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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천(逆天)의 세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가[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19)] 이영록 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ㆍ노조 부위원장
  • 관리자
  • 승인 2017.02.2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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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幼年)에 만난 동아일보

내가 동아일보를 처음 만난 것은 국민학교(요즘의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면 단위의 한벽한 농촌이어서 신문 보는 집이 몇 안 되었는데 아버지는 고집스레 동아일보를 구독하고 계셨다. 도회지보다 하루쯤은 더디게 세상 소식을 접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동아일보를 받아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나름대로 가늠하셨던 것 같다. 뭐가 되겠다고 직접 나서본 적은 없었지만 골수 야당으로 찍혀서 항상 경찰의 주시를 받던 아버지셨다. 그 때문에 세무서원이나 경찰이 시도 때도 없이 집에 들이닥쳐 밀주 단속을 한다고 곳간을 뒤지거나 집안에 널려 있는 솔가지 등을 두고 산림법으로 걸겠다고 설쳐대는 바람에 곤욕도 숱하게 치렀다.

나는 어린 나이였지만 아버지가 보시는 신문을 등 너머로 보면서 세상을 조금씩 배워나갈 수 있었다. 요즘은 종합편집을 해서 좀 다르지만 당시에는 1면이 정치면이었고, 한글보다는 한자가 더 많아서 내 능력으로는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마다 모르는 한자를 아버지에게 물어서 익혔다. 중학교에 들어갈 때쯤에는 어지간한 한자는 거의 다 읽고 쓸 수가 있었다.

다소 과장일 수도 있지만 지금 내가 아는 한자의 8할 정도는 그 시절 동아일보를 보면서 익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신문 보는 것이 일과가 되다시피 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또래들보다는 더 많이 알 수 있었다. 또 동아일보와 다른 신문을 비교할 수 있는 눈도 갖게 되었다. 내게는 신문 하면 동아일보였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교지 편집을 맡기도 해 은연중에 신문기자, 그것도 동아일보 기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학생활 내내 가정교사를 해야만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고, 하루라도 빨리 직장을 가져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신문기자의 꿈을 접어버렸다. 대신 교직과목 이수를 통해 사회과목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땄다. 대학 졸업반 때인 1969년 가을 서울 시내 한 고등학교에 교생실습을 나갔다가 학교 측으로부터 교사가 되어달라는 권유를 받고 그 학교의 교사가 되기로 했다. 동시에 학업을 계속할 요량으로 야간과정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지역개발학과에 들어가려고 입시원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인생항로 바꿔버린 동아일보사 입사시험

그 무렵 지방에 있던 한 고등학교 선배가 동아일보사에서 기자를 모집한다는 얘기가 있으니 입사원서를 구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때 나도 모르게 시험이나 한 번 쳐볼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그래서 요즘의 고시원 비슷한 곳에서 한 방을 쓰고 지내던 고교와 대학의 선배 형더러 나도 한번 응시해볼까하고 지나가는 말처럼 건네 보았다. “경험삼아 한번 해보소가 그가 보인 반응이었다.

신문사를 지원하고 합격한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정말 경험삼아시험을 치기로 했다. 당시만 해도 전공 제한 때문에 문리대 출신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교사직 아니면 신문사 정도가 고작이었다. 유독 언론사만 전공 제한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지원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수험장인 중앙고등학교에 들어가자 동숭동 캠퍼스에서 마주쳤던 얼굴들이 태반이었다.

안 돼도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시험을 치르고 나서도 별 신경 안 쓰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소공동에 사무실이 있는 사촌형이 점심을 사주겠다고 해서 그 사무실에 들렀는데 마침 동아일보가 배달되어왔다. 1면에 게재한 1차 합격자 발표 사고가 눈에 들어왔다. 슬쩍 훑어보았더니 내 수험번호 비슷한 번호가 있었다. 자신이 없어서 신문기자 출신인 사촌형에게조차 시험이야기를 하지 못했었는데, 죄 지은 것처럼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그 길로 동아일보 사옥이 있는 광화문 쪽을 향해 뛰다시피 걸어갔다. 신문사 벽에 붙은 사고를 통해 나의 합격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문제는 2차 실기시험(기사 작성)3차 면접 시험이었다. 기쁨도 잠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준비 없이 덤볐다가 덜컥 붙어버렸으니. 생각 끝에 대학 시절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고교 선배 송경선 형을 찾아 시청 옆구리에 있던 남대문경찰서로 갔다. 그 무렵 그 형은 동아일보사 기자로 그곳을 출입처로 하고 있었다.

“‘리드를 잘 써라.” 송 선배의 첫마디였다. ‘리드라니? 나로서는 처음 들어 본 말이었다. 전문(前文)을 잘 쓰라는 얘기였다. 중요한 내용을 뒤에다 쓰게 되면 지면 제약 때문에 잘릴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와서 어쩌라고. 누굴 원망하고 푸념할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2차 시험을 거치고 3차 면접시험이 남았다. “왜 동아일보 기자가 되려 하는가?” 라고 물었다. “동아일보가 야당지이기 때문에 지원했다고 대답했더니 신문에 어디 야당지가 있고 여당지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순간 당황했지만 세상에서는 불편부당하고 공정하게 보도하는 신문을 그렇게 말한다고 임기응변으로 때우고 면접장을 나섰다. 처음엔 안되어도 그만이라는 생각이 이제는 붙으면 좋겠다는 쪽으로 바뀌었다. 합격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한 채 불안한 나날이 지난 끝에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6명을 뽑은 편집국 기자직에 우리 대학 출신은 나 혼자였다.

세월이 하수상한 탓이었겠지만 나의 기자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군부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 언론에 대한 통제가 극심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에 목말라 했던 한국의 언론인들은 때만 되면 각성했다. 그리고 좌절했다. 이런 일이 되풀이 되면서 한쪽에서는 어느 정도 자기 손상을 당하면서 지치고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이를 극복하는 길들을 암암리에 모색했다. 결국은 기자들이 단결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 방법 중의 하나가 노조를 결성하는 일이었다. 1974년 당시의 동아일보사는 보수 면에서만 보면 언론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었을 뿐 아니라 유수한 사기업에 비해서도 결코 낮지 않았다. 문제는 무엇을 먹고 사느냐보다는 어떻게 사느냐 였다. 언론인에게 생존의 제1조건은 임금에 앞서 언론의 자유였다. 그 해 봄 생겨난 우리나라 최초의 기자노조에서 나는 3인의 부위원장 중 한 명으로 뽑혔다. 그리고 노조 결성을 주도한 사원들은 해직과 복직의 과정을 거치면서 사주의 눈 밖에 났다.

김대중(DJ) 생환 사건 특종

1973년 여름의 일이었다. 이 해 8월 김대중(DJ)씨가 정보기관에 의해 도쿄에서 납치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동교동 자택에 생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나는 편집국 소속이었지만 지금은 없어진 동아방송의 사회문화부 기자로 교차 근무를 하고 있었다.

1973813일 밤 나는 야간 취재담당 기자였다. 2명의 기자가 한강을 중심으로 서울의 남북을 나누어 맡아 야간에 발생하는 사건과 사고에 대비하는 시스템이었는데, 그날 밤 나는 북부지역을 카버하고 있었다. 청량리경찰서에서 야간 취재를 하고 있는데, 1040분쯤 야근 데스크로부터 취재차에 달린 카폰으로 연락이 왔다. 내용은 도쿄에서 납치된 것으로 알려진 DJ를 동교동에 데려다 놨다고 하니 빨리 가서 확인 취재하라는 것이었다. 마감뉴스가 밤 11시였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경찰서 마당에서 대기하고 있던 취재차 운전기사를 채근해서 차를 동교동쪽으로 돌렸다. 밤늦은 시간이라서 인공 하천 공사로 지금은 없어진 청계천 3·1고가도로 위를 정말 총알처럼 달렸다. 10분도 채 안 걸려서 동교동 DJ의 사저에 이를 수 있었다. 시간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차중에서 송고할 기사는 대강 준비했다. DJ를 만나서 일단 간단한 코멘트만 받으면 된다. 대문이 열려진 채였고, 현관에는 신발들이 널려 있었다. 집안에는 어떻게 연락을 받았는지 비서진 등 몇몇 아는 얼굴도 보였다.

DJ는 안방 벽에 등을 비스듬히 기댄 채 눕다시피 하고 있었다. 입술은 부르텄고, 몹시 지친 표정이었다. 일단 그가 돌아온 것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그래도 내가 할 일은 해야 했다. 코멘트 말이다. “지금 어떠십니까?” “많이 피곤합니다. 좀 쉬고 싶습니다.” 나는 그 한마디만 듣고 바로 일어섰다. 마감시간에 대려면 빨리 기사를 보내야 했다. 동교동 집에 들어올 때 현관 안쪽에 걸려 있던 벽걸이 전화를 봐두었기 때문이다.

야근 데스크에게 기사를 불러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끊겼다. 다시 걸었는데 전화가 먹통이 되었다. 밖에 대기하고 있을 취재차의 카폰이 생각났다. 지금은 동아일보가 3등 신문이 되어버렸지만 당시만 하여도 독자들의 신뢰도에서는 물론 재정 면에서도 잘 나가는 신문사여서 취재 장비도 타사에 앞섰었다. 경찰 취재차에 카폰이라는 것을, 그리고 사건담당기자에게는 워키토키란 것을 일찍부터 지급해 취재 편의를 지원해 줄 정도였다.

신발들이 널려 있어서 내 신발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맨발로 자동차 있는 곳까지 뛰어가서 카폰을 집어 들었다. 카폰도 먹통이었다. 혹시 건물들에 막혀서 송수신이 안 되나 해서 기사를 독촉해서 그곳에서 100m 떨어진 신촌로터리까지 이동했다. 순식간에 이뤄진 일들이었다. 그러나 그곳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여름이긴 했지만 늦은 밤 시간이어서 외기가 그리 덥지는 않았는데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러닝셔츠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그러는 사이 차내 라디오에서 동아방송(DBS) 11시 마감뉴스가 막 시작되었다. 당연히 톱뉴스는 DJ 생환 소식이었다. 내가 대단한 노력을 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국내외 언론을 통틀어 처음 보도한 특종이었다.

미진한 취재를 더 하기 위해 동교동으로 되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8시에 시작하는 ‘DBS 뉴스쇼를 준비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DBS 뉴스쇼는 지금의 ‘MBC 뉴스데스크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가청지역인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에서 시청률은 물론 영향력이 대단했다.

내가 다시 동교동에 가서 보충 취재를 하고 있는 사이 서울 시내 각 신문. 방송의 야근 기자, 외신기자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동아방송의 11시 뉴스를 듣고 달려 온 것이었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는 그때 그 시간에 왜 동교동 전화는 물론 취재차 카폰까지도 송수신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물증은 없지만 어떤 외부의 힘이 작용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까지도 그 때 일은 내게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용산역 추석 귀성객 압사사건과 특종상

DJ 생환 뉴스를 특종한 지 1년쯤 뒤 용산역에서 추석 귀성객 압사사건이 일어났다. 1974928일 추석을 이틀 앞둔 날 저녁 시간이었다. 그날 역시 내가 야근을 맡는 날이었다. 사건. 사고보다는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는 귀성객 스케치가 더 중요한 취재였다. 서울역보다는 용산역 취재가 우선이었다. 서민들이 주로 애용하는 완행열차는 모두 그곳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나는 귀성객이라는 한자 투의 말이 신문이라면 몰라도 방송용어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을 찾는 사람으로 풀어서 방송을 했다. 그때 이후로 방송들이 귀성객 대신 이 표현을 널리 쓰게 되었던 것 같다.

초저녁 용산역 광장은 귀성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개찰을 기다리는 귀성객들의 줄은 끝이 안보였고, 경찰들도 질서 유지를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호루라기를 불어대고, 기다란 장대를 이용하여 그들을 자리에 앉히기도 했다. 용산역 스케치를 대충 마치고 지금은 리모델링하여 중앙대 부속 용산병원이 된 용산역 인근의 철도병원을 들렀다. 평소 야근 때 같으면 사건. 사고가 접수되는 경찰서 형사과나 다친 사람들이 실려 오게 되는 대학병원이나 적십자병원 등 주요 대형병원 응급실을 도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그날 밤은 뭐에 씌었던지 철도병원으로 발길이 갔다.

그런데 병원 입구가 소란스러웠다. 사람들이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귀성객들이었다. 좌석권이 없는 보통완행 열차라서 개찰이 시작되자마자 서로 먼저 타려고 좁은 구름다리 통로로 가는 계단 길에 한꺼번에 인파가 몰리면서 누군가가 넘어졌고, 그 위를 다른 사람이 덮치면서 순식간에 대형사고로 바뀐 것이다. 이 사고로 4명이 죽고 40명에 가까운 귀성객들이 다쳤다. 당시 일부 신문에서는 사상자들 거의 대부분이 여공이나 식모라고 보도했다. 둘 다 지금은 애써 쓰지 않는 말이다. 1970년대 우리 사회의 한 축도를 보여주는 슬픈 그림이었다. 어쨌든 기자로서는 운이 좋게 이 사건을 맨 먼저 보도하게 되었고, 이 일로 회사로부터 상도 받았다.

그때 사건담당 데스크는 내게 지난해 DJ 생환사건 특종 취재와 함께 몰아서 주는 상이라고 말했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너무 민감한 사안이었으므로 그 때 상을 줄 수가 없었다는 말을 사족처럼 덧붙였다. 그만큼 우리 언론도 사소한 일에까지 당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암흑시대를 지나왔었다는 반증이다.

Are You One of Seventeen ?

그러나 이같은 반동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은 역사의 교훈이다. 아무리 입에 재갈을 물려도 언론자유운동의 싹은 죽지 않고 숨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1974년 10월 24일의 ‘동아자유언론실천선언’이 그 대표적인 움직임이었다. 이 실천운동의 여파로 대대적인 광고탄압이 행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독자들이 보고만 있지 않았다. 독자들이 텅 빈 광고면을 의견광고로 채워주는 세계 언론 사상 유례가 없는 ‘백지 광고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석 달 가까이 계속된 이 사태를 정부와 회사 경영진이 그대로 방치할리 없었고, 마침내는 편집국 기자의 절반을 해고하는 이른바 1975년 ‘3·17 동아사태’로 이어졌다.

그 해 3월 17일 신문사에서 쫓겨난 우리들은 그 날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하고, 펜과 마이크를 빼앗긴 ‘거리의 언론인’이 되었다. 132명이라는 대량해직사태 이후 반년 동안에 걸쳐 아침마다 동아일보사 앞에서 신문회관(지금의 프레스센터)에 이르기까지 도열, 시위를 하면서 우리들의 원상회복과 자유언론 실천을 주창하는 활동을 이어갔다. 동아일보 사태의 진상을 내외에 알리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우리의 입장을 전하리는 유인물을 제작하여 우리 사회의 여론 주도층에게 나누어주는 여론투쟁에 나섰다.

나는 기자 시절에 주 출입처로 삼았던 연세대와 서강대, 이화여대 등이 있는 서대문. 마포 지역을 담당했다. 도열 집회를 마치고 오후 시간에는 그 대학들에 가서 기자시절 알고 지냈던 교수들을 찾아가 우리의 입장을 알리고 세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 우리 일에 관심이 많았고 심정적으로는 우리들을 지원해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어느 날 마포구에 있는 서강대로 박영기 교수를 찾아갔다. 노동경제학 전공의 박 교수는 그 무렵 이 학교 부설 노동연구소 소장으로 있었다. 마침 한 외국인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미리 약속을 하고 찾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냥 돌아서려 하는데 박 교수가 나를 불러 세우면서 그 외국인에게 뭐라고 나를 소개했다. 아마 동아사태로 해직된 기자라고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랬더니 그는 나더러 “Are You One of Seventeen?”하고 물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라서 좀 얼떨떨해 했는데 박 교수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박 교수는 그가 주한 미대사관의 문정관이라고 내게 소개해준 것 같았다.

Seventeen ? 당시 동아일보사는 경영난을 빙자하여 자유언론운동을 주도한 핵심사원이 포함된 4개부서의 기구를 폐지하면서 소속 사원 18명 전원을 해임하는 극단조치를 자행했다. 이에 대다수 사원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사측은 이 가운데 1차로 기자협회 동아일보 전 분회장 등 2명을 해임했다. 이어서 17명을 추가로 해임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추가 해임된 17명의 명단에는 내 이름도 들어 있었다. 이들은 1974년 당시 노조 결성에 앞장섰던 노조의 간부들이거나, 10·24 선언을 음으로 양으로 주도함으로써 회사 측이 소위 ‘강경파’로 분류해놓은 사원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분위기로는 부서를 폐지하고 해당 사원을 해임하면 동료 사원들이 극력 저항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다시 해고의 칼을 들어 문제의 사원들을 자른다, 그것이 사측의 노림수였던 것 같다. 당시 우리는 몰랐는데 주요 정보기관들은 물론 동아일보 사태를 예의 주시하고 있던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도 이 ‘17’ 이라는 숫자를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화여대생의 ‘동아해직기자 돕기 손수건’ 사건에 연루되어

그 무렵 우리 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들을 위해 이화여대생들이 손수건을 만들어 뜻을 같이하는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팔다가 사법당국에 잡혀 들어간 일이 발생했다.

1975년 6월 24일. 이날은 좀 특별한 날이었다. 동아투위 발족 백 일째가 되는 날인데다 동아투위가 미국의 A.D (Anno Domini 의 약자)지로 부터 ‘러브조이 자유언론상’을 받은 날이기도 했다. 이 상은 1837년 미국 일리노이주 엘튼에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기사를 썼다가 이에 항의하는 군중이 신문사를 습격했을 때 목숨을 바친 장로교 목사 엘라이자 패리쉬 러브조이를 기리기 위해 1973년부터 해마다 시상되었는데, 외국인이 받게 된 것은 동아투위가 처음이었다. 그것도 동아일보사가 아닌 펜과 마이크를 빼앗긴 거리의 ‘동아투위’에게.

수상식과 함께 정리 집회를 마친 직후인 오후 5시경, 나는 신문회관 어귀에서 미리 대기하고 있던 사복형사 2명에 의해 임의동행 형식으로 경찰에 연행되었다. 서대문 경찰서 소속이라고 밝힌 형사는 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은 채 잠깐 알아볼 것이 있으니 경찰서까지 가자고 말했다. 다음날엔 이태호 기자가 연행되어 왔다. 경찰서에 들어가서 알게 된 것은 우리가 대학생들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선동했다는 혐의였다. ‘동아돕기 손수건 사건’으로 명명된 이 일은 일부 이화여대 학생들이 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들을 돕는 방법을 의논한 끝에 그 중 하나로 손수건을 제작, 판매하여 그 수익금으로 그들을 도우려다 문제가 된 것이었다. 문제의 손수건은 학생들이 무리지어 뛰어노는 추상화와 논어의 <헌문(憲問)>편에 나오는 ‘邦無道危行言遜(나라에 도가 없으면 행동은 대담하게, 말은 겸손하게 하라)’이라는 귀절, 윤동주의 <서시>등을 각각 디자인한 것 등 4종이었다.

이 사건은 여대생이 일으킨 것으로는 첫 번째가 되는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경찰은 학생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압수된 문건(?)중에 들어 있던 동아투위의 유인물을 문제 삼았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으나 경찰서에 도착한 다음에야 안면이 있는 형사가 귀띔을 해주어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대생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동아투위 유인물이 발견됨으로써 우리 둘이 학생들을 뒤에서 선동하고 조종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와 이 기자는 해직되기 전까지 각기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로 그 대학에 출입했었다.

해직 전의 연고 때문에 우리 둘은 이화여대, 연세대, 서강대 등 서대문서나 마포서 관내의 학원가를 ‘출입처’로 하여 지면이 있는 교수들을 만나고 학보사 등을 통해 동아사태의 진상을 알리는 일을 해오던 터여서 두 사람이 수사선상에 오른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1주일이 지났는데도 풀려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흘러가면서 구속될 각오를 하고 체념을 하니까 마음이 편해졌다. 면회 온 아내에게 내가 구속되면 전에 시간 나면 읽어보려고 원서 외판원에게서 사두었던 Burns & Ralph의 영어원서 상·하권과 함께 영어사전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둘째 아이를 출산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얼굴에 아직 산후 부기가 빠지지 않은 아내는 작은 처남과 함께 계절 과일 참외를 사왔다.

아내 얼굴을 보는 순간 목이 콱 막혔지만 내색을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 둘째는 아기 때 잔병치레를 자주 해서 돌잔치도 제대로 못해줄 정도로 몸이 약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리고 태어나서도 엄마 마음고생 때문에 섭생이 원활치 못했던 탓이려니 생각하면서 늘 마음이 쓰였다. 그 아이는 별 탈 없이 장성해서 이제는 의젓하게 한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사회에 나가서도 제 몫을 하고 있어서 늘 대견스럽게 생각한다.

경위야 어찌 되었든 나와 이 기자는 영장 없는 구금상태에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보름 넘게 조사를 받은 뒤 7월 9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우리 해직언론인들을 돕겠다고 손수건을 제작해 팔았던 여대생들은 구속 기소되었고 몇몇은 징역살이까지 했는데, 우리만 풀려나서 학생들에게 미안하고 면목이 서지 않았다. 자유민주국가임을 내세우는 세상에서 언론자유 실천을 주장하는 것이,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일이 긴급조치라는 이름의 족쇄에 채워져 단죄 받아야 했던 역천(逆天)의 세월이었다.

내가 구금상태에 들어가고 앞으로의 신병 처리가 불투명해지자 주위의 여러분들이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썼다. 우리의 신병 처리에 시간이 오래 걸리자 가까운 친척 한 분이 중앙정보부 쪽에 알아봤더니 내가 DJ 계열로 분류되어 있어서 일이 쉽지 않겠다고 처가 쪽에 귀띔해주었다고 했다.

내가 DJ 계열이라고? 그들은 자기들 편리한대로 나를 DJ 사람으로 분류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내가 DJ가 도쿄에서 납치되었다가 생환된 일을 맨 처음 보도했고, 사회부 기자 시절 마포경찰서가 나의 출입처 중 하나였고, 동교동 또한 마포서 관할 구역으로 나의 취재 범위에 들어 있어서 동교동과 관련된 사건 취재를 한 적도 더러 있어서 나를 그렇게 치부해버렸는지 모르겠다. 구속되면 감방에서 보려 했던 그 영문 세계문화사 책은 지금껏 내 손때를 타지 못한 채 서가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아사히신문 외신면 톱기사가 된 ‘주간시민’ 폐간 소식

신문사에서 쫓겨나고 몇 달 동안은 실직에 대한 실감이 별로 없었다. 모든 것은 사필귀정이려니 하는 생각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실행해나갔기 때문에 그러했다. 바로 1년 전에도 노조 결성과 관련해 해직되었다가 딱 한 달 만에 원상으로 되돌아왔던 선행학습의 경험 때문이어선지 크게 불안하지 않았다. 더구나 뜻을 같이하는 동료 1백여명과 늘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도감을 주었는지 모른다.

처가에서는 ‘이대생 손수건’ 사건도 있어서인지, 또 언제 사법당국에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서인지 딸 걱정, 사위 걱정에 나와 처자식들을 처가로 데려갔다. 직장을 잃은 처지라 생활을 꾸려나가는 일도 만만치 않을 테고 해서 보호 겸 감시(?) 겸 우리 식구가 거처할 공간을 내 준 셈이었다. 처가살이가 내 팔자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시국이 더욱 얼어붙으면서 이런 저런 문제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급한 것이 생계문제였다. 각계의 성원으로 최소한의 생활을 꾸려나갈 수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모두 집안에서는 가장들이었기 때문에 생활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현실적인 과제로 고개를 들게 된 것이었다. 금방 원상태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판단에서 각자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복직될 때까지 버텨나가려면 적당한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구직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들은 절망적이었다. 누군가가 우리들의 취업을 방해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번번이 취업이 무산되었다. 외국은행 간부로 있던 손위 동서가 한 원양업체 간부자리를 주선해주었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좌초되었다. 그 회사의 오너와 동아일보사장이 절친한 관계였던 것이 취업 불발의 요인이라고 들려주었다. 내가 딱했던지 대학에 다니는 손아래 처남도 자기 친구가 유수한 기계공업체의 오너 아들이라면서 다리를 놓아주었는데 이 역시 막판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래도 뭔가는 해야 했다. 마침 이의직 선배가 잘 아는 출판사와 선이 닿아 방송극본 <광복 20년> 을 책자로 엮어내는 번안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끼워주었다. 인사동의 여관방에 틀어박혀서 그 일을 해서 푼돈을 받아 쓰기도 했지만 오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명동에 있는 향린교회의 안병무 박사가 운영하는 한국신학연구소 주선으로 월남 이상재 선생 전기 자료 수집(뒤에 전택부 선생 이름으로 출간) 등을 도와 생활비를 벌충하기도 했다. 안 박사께서 우리들을 돕기 위해 그런 프로젝트를 일부러 만들었던 것 같았다.

피아노를 전공했던 아내도 지인들의 소개를 받아 아이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해주면서 생활비를 보탰다. 당시 두 아이의 엄마였던 아내는 그 후 아이가 셋, 넷으로 불어날 때까지 혼자서 아이들을 기르면서 정말로 바쁘게 살았다. 나는 피곤해 지친 아내에게 “당신은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피아노스트야!” 하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눙치면서 미안함을 나타내곤 했다. 지아비를 잘 만났더라면 더 정진해서 나름 자기 성취감도 맛보면서 살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그게 무슨 위안이 되었을까?

그럭저럭 시간이 흘러갔지만 우리문제는 계속 숙제로 남고, 생활이라는 문제는 더욱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던 터에 이계익 선배가 편집책임자로 가 있던 <주간시민>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이 주간지는 어느 기업인이 발행하던 것을 중앙대학에서 인수하여 운영을 했고 이 선배가 책임을 맡으면서 동아 해직기자들 여럿을 불러 함께 만들었다.

당초 서울시정 홍보지로 태어나서 주로 서울시에 납품하다시피 한 이 주간지는 성격상 시정 관련 기사가 대종을 이루었는데 우리들이 참여하면서 지면에 적잖은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일반 종합지들이 애써 다루지 않던 노사문제라든지, 언론·출판문제, 광고 문제 등 다소 민감한 주제들을 발굴 취재했고, 사회적 발언에 앞장섰던 해직교수나 문화·종교계 인사 등 외부 필진들로부터 시론과 칼럼 등을 받아 싣거나 인터뷰기사 등을 실었다. 좁고 제약이 많은 운동장이었고 박봉에 일도 힘들었지만 모처럼 일할 맛을 느끼곤 했다. 우리들은 용산역 맞은편 시장 골목에서 칼국수와 쓴 소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즐거웠다. 그러나 그런 세월도 오래가지 못했다. 우리들을 주시해온 당국이 이 조잡하기 짝이 없는 주간지 하나도 그대로 놔두려 하지 않았다. 잡지의 논조가 달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주간시민>은 1978년 2월 무기한 자진(?) 휴간의 형식으로 사실상 문을 닫았다.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주간시민>의 휴간을 한국의 노동문제와 엮어서 2월 6일자 외신면 톱기사로 올렸다. 이 신문은 <주간시민> 의 휴간(사실상 폐간)에 대해 이렇게 보도했다.

“소식통은 노동문제의 보도에 힘을 쏟아온 편집방침과의 관계를 지적하고 있다. 동아일보에서의 자유언론투쟁으로 퇴사한 전 기자 여럿이 편집진에 가담하고 있다. 또 이 투쟁(자유언론투쟁)과 관련하여 동아일보를 그만 둔 송건호 전 편집국장, 대학을 물러난 한완상 전 국립 서울대 교수 등의 정기 칼럼을 게재해왔다. 게다가 밑바닥 노동자들의 실태를 묘사한 ‘소외지대’ 라는 고발시리즈를 연재해왔다.”

I' ll be back ! 한겨레신문 창간과 언론계 복귀의 꿈

내가 겪은 일은 다른 동아투위 동료들이 당한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더 험한 일을 당한 동료들이 수없이 많았다. 투옥과 고문 등을 당한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사망에 이른 경우도 적지 않고, 말만 가장일 뿐 가장 노릇을 못하고 생활고와 싸워야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살아남은 동아투위 위원 대부분은 먹고 살기 위해 언론과는 동떨어진 다른 일을 하면서도 40년이 가까워지는 지금까지도 언론인으로의 원상회복에 대한 꿈을 접지 못하고 있다. 내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8년의 한겨레신문 창간은 내가 언론계로 복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1987년의 ‘6·29 선언’ 이후 민주화 작업의 진행과정에서 그 공간을 빌어 국민을 주주로 하여 우리나라 언론사상 최초의 실험을 하게 되는 한겨레신문의 창간에 발의자와 발기위원의 한 사람으로 직간접적인 참여를 했다. 창간작업이 한창이던 어느 날, 지금은 고인이 된 송건호 선생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안국동의 한 건물에 있던 창간사무국으로 갔다.

우리들이 동아일보에서 쫓겨날 때 그가 편집국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늘 송 국장으로 부르곤 했다. 창간 사장을 맡았던 송 국장은 창간작업의 진행상황을 설명하면서 내게 편집국의 한 부서를 맡아주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는 했으나 미리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송 국장을 뵈었던 터라 바로 대답을 드리지 못하고 하루 이틀 생각을 해보겠다면서 그 자리를 물러 나왔다.

그의 제안은 나로 하여금 많은 고민과 갈등에 빠지게 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내가 언론현장을 떠난 십 수 년의 세월을 어떻게 뛰어 넘어 후배기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쳐 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엄청난 변화의 흐름을 감당하는 일이 너무나 벅차게 느껴졌다. 솔직히 그만큼 자신이 없었다. 의지와 의욕만 가지고 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또 하나는 생활인으로서, 여섯 식구의 가장으로서의 책임 문제도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일이었다. 수년 동안의 낭인 생활 끝에 가까스로 얻은 직장에서 겨우 안정을 찾아 모처럼 아비 노릇, 지아비 노릇을 해보려는 참인데 하는 생각이 나를 망설이게 했다. 이 아이들을 또 다시 박봉으로 키워내야 한다는 일은 용기 이전의 문제라는 자기 합리화의 목소리가 스멀스멀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쨌든 나는 한겨레 식구가 되지는 못했다. 어떤 것이 딱이 그 이유가 되었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하룻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하고 참여하지 않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송 선생께는 정말 죄송스러운 일이었지만 첫 번째 이유를 들어 양해를 구했다. 당시의 내 결정이 옳았는지 아니었는지는 지금도 가늠하기 어렵다.

1978년 3월 20일 나는 한 경제단체의 직원으로 취직을 했다. 그곳에서 나는 그런 말을 했다. “이곳에 앞으로 딱 1년만 있다가 신문사로 돌아가겠다”라고. 그 때는 그러한 비정상적인 상태가 이렇게 오래도록 계속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내 말을 지키지 못했다. 그 후 20여 년 동안 그 직장에서 직원으로 일하다 정년을 맞았고, 또 임원으로서의 임기를 마치고 은퇴했다.

지금부터 34년 전, 그곳에 배달된 동아일보 경제면에 이 단체의 조사부에서 발표한 기사가 한 줄 났었다. 그 사람들은 그 1단짜리 기사를 보고 “아, 동아일보에 우리 기사가 났다!” 고들 좋아했다. 부자 망해도 3년은 간다고 그 때까지만 해도 동아일보의 성가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아직도 그 동아일보에 돌아가고 싶다. 단 하루라도 편집국 한켠 내가 있던 자리에 가서 앉아보고 싶다. 42년 전 신문사 선배가 내게 그랬듯이 수습기자가 밖에서 보내오는 기사라도 고쳐주면서.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어 3등 신문, 찌라시 신문으로 불리는 그 신문 제작의 현장에 서서 왜 그 신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지금의 동아일보 사람들과 얘기해보고 싶다. 그것이 비록 내 가슴을 찌르는 비수가 될지라도. I' ll be back ! 이것은 Beatles 의 노랫말이 아니다.

추기(追記) : <‘바보’ 클럽> 동아일보 입사 12기 이야기 

내가 동아일보사에 수습기자로 들어간 것이 1969년 12월 15일이니까 입사를 기준으로 하면 어느새 43년이 되었다. 그해 함께 세종로 139번지 동아일보사에 기자직으로 둥지를 튼 12기 동기생은 편집국 여섯, 출판국 셋 등 모두 9명. 우리 9명 모두는 시차는 약간씩 달랐지만 동아일보 사태 이후 전원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동아투위 위원 가운데 동기생 전원이 함께 신문사를 떠난 것은 아마 우리 12기가 유일할 것이다. 우리가 특별히 투쟁적이거나 무슨 강경파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도 사내에 내응할 교두보도 만들어 놓지 않은 채 전원 회사 밖으로 밀려났다. 그만큼 우리 12기 모두가 시류에 영합 못하는 순진한 ‘바보들’이었는지 모른다.

우리들은 해직 이후 이런 저런 핑계로 자주 만났다. 특히 입사일자인 12월 15일 이날만은 어김없이 자리를 함께 해왔다. 그것도 부부동반으로. 그런데 해가 갈수록 이 자리가 더욱 초라해지고 있다. 세월 탓도 있겠지만 다른 기수들보다 수적으로 적은데다(10·11기는 20명 안팎이다) 자꾸 빈자리가 생겨난 탓이다. 편집국 입사 동기생 6명 가운데 2명이 이미 세상을 떴고, 한 사람은 득병하여 20년이 다 되도록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절반의 동기가 유고상태인 셈이다. 2009년에는 조촐하지만 부부동반으로 40주년 모임도 가졌다. 부부동반이라지만 짝 없는 이가 하나 둘 늘어나다보니 그렇게 즐겁기 만한 자리가 못 되었던 것 같다.

1974년의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당시 선언문을 낭독했던 홍종민 위원은 동아투위 총무를 맡아 온갖 궂은 일을 도맡다시피 했다. 그 바람에 영어의 몸이 되었고 수감 중에 얻은 심장병이 악화되어 1988년 4월 20일 세상을 떴다. 그가 타계한 후 우리 동기생 부부들은 그의 기일이면 그가 묻혀 있는 용인 천주교묘지를 찾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좀 뜸해져서 마음이 편치 못하다.

김진홍 위원은 해직 이후 출판사를 운영하면서도 틈을 내어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82년 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평소 ‘자유언론’이라는 주제를 천착해온 그는 언론현장의 경험을 신문학 이론에 접목시킴으로써 제자들에게 언론학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평소 공사를 넘어 분주하게 활동했던 그도 건강을 잃어 지난 2009년 7월 심장마비로 급서했다.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그의 지도를 받았던 후학들은 최근 생전에 그가 쓴 글들을 모아 유고집 <아카저널리스트(Acajournalist)> 를 펴내고 그의 학문적 성취를 기렸다.

입사 직후부터 뛰어난 글 솜씨며, 영ㆍ독ㆍ불ㆍ일어를 넘나드는 출중한 외국어 구사능력 등으로 주위로부터 ‘국 천재’로 불렸던 국흥주 위원은 해직 이후 경제단체, 출판계, 증권업계 등에서 실력 발휘를 하면서 동아일보 사태의 해결을 기다렸다. 모든 것이 여의치 않게 흘러가자 1991년 말에 창간한 문화일보에서 편집부국장과 논설위원으로 심혈을 쏟다 병을 얻어 쓰러졌다. 지금까지 스물두 해가 다 되도록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역시 우리들이 자주 찾지 못해 미안한 마음뿐이다.

김동현 위원은 해직과 거의 동시에 일자리를 얻어 비교적 생활고는 적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 죄(?)로 동기생들 모임 때에는 술값, 밥값을 앞장서 치러버리는 바람에 우리를 늘 미안하게 했다. 지금은 그동안 기업의 홍보부서와 광고단체 등에서 몸으로 체득한 홍보와 광고 실무와 이론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느라 바쁘다. 연전부터 동아투위의 총무를 맡아 지금은 위원장을 도와 국가 상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하느라 동분서주하고 있다. 젊은 날 타고 난 동안 때문에 동기생들로부터 ‘귀여운 베티’로 불렸던 그도 공사다망해서인지 흰머리가 자꾸 늘어나고 있다.

외유내강형의 임부섭 위원은 한동안 허리 디스크로 고생을 했지만 특유의 의지력으로 이를 극복하고, 친지의 소개로 들어간 한 대기업에서 십 수 년 동안 홍보업무를 전담했다. 그 기업을 나와서는 그곳에 근무하던 때의 경험을 살려 을지로 인쇄골목에 자그마한 편집회사를 차렸다. 돈 벌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지만 문 닫았다는 얘기도 없었는데, 근자에는 힘이 들어서 접었다고 한다. 그곳에 가면 소주병은 무한정 리필이었는데 호주가들이 좀 아쉽게 되었다.

해직 후 <창작과 비평> 추천을 거쳐 시인으로 등단한 이종욱 위원은 출판문화계를 두루 섭렵하다 한겨레신문 창간과 더불어 언론인으로 복귀했다. 나중에 문화일보 논설위원을 지내다 지금은 파주의 헤이리 마을에 칩거하면서 부인과 함께 ‘반디’라는 북카페를 열어놓고 소일하고 있다. 드문드문 시를 쓰면서 장기인 외국문학 번역 일도 함께하고 있지만 생업으로는 가당치가 못한듯하다.

김양래 위원의 해직 뒤 생활 역정도 신산하기는 여느 동아투위 위원과 다르지 않았다. 한 때는 광화문 쪽에서 친구가 운영하는 슈퍼마켓 일을 거들다가, 한겨레신문 창간작업에 합류했. 그곳에서는 기자의 본령과는 거리가 있는 사업부서의 간부로 일하다 퇴직했다. 오랫동안 동아투위 총무를 맡으면서 타고난 봉사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내로라 하는 산악인이기도 한 그는 한때 동아투위 등산모임인 ‘요요회’의 등산대장을 맡아 회원들의 산행을 챙겼다. 숲 해설가 자격을 얻은 그의 봉사하는 삶은 오늘도 이 땅 어느 산야에서 이어지고 있을 것이다.

12기의 홍일점 유영숙 위원은 해직 후 일단 전업주부가 되었지만, 타고난 문재를 어쩌지 못해 뒤늦게 소설가로 데뷔했다. 그것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당당하게 당선된 것이다. 후속작에 대한 얘기는 듣지 못했지만 계속 정진하고 있을 줄 믿는다. 추석명절을 바로 앞둔 2010년 9월 16일에는 시인 고은 선생의 주례로 딸 장혜지를 시집보내는 경사를 맞았다. 고은 선생은 혜지의 이름을 지어준 인연으로 주례를 맡게 되었다고 한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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