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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해직과 굴절된 삶[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20)] 김동현 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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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3.06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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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는 1936년 초 중국국민당 장개석의 공격을 피해 12500km에 달하는 고난의 대장정을 하면서 권토중래를 도모하고 있던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찾아 모택동을 만났다. 그 때 모택동은 소년시절 나의 인생목표는 학교선생님이었다. 내가 지금처럼 핵심 공산당윈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인간의 의지는 주변 환경 앞에 꺾일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모택동은 실제로 교사를 꿈꾸며 장사사범학교를 나왔지만, 장인의 추천으로 북경대학교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많은 책을 읽고 새로운 사상에 탐닉함으로써 인생의 진로가 바뀐 것이다.

나 역시 경남 하동의 가난한 농촌 출신이라 어려서부터 초등학교 선생님이 장래 목표였다. 고등학교만 나와도 확실한 직장이 보장되는 사범학교는 무상교육이어서 나에게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가 진학할 무렵 학제개편으로 사범학교는 없어지고 대신 2년제 교육대학이 생김으로써 고등학교를 거치지 않고는 교사가 될 수 없게 되었다.

농촌 출신이 부산고등학교로

내 고향에서 90리 떨어진 진주는 교육도시이기에 그나마 서부 경남의 시골 중학교에서 능력이 되는 학생은 진주로 나갔고, 나의 애초 진학목표도 진주사범학교였다. 졸지에 진학 목표가 없어진 나로서는 방황하다가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더 큰 물로 나가라는 친척의 권유가 있어서 별다른 생각 없이 부산으로 향했다. 정말로 우연히 얼떨결에 부산고등학교에 응시했고, 운 좋게 합격증을 갖고 고향에 왔더니 시골 중학교 선생님들의 환대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기야 나는 우리 중학교 개교 이래 첫 번째 부산고 합격생이었고 그 후에도 후배를 만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부산에서의 유학생활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벽촌에서 살다가 갑자기 대도시의 문화적 충격도 충격이었지만 가까운 친구도 없어서 외롭기만 했다. 특히 집에서 매달 하숙비를 보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학업을 계속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숙식과 간단한 교통비만 제공받는 조건으로 중학생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냈다. 그만큼 새로운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자존심도 있고 해서 나의 힘든 사생활을 학교 급우들에게 나타내지는 않았다.

당시 나의 모교 부산고는 부산과 경남 일대의 인재가 모인 명문고였다. 매년 100여명의 학생들이 서울대에 진학했으며 성적이 좋을 때는 졸업생의 30% 정도인 180여명이 합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마침내 내가 고등학교 졸업하던 날, 나에게는 먼 시골에서 찾아올 축하객이 한 분도 없었지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나는 우등상과 개근상을 받았다. 그리고 대학은 전액 장학금이 보장되는 고려대학을 택했다. 내가 대학에서 영문학을 선택한 것은 나의 가장 취약부분이 영어였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는 진로에 대해 고민에 빠졌다. 학교 교수님들은 학업을 계속해서 대학에 몸담으라고 권유하셨고, 나도 교수직에 상당한 관심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나의 전공이 영문학이므로 외국유학을 필수적으로 거쳐야하는데, 박사학위까지의 시간과 재정적 부담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우선 시골에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모셔오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장 직장을 구해야하는데, 그 당시 어문학 전공으로 갈 수 있는 직장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법조출입기자로 언론생활 시작

언론사가 그나마 내 뜻을 펼 수 있는 직장이라는 판단이 섰으며, 그래서 당시 우리나라의 대표언론사인 동아일보를 택했다. 중학교시절 나는 하동군 백일장대회서 장원을 하는 등 글짓기 상을 휩쓸다시피 했으며, 대학시절 학보에도 가끔씩 투고를 했기에 글쓰기에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1차 필기시험, 2차 실기시험(취재 및 기사쓰기), 그리고 3차 면접시험의 어려운 관문을 거쳐 합격의 영광을 얻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 졸업 2개월 전인 196912월부터 동아일보 12기 수습기자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나는 신문사의 각 부서를 1개월씩 순회하는 1년 간의 수습기간을 거친 다음, 마침내 사회부에서 법조출입기자로 본격적인 언론인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사회상황은, 삼선개헌을 성취시킨 박정희정권이 영구집권을 획책하는, 이른바 유신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우리와 같은 젊은 기자들은 정의감에 바탕을 둔 현장고발의 직업정신이 아주 강했기 때문에 군부독재의 갖가지 제약은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애써 취재한 기사가 사라지거나 왜곡될 때 느끼는 허탈과 자괴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가끔씩 술자리에서 우리 병아리기자들은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특히 그 당시는 조직적인 언론 통제를 위해 정보부원이 언론사마다 파견되어 있었는데, 소위 기관원의 횡포는 묵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학생들의 시위나 민주인사들의 언행에 관한 것, 또는 비판적인 외신기사는 빼라, 줄여라하면서 데스크처럼 일일이 간섭하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청탁 형식이었지만 여의치 않을 때는 트집거리를 잡아 협조하지 않는 기자들을 정보부로 연행하여 물리적인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1973년 어느 날 광화문 신문사 앞까지 찾아온 서울대생들이 침묵하는 동아일보를 질타하면서 데모를 벌이다 경찰들에게 뭇매를 맞으며 끌려가는 모습을 편집국 3층에서 직접 내려다보고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 더 이상 굴종할 수 없다는 생각을 다졌다. 그동안 선배들과 함께 언론자유를 갈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하곤 했지만, 그 목소리는 현실의 높은 벽에 묻혀버리는 허공의 메아리에 불과했다.

마침내 19741024자유언론실천선언을 기점으로 그 동안의 억압을 걷어내고 정상적인 신문제작에 돌입했으며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도 막았다. 그 후 4개월 정도는 나름대로 언론 본연의 모습을 찾으려고 무던히 노력했고 어느 정도 보람도 있었다. 결국 박정희 군부유신독재정권은 그해 12월 들어 광고탄압을 통해 동아일보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나는 광고사태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197514일 김명걸·심재택 선배와 함께 뚝섬 근방에 있는 한일약품을 직접 찾아갔다. 한일약품 선전부의 광고담당 간부는 회사의 정책 결정에 따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및 신동아, 여성동아 등에 당분간 광고를 집행하지 마라는 지시를 받았다고만 설명했다. 동아일보의 광고효과를 잘 알면서도 경영원칙에 어긋나는 홍보마케팅정책을 하는 이유를 따져 묻자 답답하고 괴롭다면서 속마음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이 된 격려광고

마침내 광고지면이 백지인 채로 신문이 발행되자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이 19751월부터 성금을 모아 격려광고를 싣기 시작했다. 격려 의견광고가 새로운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되어 순식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가자 당황한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사 경영진을 만나, 광고를 풀어주는 조건으로 자유언론운동에 앞장선 기자들의 해직을 합의했다. 그 동안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외부탄압에 맞서 함께 싸워나가자던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언론의 정도를 벗어나서 국민들의 성원을 배신한 채 정부와 더러운 협상을 한 것이다.

회사측은 기구축소라는 이름으로 우선 18명의 기자를 해임했다. 광고탄압에 따른 경영난을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기자들은 월급 삭감이나 봉급 일부의 자진반납을 결의함으로써 기구축소와 해임의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측은 의중이 딴 곳에 있었기에 이를 수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계질서 문란등의 명분으로 징계를 확대해 나갔다. 이에 기자들도 제작거부와 농성이라는 강경책으로 맞섰다.

농성 5일째인 317,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 있었다. 회사측은 농성사원들을 내쫓기 위한 음모를 벌이고 있었고 농성사원들은 그것을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마침내 새벽 3시쯤, 건너편 출판국 쪽과 차량과 주변에서 불빛신호가 보이고 어둠 속에 왕래하는 사람들의 형체가 어른거렸다. 농성기자들의 강제축출에 대비하여 그날 새벽 2시부터 4시까지 3층 편집국의 불침당번이었던 나는 우선 소등을 한 후, 며칠째 농성으로 지쳐서 이리저리 책상이나 의자에 엎드려 있는 동료 기자들을 깨웠다. 당시 편집국 안에는 83명의 농성기자와 시노트 신부가 있었다.

정확하게 315, 마침내 회사측이 동원한 2백여명의 폭도들이 강렬한 서치라이트를 앞세우고 , 하는 함성과 함께 단식팀이 농성하고 있는 2층 공무국부터 공격하기 시작했다. 문과 벽을 부수는 해머소리가 , 울려왔다. 마치 서부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인디언들의 기습장면 같은 것이었다. 그 해머소리는 가슴을 치는 아픔으로 느껴졌지만, 적어도 사회의 목탁이라고 부르는 언론사에서 그렇게 난폭한 폭력이 자행된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320분 쯤 폭도들은 산소용접기와 해머로 철문을 부수고 23명의 기자들이 5일째 단식농성 중인 조판공장으로 먼저 쳐들어갔다. 술 냄새를 풍기며 서치라이트와 각목을 휘두르며 창문을 뛰어 넘었다. 폭도들은 기자 한 명에 3, 4명씩 달려들어 몽둥이질, 주먹질, 발길질을 하며 창밖으로 끌어냈다. 단식으로 지친 기자들이 양쪽 겨드랑이를 잡힌 채 아래 층 차고까지 끌려내려가는 동안 조금이라도 반항을 하면 그들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주먹질이었다. 정연주 기자는 각목에 맞아 안경이 두 동강이 났다. 폭도들의 구타로 이광석·임채정·심재택·성유보·정연주기자가 부상을 당했다. 이미 5일째 단식중이어서 기자들은 쇠잔해졌는데도 그들은 보리자루를 옮기듯 거칠게 다루었던 것이다.

새벽 350분쯤, 2층 공무국이 함락되고 단식농성기자들을 실은 지프차들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 이제 3층 쪽으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폭도들은 산소용접기와 해머, 각목으로 농성 중인 3층 편집국 기자들이 걸어잠근 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구름다리 쪽의 창문과 덧문이 부서지면서 술 취한 폭도들이 해머와 몽둥이를 휘두르며 편집국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일촉즉발의 흥분과 긴장이 서렸다. 접근하는 기자들에게는 소화기 가스를 내뿜기도 했다. 일부 낯선 젊은이들 사이사이에 판매부직원과 통신과 직원, 그리고 낯익은 경비원들도 섞여 있었다.

안종필 기협 임시분회장이 이들과 싸우지 말라. 우리는 끝까지 비폭력으로 투쟁해야 한다면서 냉정을 호소했다. 중과부적이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기자들이 폭력으로 맞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편집국 한 가운데 뭉쳐서 스크럼을 짜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폭력배들은 기자들에게 당장 나가라면서 위협을 가해왔지만, 농성기자들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할 일을 하고 나갈 테니 자리를 좀 비켜달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쫓겨나면서 부른 우리 승리하리라

한참 실랑이 끝에 사원이 아닌 사람들을 일단 바깥으로 나가게 한 뒤 그 동안 우리가 주장해온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낭독하고, 미국 인권운동 노래로 유명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불렀다. 이어서 자유언론 만세’ ‘민주회복 만세’ ‘동아일보 만세등 만세삼창을 외쳤다. 마지막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때 편집국 사회부 기둥에 걸었던 휘호 自由言論實踐宣言의 커다란 족자를 걷어 내렸다. 그렇게 해서 동아일보사 안에서의 자유언론운동은 종막을 고하고 말았다.

각자 옷가지와 주요 문서 등 사물을 정리한 뒤 편집국에서 밀려나오는 농성기자들의 얼굴에는 눈물이 뒤범벅이었다. 폭도들에게 밀려 사옥 밖으로 나오자 밤을 새우며 농성기자들과 뜻을 같이했던 민주인사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신문사 정문 앞에서서 기다리고 있던 함석헌 선생, 이희호 여사, 정일형 박사 부부, 천관우 선생, 이택돈 변호사, 김지하 씨 어머니 정금성 여사 등도 울분을 참지 못했다. 새벽의 차디찬 가랑비마저 분루(憤淚)로 변해서 내리고 있었다.

2층공무국에서 단식 중이던 23명의 기자들은 바깥으로 내몰리자마자 곧장 혜화동 로타리의 고려대 우석병원으로 실려 갔지만, 3층에서 쫓겨난 기자들은 신문사 앞마당에서 4층 방송국을 애타게 지켜보았다. 찬 바닥에 주저앉거나 선로 자유언론을 향한 외침을 계속했다. 그러자 중부소방서 쪽에서 사복 경찰관 150여명이 갑자기 새까맣게 떼를 지어 나타나더니 농성사원들과 민주인사들을 광화문지하도로 내몰기 시작했다.

지하도로 밀려난 기자들과 재야민주인사들이 동아일보사와 박정희 정권이 야합한 새벽의 폭거에 계속 항의하자 사복경찰관들은 우리를 광화문지하도로, 다시 건너편 비각 쪽으로 밀어냈다. 우리는 신신백화점 쪽으로 걸어가면서 침묵시위를 계속했다. 이튿날인 318일 오전 쫓겨난 농성사원들은 신문회관에 집결, 자유언론의 마지막 보루인 동아를 지키자면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다.

우리 동아투위위원들은 해직된 후 6개월 동안 매일 아침 동아일보사 앞에서 침묵시위를 하고 ‘우리의 주장’을 담은 유인물을 만들어 각계 요로에 전달하며 정말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나는 법무팀 소속이라 판사와 검사, 변호사 등에게 우리의 소식지를 전했으며, 동아투위 위원들의 부당해직 소송에 관한 업무도 지원했다. 노모를 모시고 있던 나는 어머님이 걱정하실까봐 평소대로 출근시간을 지키면서 처음 몇 달 동안은 교회를 비롯한 민주단체들의 격려금으로 그나마 연명해갔다.

대기업 창업주 전기 쓰는 임시직으로

6개월이 지난 후 투위 위원들은 각자의 생계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 낯선 생업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다행히 가족이 없던 관계로 번역 등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다가 얼마 후에는 갑자기 작고한 어느 대기업 창업주의 전기를 쓰는 임시직 일을 맡게 되었다. 그나마 고정수입이 생긴 사람은 월급의 10%를 동아투위에 내기로 합의했다. 각자 생업으로 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투위 사무실을 유지하고 각종 인쇄물을 만들며 우리의 뜻을 알리는 일을 계속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제도권 매체에서 다루지 못하는 숱한 사건들을 등사판으로 만들어 배포한 유인물이 문제가 된, ‘민권일지 사건’ 등으로 10여명의 투위 위원들이 한꺼번에 구속되어 그들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도 우리들의 공동 몫이었다.

젊은 기자들은 철저한 직업의식에 따라 언론자유를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동아일보 안에서의 몸부림은 동아광고사태가 일어나기 수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유신독재시절이라 그동안 할 수 있었던 것은 “언론자유를 보장하라”는 요지의 선언문 낭독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이를 주동한 기자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 징계를 받는 경우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회사 안에서도 기자를 업무 쪽으로, 혹은 지방으로 발령을 내기도 했으므로, 신분보장을 받기 위해 최초로 언론노조(출판노조) 설립을 시도했다.

노조 설립은 등록제가 아니라 신고제인데도 국가권력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노조 설립과 관련해서 나는 1974년 2월 해직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1개월만에 복직되기는 했다. 회사의 사면령에 따른 복직 발표 하루 전날, 해직된 노조간부들이 합숙하다시피 하고 있던 여관에 동아일보 출입기관원 방준필이 찾아와 “내일이면 모두 회사로 들어간다”고 미리 알려준 것만 봐도 관권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일단 노조운동과 관련하여 해직된 입장이라 요시찰 인물로 낙인이 찍혀 있었다. 해직 후 동아일보사는 일부 기자들에게 반성문을 앞세우며 개별적으로 복직협상을 벌이기도 했으나, 나의 경우는 노조 관련 해직 전과가 있어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뜻을 암묵적으로 전달받았다. 나는 언론인이 되고 싶었고, 광고사태 때도 노조사건처럼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기자로 다시 원상회복이 되리라 굳게 믿었다. 지금처럼 끝내 동아일보 기자로 복직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언론인으로 남아 있는 길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런 언론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무렵 나는 20대 후반이었다. 당시 어머님은 외아들의 새로운 보금자리 가정을 무척이나 기다렸지만, 나의 하루하루 생활이 낭만을 꿈꾸기에는 너무나 절박해서 결국 혼기를 놓쳐버렸고, 뒤이어 해직의 어려움으로 이어지자 결혼은 더더욱 늦어져 나는 현재 60대 후반의 나이인데도 막내가 군복무를 끝내고 대학 4학년에 재학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S사에서 작고한 창업주의 전기 집필 작업을 하며 임시 계약직 사원으로 몇 년 간 지내다가 마침내 정식 사원이 되어 그 기업의 사보 제작 업무를 맡게 되었다. 그런데 1977년 여름 사무실에 첫 출근하던 날, 제일 먼저 찾아온 사람은 정보부의 이봉노였다.

그는 언론 감시를 위해 동아일보사에 출입하는 기관원이었으며, 유신헌법 반대 서명운동과 관련하여 남산 정보부에서 나를 직접 조사했던 장본인이었다. 나에 관한 인사동정을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에 확인차 찾아왔다고는 했지만, 당시 내가 느꼈던 불쾌감과 좌절감과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조지 오웰이 말한 통제사회의 ‘빅 브라더’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게다가 그가 내가 소속된 종합기획실의 실장실에도 들렀다 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는 이사를 하면 관할 경찰서 정보과 직원이 제일 먼저 찾아오는 방문자였다. 심지어 그 이봉노는 나의 결혼식장에도 나타났다. 나는 그를 조용히 불러 “오늘은 내 생애의 소중한 축일이니 당신을 보고 싶지 않다”고 했더니 “진심으로 축하차 왔다”고 했지만 어떤 사람들이 하객으로 왔는지 염탐하러 온 것임을 모를 리 없었다. 직업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마저 감시당하던 시대였다.

당시 기업에서 발간하는 회사보는 월간이었기에 업무 부담이 적어 바깥활동의 시간도 있었고, 원고료는 일반 잡지보다 훨씬 높았기에 가능한 한 해직된 선배들에게 기고의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내 밑에서 실무일을 할 사원으로 문인들의 민주화 운동에 열성적이었던 이시영 시인을 채용했더니, 입사 2개월만에 경찰에 체포되어 29일 간 구류조치를 받았다. 회사측에는 취재나 인쇄소 일 등의 핑계를 대며 그를 감싸주는 것은 물론, 그의 일까지 도맡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해외 근무의 기회도 빼앗기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새로운 직장에 정착하면서 나타났다. 당시는 중동 건설붐을 타고 기업의 해외 진출이 활발했던 터라, 기업홍보의 큰 몫을 차지하는 건설현장을 소개할 목적으로 해외에 출장을 갈 일이 가끔 있었는데 내게는 여권 발급이 안 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해외출장시 여권 발급은 중앙정보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가정사를 핑계로 출장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기도 했지만 결국 나의 신상에 관한 사실이 드러나 회사 내에서도 문제사원, 결격사원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나의 전공이 외국어여서 해외근무의 기회가 있었는데도 공권력에 의해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또 다른 고통이었다.

이처럼 동아일보에서의 해직은 단순히 언론인으로서의 꿈이 사라진 것에 대한 정신적 공백뿐만 아니라, 그 뒤 나의 삶 구석구석을 왜곡·굴절시켰다. 그래서 동아사태는 37년 전의 단순한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그 뒤 나의 삶을 계속 짓눌려온 커다란 트라우마이다.

과거 학창시절 모범생이었던 나의 모습을 기억하는 친구들은, 동아투위에 속한 ‘투쟁인’으로 변모한 나를 의아해한다. 매사에 성실하고 원칙에 투철한 삶을 이어온 나 자신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엄혹한 유신시절을 지내면서 그렇게 변했는지도 모른다. 모택동의 말대로 정말 인간의 의지는 외부환경(군부독재) 앞에 무기력해지는 것인가. 나는 다만 언론인이라는 직업에 충실했을 뿐이다.

인류 역사상 자유, 정의, 진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매우 고귀하지만, 이를 주창하는 사람은 항상 소수였고, 흔히 보상받지 못했다. 특히 언론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롭게 하는 자유이기 때문에 사회 발전을 위해 소중히 지켜져야 한다.

언론탄압의 목적으로 광고탄압을 하고, 113명의 언론 지식인을 해직시킨 사례는 세계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유신독재의 산물이다. 조선시대 같으면 언론인은 사관(史官)이므로 대량해직은 사림(士林)들의 사화에 해당된다. 그래서 1975년의 동아광고사태는 갑인사화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격려광고가 번지자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 경영진과 만나 절충을 벌였다. 정부는 동아광고탄압을 풀고, 회사는 비판적인 기자들을 내쫓기로 함으로써 동아는 언론자유를 맞바꾼 추악한 뒷거래를 한 것이다. 그 후 동아는 18명을 해임하고 7차례에 걸쳐 100여명 언론인 대학살을 자행했다.

비록 모두 직장을 잃었지만 이들 해직기자들은 후일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 많은 일을 했다. 나는 그들의 용기와 정의감을 지금도 경이롭게 생각한다.”

이희호 여사도 자서전 <동행>에 “해직 언론인들의 투쟁과 오랜 실직으로 인한 신산한 삶을 옆에서 지켜본 나는 안타까웠다.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만든 동아투위와 같은 저항이 없었다면 우리 언론은 얼마나 부끄러울까. 일제에 항거한 3·1독립만세운동으로 부끄럽지 않은 민족이 되었듯이 불의에 대한 공분과 저항은 실존과 자존의 증거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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