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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짜고짜 내게 돈 봉투를 내밀었다”[내 인생의 취재기] 철도 공안원 암표 밀매 행위 폭로하다
〈조성호 전 한국일보 기자〉
  • 관리자
  • 승인 2017.02.28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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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 기자들은 대개 입사 후 견습 기간이나 사회부 시절 ‘경찰기자’ 시절을 거친다. 경찰기자를 속어로 ‘사쯔마와리’라고 부른다. 경찰기자들은 기본적으로 경찰서를 활동의 근거지로 해 관할 지역 경찰서와 검찰지청, 병원, 대학 등 곳곳을 누비며 사건 사고 화제꺼리 등 취재를 하는데 경찰서를 돌아다닌다고 해서 일본말로 사쯔마와리(察巡)라고 불렀던 것. 물론 없어져야할 왜색 표현이다.

경찰기자는 대부분 젊은 나이에 거친다. 난 1973년 한국일보 입사 직후 견습 기간을 거친 뒤 외신부(현 국제부)에서 4년 반 넘게 근무하고 5년 후 사회부로 발령 나 2년 남짓 경찰기자 생활을 했다. 30대 늦은 나이에 팔팔 뛰는 20대 젊은 군상들 틈에 끼어 좀 고단한 행군을 시작한 셈이다. 첫 1년은 서대문경찰서 라인에 배치됐는데 서대문-남대문-용산-마포-서부경찰서 등 서울 서부지역이 활동의 근거지였다.

당시는 엄혹한 유신독재 치하에서 학생시위 등 시국 관련 사건은 제대로 보도하지도 못하고 일선 기자들이 경찰서를 중심으로 한 사건 사고 취재 보도에 치중하던 시절이었다. 경찰기자들은 외로운 추적자처럼 눈에 불을 켜고 사건의 냄새가 날만한 내밀한 곳을 혼자 찾아다니기도 하고 물을 먹을까 봐(낙종할까 봐) 서로 감시하며 한데 몰려다니기도 했다. 몰려다니는 경우가 더 많았다. 뒤늦게 경찰라인에 뛰어든 나는 나이 젊은 후배들 틈에 끼어 함께 돌아다니는 게 왠지 거북하고 눈치가 보여서 혼자 취재 다닌 경우가 더 많았다. 내 활동 지역에 서울역이 있었다. 다른 기자들은 거의 그곳을 외면했지만 난 고단한 인생의 만화경 같은 그곳이 자꾸 마음에 끌려 혼자 그 속을 파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역의 철도공안원이 암표를 팔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아니 거대 서울역의 보안관인 철도공안원이 암표 단속이 아니라 암표를 팔고 있다니. 도둑 잡는 경찰이 도둑질하는 행위와 다를 게 무어란 말인가. “에, 그럴 리가?” 내가 부정하는 반응에 그 제보자는 정말이라며 펄쩍 뛰었다.

1978년 4월 어느 날 서울역에서 암행 취재에 들어갔다. 매표소, 중앙홀, 공안실, 화장실, 광장, 인근 노점상 주변 등 곳곳을 유심히 살피며 돌아다녔다(당시의 서울역사는 지금은 복합문화 공간으로 바뀐 돔 건물이다). 처음엔 인파에 가려 뭐가 뭔지 분간이 안 되다가 얼마간 지나 문제의 암표 밀매 행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겉의 정황만으로는 안 된다. 인적 사항, 진술 등 철저한 확인이 필요했다. 여러 날 암표 밀매 행위 사례를 확보하고 사진기자와 함께 현장 증거도 잡았다. 사회부 데스크가 뒤탈이 우려됐는지 거듭 재확인을 지시하고 내용을 보완하느라 보도는 그 다음 달에야 나갔다. 서울역의 철도공안원 암표 밀매 행위가 한국일보 사회면 톱기사로 보도된 뒤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보도 내용(1978년 5월 14일자 한국일보 사회면 톱기사)을 대강 추려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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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공안원들이 암표를 팔고 있다
-본사 기자 한달간 추적 취재

편집자 주 : 철도공안원들이 암표를 팔고 있다. 정복, 정모에 완장까지 두른 공안원이 상습적인 암표 밀매 행위를 하고 있다. 암표 단속은 물론 열차 안팎의 질서 유지를 위해 사법권까지 갖고 있는 공안원들이 바로 그들의 집무실을 무대로 암표 장수를 스스로 하고 있다. 다음은 본사 기자가 서울역에서 한 달간 암행취재를 하며 목격한 철도종사원들에 의한 암표 밀매의 현장 고발이다.


지난 4월 24일 오후 4시께. 서울역 구내 공안실 문을 나서는 20대 청년 한사람이 있었다. 박만수씨(25·서울 용산구 도동). 장사일로 부산에 간다는 그는 “공안원으로부터 2,170원짜리 부산행 특급표 한 장을 4,000원에 샀다”고 숨기지 않고 털어놓는다.

박씨는 몇 분 전 특급대합실에서 매표창구에 ‘매진’ 푯말이 나붙은 것을 보고 서성거리다가 접근해온 공안원으로부터 “어디를 가느냐?”는 물음을 받았다. 부산에 간다니까 “표를 샀느냐?”고 다시 묻고 “없어서 못 샀다”니까 “남겨놓은 표가 있는데 따라오시오” 했다.
박씨가 공안원과 접선(?)하고 공안원을 따라 공안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기자는 멀리서 지켜보았다.

4월 28일 오후 2시께. 역시 공안실 문을 나서는 문모씨(여·45·부산 서구 대신동)는 “오늘밤 9시 40분발 부산행 특급 침대 하단표 2장을 3,000원을 더 얹어 11,000에 샀다”고 밝힌다. 서울서 대학에 다니는 아들을 보기위해 자주 서울에 온다는 문씨는 “서울에 올 때마다 공안원들에게 암표를 사는 단골이 됐다”며 멋쩍게 웃었다.

문씨에 의하면 처음에는 매표창구 근처에서 접근해온 공안원을 따라가서 샀으나 한번 요령을 알고 나서는 막바로 공안실을 찾아가기도 한다는 것. 공안실에서 암표를 사들고 신기한 표정을 짓거나 죄지은 듯한 표정으로 나오는 승객들은 하루에도 여러 차례 목격된다. 역구내 화장실로 데리고 가 직접 표를 거래하는 수도 있다.

이들의 암표 밀매는 평일엔 오후 1시에서 5시 사이, 토요일은 새마을 첫 열차가 떠나기 전인 아침 8시부터 성행한다. 주로 여객운임이 비싼 새마을, 우등열차, 특급 대합실에서 대상자를 ‘물색’하고 몇 마디 말을 건넨 후 공안실로 데리고 간다. 데리고 가다 다른 공안원에게 인계하기도 하는데 심한 경우는 직접 매표창구로 들어가 표를 꺼내 대합실에서 건네주기도 한다.

행선지별로는 부산행이 가장 많고 대구와 광주행도 종종 있다. 관광철 주말일수록 불티나기 마련이다. 공안원들은 특히 웃돈이 많이 생기는 부산행 고급열차 표를 암표로 많이 팔았다고 했다.

부산행 새마을호 열차표 4,190원짜리를 6,500원에 샀다는 30대 조모씨(서울 서대문구 북가좌동)는 접근해온 공안원을 따라가 공안실에서 암표를 샀는데 “당장은 편했지만 죄책감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지난해 여름휴가 때 요금의 2배를 주고 공안원한테 특급열차 암표를 샀다고 고백한 한 시민은 “죄책감이 들어 항상 마음이 어두웠다”며 “공안원 암표 행위는 사라져야할 사회범죄 행위”라고 말했다.

설, 추석 명절 귀성객이나 여름 휴가철에 서울역 광장은 열차표를 예매하려는 수많은 사람들로 종일 장사진을 이룬다. 엄동설한에, 무더위에 장시간 시달리며 표를 구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암표를 단속해야할 공안원들의 암표 밀매 행위는 정말 한심한 배신의 부정행위로 읽히지 않을까.

***


서울역 공안원들의 암표 밀매 보도가 나간 직후 철도청에선 한국일보 사회부에 “사실이 아닌 오보”라며 항의조 변명을 해왔다. 교통부 출입하는 선배도 사회부장에게 “교통부도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고 보고했다. 당시 <한국일보> 보도 지면엔 공안원이 매표창구 쪽에서 한 여성을 접촉해 공안실로 데리고 들어가는 사진 두 컷이 실렸는데 공안원이 “사진 속의 여성은 자기 친척 동생”이라며 기사가 허위라고 강력 주장을 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내에서도 오보 아닌가, 의심하는 눈초리까지 감지됐다. “손님 어디 가십니까” 등 대화 내용도 기록하고 확인을 다 했는데 친척이라고 오리발이라니. 그러나 사회부장은 “증거 다 있는데 괘념치 말라. 큰 문제 될까 봐 잡아떼는 것”이라며 격려를 해줬다. 사실 난 적잖게 심리적 스트레스를 받았다. 보도 건으로 검찰이 내 뒷조사를 한다는 말까지 경찰에서 흘러나왔다.

그런 얼마 후 철도청 직원들이 나에게 한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그 대강의 내용.
“<한국일보>에 게재된 철도공안원 암표 거래 기사를 읽고 온 국민에게 죄의식이 앞서 부끄럽고 창피한 감에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신문에 보도된 내용은 사실이며 그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미사로서 … 중략… ”, “서울철도청 공안원 조모는 공안업무는 등한시하면서 금품 갹출에만 혈안이 되어 서울역발 각급 특급열차의 차표를 업무상 접객용이란 구실 하에 하루 200매씩 사전 특배 받아 이를 이미 배치돼 있는 암표 관계 종사 공안원들이 종일 대상을 물색 또는 유인하여 차표를 밀매해서 본청 공안원에게 상납하고 나머지를 분배 착복했습니다. 이같은 행위의 재발을 막기 위해 관련자들에게 철추를 가해야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것은 부정행위로 지적한 내용의 일부인데 편지는 “신문 보도 후 조사담당자와 업무 관계관이 고위층에 허위 보고를 해 엄청난 사건을 유야무야하게 행정 처리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내막까지 폭로했다.

편지 받은 며칠 후 쯤인가 서대문경찰서에 들어섰는데 한 중년 남자가 날 보자고 했다. 근처 찻집에서 만났는데 철도청 간부였다. 다짜고짜 흰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나한테 주는 게 아닌가. 돈 봉투였다. 난 벌떡 일어서서 봉투를 그의 면전에 집어던지며 “정신 차리라. 문제 삼겠다”고 경고하고 나왔다. 철도청 직원들의 편지를 감지해 이 짓을 했던가 싶다. 신문 보도 다음 달엔가 문제의 서울역 공안원들은 전원 교체됐지만 그 윗선은 적당히 처리해버렸다는 것이다. 편지의 우려가 사실이었던 셈이다.

그해 추석을 앞두고 열차표 예매를 할 무렵 신문사에 소동이 났다. 철도청에서 언론사가 요청하는 귀성 열차표를 마련해 주지 못하겠다고 해 각 언론사 관련부처 기자와 철도청(또는 교통부) 간에 시비가 오가면서 갈등이 생겼다. 그간 관습적으로 설, 추석 철이 되면 관련 부처 기자들이 자사 내에서 열차표 주문을 받아 철도청에 요금을 계산해 주고 표를 받아 신청인들에게 전달해주곤 했는데 철도청의 ‘거부’로 이 관행이 깨진 것이다. 철도청은 <한국일보>의 공안원 암표 보도로 정화대책이 세워져 더 이상 언론사 주문을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각 언론사에서 <한국일보>에 대한 원망이 빗발치고 난 갑자기 미움의 대상이 돼버렸다.

공안원 암표 보도 이후 그 해 서울역에선 가난한 바닥 인생들이 된서리를 맞았다. 공안원만 정화하면 될 것인데 느닷없이 서울역을 정화한다며 서울역을 무대로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거 추방돼 버린 것이다. 가판, 좌판의 떡장수, 국수장수, 신문팔이, 냉차장수, 부채장수, 북장수 등 어렵게 살아온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사라졌다. 이 서글픈 현상을 보고 난 뭔가 죄지은 느낌이 들면서 공안원 암표 밀매 행위를 취재 보도하지 말아야했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사회엔 지금도 이런 서글픈 모순이 많다.

서울역은 2004년 민자 역사가 들어서면서 일제가 만든 기존의 돔 건물은 ‘복합 문화 공간 문화역 서울 284’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공연 전시 이벤트 행사, 카페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깨끗하고 번듯한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셈이지만 난 지금도 이 부근을 지나면 공안원 암표 행위의 어두운 그늘과 함께 서울역 정화 명목으로 삶터를 쫓겨난 가난한 인간 군상들이 서글픈 환영이 되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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