이 자가 헌법재판관이 되더니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에 앞장섰다.

해산 결정에 찬성했을 뿐 아니라 무슨 분이 덜 풀렸는지 보충의견까지 냈다.

대학 때의 아픈 추억까지 살아나며, 다시는 상종해서는 안 될 정말 나쁜 놈이라는 생각이 굳어졌다.(나는 통진당 당원이 아닐 뿐 아니라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양식에 거부감까지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박근혜 탄핵심판이 다가올수록 나는 겁이 났다.

이 자가 틀림없이 기각 편을 들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때문이었다.

5-3이라면 3 속에, 6-2라면 2 속에, 7-1이라면 그 1이 틀림없이 이 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자가 천만 뜻밖에 탄핵을 인용하는 편에 섰다.

8-0의 8 속에 들어 간 것이다.

그래, 우린 서로 인생관은 달라도 같은 인간이었던 거다.

자존심 있는 인간.

이젠 마음 속으로나마 이 자를 용서해야겠다.

용서가 아니라 존경해야 마땅하다.

박근혜라는 망종을 끌어내리는데 이 자가, 아니 이 분이 나보다 백 배, 천 배, 만 배는 더 큰 역할을 했다.

나라 살리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언젠가 동창회에서 만나면 넙죽 큰절이라도 해야겠다.

업어줘야겠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