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언론역사 동아투위사람들
우리는 유신독재에 이렇게 저항했다[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18)] 성유보 전 동아일보사 편집부 기자ㆍ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대표
  • 관리자
  • 승인 2017.02.20 12:21
  • 댓글 0

나는 1943년, 경북 경산에서 농사꾼의 3남으로 태어났다. 8남매(4남 4녀)를 먹여 살리랴, 학교 보내랴, 허리가 휘신 아버님께서는 나에게 평소에 “판·검사가 되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평범하던 청소년이었다. 그러던 고등학교 2~3학년 때에 태풍이 몰아쳤다. 4월 혁명이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4월 혁명은 대구의 한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데모에서 시작되었다. 그 데모는 후일 ‘1960년의 ‘2·28 대구학생의거’라고 불리게 되었다.

1960년 봄은 정·부통령 선거의 해였다. 투표일은 3월 15일이었다. 선거일을 보름 앞둔 2월 28일은 일요일이었다. 학교에서 갑자기 ‘일요 등교지시’가 떨어졌다. 이 날은 당시 민주당의 부통령후보 장면이 대구 수성천변에서 선거유세를 하는 날이었다. 당시 이승만의 집권여당은 선거유세에 시민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별별 방해를 다 하면서 투표권도 없는 고등학생까지 혹시 유세장에 갈까봐 두려워 했다. 핑계들이 걸작이었다. “학기말 시험이다”, “토끼사냥이다”, “임시수업이다”라는 등 등교 지시의 이유가 가지가지였다.

“어른들의 세계 따로, 우리 청소년 세계 따로”라고 생각하던 평범한 범생이었던 나에게 일요일 등교 지시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학생들은 “무엇 때문에 투표권도 없는 우리 학생들이 어른들의 정치노름에 이용물이 되어야 하는가?”라고 선생님들에게 따졌다. 그런데 그 철모르는 고등학생 세계에도 ‘이미 의식화된’ 선구자들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경북고 학생회 부위원장 이대우 군을 비롯한 몇몇 고등학생들은 대구시내 여러 고등학교 학생회 간부들과 함께 항의데모를 하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그들이 함께 작성했다는 ‘2·28결의문’은 참으로 선동적이었다.

“백만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는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서는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들의 기백이며 이러한 행위는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피 끓는 학도로서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련다.”

2·28 데모를 발단으로 하여 3·15 선거일까지 전국 여러 곳의 고등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3·15 마산 시민 의거. 4·18 고대생 데모. 전국적인 4·19 데모. 4·25 교수단 데모를 거쳐, 4월 26일 대통령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나왔다. 이승만 12년 독재는 막을 내렸다.

4월 혁명은 나에게 커다란 정신적 변화를 안겨 주었다. 그 변화는 실로 ‘혁명적’이었다. 4월혁명은 당시 청소년기의 내가 ‘독재자와 독제체제는 왜 생기는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때 어떤 책에서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 한다”라는 구절을 읽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민주화를 위해 내 힘을 보태겠노라”라고 다짐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는 앞으로 어떤 경우라도 독재자나 독재체제의 동조자가 결코 되지 않겠다”고. 내가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를 지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나의 대학생활과 사회 초년병 시절

대부분의 신입생이 경험했겠지만, 대학생활이란 난생 처음으로 해방감을 맛보는 시기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해방감을 거의 누려보지 못했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교정은 서울 동대문구 동숭동에 있었는데 문리대생들은 교정의 오래된 마로니에 나무를 큰 자랑으로 여겼고 많은 학생들은 그 나무그늘 밑에서 웃고 떠들고 토론하기를 즐겨했다. 대학생활의 낭만이 막 시작되던 무렵, 정확히는 1961년 5월 16일, 육군소장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대학은 문을 닫았다. 얼마 안 있다가 학교는 다시 문을 열었지만, ‘반공을 국시’로 하는 박정희 군사독재 아래에서 인문·사회과학은 죽은 학문이 되어버렸다. 낭만도 토론도 논쟁도 사라졌다. 교수들은 진리와 사상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인문·사회과학을 자유롭게 강의할 수 없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제대로 배울 것은 별로 없었다. 문리대의 많은 학생들이 술독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 와중에 박정희 정권은 한일회담을 시작했다. 한일회담은 참으로 굴욕적으로 진행되었고 대학생들은 1964년 전국적으로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벌였다. 나도 한일회담 반대 각종 데모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의 순수한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군대를 동원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학교는 문을 닫았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구속되었다. 한일 수교협정은 국민들의 반대의사에도 불구하고 강행되었고 데모에 놀란 박정희 정권은 공안정치와 정보정치를 강화해 갔다. 나의 대학생활 4년은 덧없이 흘러갔다.

졸업 후 육군 보병으로 군대를 다녀온 나는 사회생활의 진로를 고민했다. 그때 대학 친구들이 “언론인이 되는 게 어떤가?”라고 권유했다. “언론은 사회의 목탁”, “민중의 알 권리의 대변자”, “무관의 제왕” 같은 격언처럼 진정한 언론인이 되면 군사독재의 부정부패, 인권탄압 등을 일상적으로 비판하고 감시할 수 있으니까 한 번 도전해 볼만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1968년 동아일보 수습기자 제11기 시험에 응시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그러나 독재체제란 ‘힘(경찰력이든 군사력이든, 그 어떤 무장집단이든 간에)이 말하는 사회’이지, ‘말로 풀어가는 사회’가 아니었다. 독재시대의 언론인은 독재권력에 굴복하고 아부하든지, 아니면 독재 권력에 핍박받고 광야로 쫓겨나거나 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 수습기자 11기생들은 동아일보사에 막 출근하던 1968년 11월에 천관우 주필 등 세분이 월간 <신동아> 11월호의 ‘차관 도입’ 특집기사로 때문에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받고 그 뒤끝에 천 주필이 사임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다. 나는 그때 동아일보 기자로서 나의 운명의 예고편을 이미 본 셈인데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 했다. 박정희 정권은 1967년부터 모든 언론사에 중앙정보부원과 경찰의 정보형사들을 출입시키기 시작했다. 잇단 ‘기사 협조’라는 이름의 압박으로 정치·경제·사회적 정책기사는 제대로 보도되지 못했다.

일선 기자들은 ‘취재가 제대로 안 되니까’, ‘취재를 했더라도 데스크들에 의해 원고가 곧바로 쓰레기통에 들어가서 기사가 신문·방송에 별로 보도되지 않으니까’, ‘재수 없으면 몰래 정보기관에 끌려가 심한 고통을 겪으니까’, 취재하러 신나게 돌아다닐 이유가 없었다. 무료해진 기자들은 출입처에서 받은 ‘촌지’로 주로 포커판에 매달렸다. 그리고 저녁에는 ‘촌지 뒷돈’으로 술판을 벌여 곤드레만드레가 되었다. 우리 대학생 시절에도 ‘술판’, 언론사 시절도 ‘술판’이 주름잡게 되었다. 1970년대 언론인 사회는 ‘술 중독의 사회’였다.

원래 술도 못 마시는데다 취재부서에서 ‘포커를 하거나 낮잠 자기’가 싫어서 나는 내근부서를 지망했고 편집부로 발령받았다 나는 동아일보 기자생활 6년 동안 편집 일만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6년 동안 나에게는 스포츠면과 문화면 편집만 주어졌다. 정치·경제·사회면은 독재정권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선 취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기자생활이 독재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결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유신독재’의 공범이 되어버린 언론사 사주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다시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특별선언’을 통해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키는 한편 현행 헌법의 일부 기능을 중단시키고 전국에 계엄을 선포했다. 박정희는 이 ‘친위쿠데타’를 통해서 ‘유신헌법’과 ‘유신체제’를 탄생시켰다. ‘유신체제’는 그나마 존재해오던 제도적 민주주의를 모조리 내팽개치고 박정희의 ‘1인 영구집권 전제정치”를 완결시켰다.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는 민의를 묻는 투표가 아니라, 국민들에 대한 ‘유신독재 순응교육’의 일환이었다. 민주주의는 질식사 해버렸다.

박정희 누구보다도 먼저저 언론사 사주들을 ’유신독재‘의 공범자로 만들기 시작했다. ‘유신 헌법안’이 공고된 바로 다음날인 1972년 10월 28일 동아일보사 1면에는 다음과 같은 사고가 실렸다.

새 헌법안에 대한 성명서

한반도를 에워싼 아시아의 판도는 걷잡을 수 없는 복잡성을 내포한 채 격동과 변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렇듯 긴박한 정세속에서 자위태세의 강화와 함께 우리의 활로를 스스로 개척하고 민족의 지상과업인 조국의 평화통일 달성을 과감하게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국내체제의 유신적 개혁과 전 국민 총화에 의한 굳은 민족의 단결이 필연적으로 요청되고 있다.

10월 유신은 이와 같은 명제에 대한 민족적 결단인 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27일 공고된 세 헌법안은 우리 국민이 국가의 진운과 시대적 사명을 다 같이 짊어지고 전진해야할 선택된 길임을 확신, 우리 신문협회 회원 일동은 전국적으로 지지하는 바이다.

바야흐로 국제권력정치가 빚어내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격랑은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역사창조의 과업을 안겨 주었다. 이에 따라 결단된 ‘10월 유신’은 우리 민족의 진로를 스스로 개척하는 주체적 결단이다.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민족의 의지를 한결 높이 선무한 것이다.

책임과 의무가 자유에 선행하는 민주주의,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새로운 차원의 민주주의를 이 땅 위에 토착화시켜야 할 것은 물론, 분산된 힘을 집약하여 최대한으로 신장하고 비생산적인 요소를 배제하여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의 능률을 가속적으로 상승시켜야 한다.

새로운 이념, 새로운 의지로서 안정의 기저를 다시 다지고 빛나는 번영을 지속시켜 우리의 역사 속에 약동하는 생명의 새로운 기원을 기록해야 한다.

이에 우리 신문협회 회원 일동은 시대적 사명 앞에서 새로운 역사창조와 국가의 명운을 개척하는데 앞장설 것을 온 국민 앞에 천명하는 바이다.

1972년 10월 28일
한국신문협회
동아일보사


이와 거의 비슷한 내용의 성명서가 그 날 한국 방송협회와 KBS, MBC, TBC, 동아방송 등 각 방송사 연명으로 발표되었다.

학생과 재야의 유신 반대 운동과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박정희가 전제적, 제왕적으로 국민 위에 군림한 첫 번째 해인 1973년부터 대학교, 종교계, 재야인사들의 ‘유신체제’ 반대운동이 일기 시작했다. 그해 10월에 들자 서울대 학생들이 유신을 반대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박정희 정권은 저항의 확산을 두려워하여 시위관련 보도를 엄금했다. 언론사들은 정보기관들의 ‘협조 요청’에 거의 순응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가자 전국의 대학생들이 유신반대 데모, 또는 동맹휴학을 전개하면서 구속학생 석방, 언론자유와 학원자유 보장, 학원 내 기관원 출입 금지 등을 요구했다. 그 후 학원과 종교계, 재야운동 할 것 없이 모든 민주화운동 세력의 주장 속에는 “언론자유를 보장하라”. “언론인과 언론사들은 각성하라”라는 요구가 단골 메뉴처럼 되었다.

동아일보사의 젊은 언론인들은 그런 상황을 맞아 “언론의 자유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언론의 자유를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언론자유란 언론인이나 언론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것이며, 그것은 민주사회를 위한, 민주시민과 함께 어께를 나란히 해야 하는 민주, 민족, 민중을 위한 포괄적 자유권의 하나”임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재야에서 ‘개헌청원 서명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자,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월 초 ‘긴급조치 1, 2호’를, 전국적인 대학생들의 유신반대, 민주화요구 집회 시위를 잠재우기 위해서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긴급조치가 잇달아 발동되고 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들이 송두리째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가는 사태가 거의 매일 일어나자, 기자들은 개개인의 양심적 각오만으로는 언론의 자유를 결코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자기 기사가 쓰레기통에 들어갔다고 해서 기자 개개인이 부장, 차장, 또는 편집국장에게 대들 수 있겠는가?

단결이 필요했다. 노동조합이 필요했다. 이리하여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1974년 3월 8일 33명을 발기인으로 한 ‘출판노조 동아일보사 지부’를 결성하게 되었다. 단결된 목소리만이 언론자유운동의 지름길이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당시 무엇 때문에 노동조합을 만들려 하는지를 모를 정도로 둔감한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들은 없었다. 노조가 결성되면 조만간 ‘유신독재’에 대한 언론계의 저항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못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함에도 노조 결성 1주일 만에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 170여명이 노조에 가입한 것은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었다.

노조의 힘을 바탕으로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기자협회 동아일보분회를 개편하고(분회장에 장윤환 문화부 선임기자), 전국 기자협회 회장에 동아일보보 문화부의 김병익 기자를 추천해 당선시켰다.

1974년 10월 24일의 동아일보 ‘자유언론실천선언’은 동아일보사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 등이 7개월 동안 힘을 모아고 준비함으로써 가능했다. 그것이 자유언론 실천선언이 단 한 번의 성명서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전개된 원동력이었다.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민주사회를 유지하고 자유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기본적인 사회기능인 자유언론은 어떠한 구실로도 억압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회복이 주장되고 언론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 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신문, 방송, 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 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1. 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도 불법 연행이 자행될 경 우 그가 귀사 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기자 일동

자유언론실천운동과 유신독재의 대결

자유언론실천운동은 첫 날부터 선언문의 보도 여부를 둘러싸고 당시 동아일보사 사장이던 김상만사장과 충돌하게 되었다. 사주 측은 선언문 내용을 일체 보도할 수 없다고 막았다. 기자들은 제작 거부로 맞섰다. 1974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는 자정이 넘어서야 제작되었다. 동아일보는 당시 석간신문이었던 만큼 10월 24일자는 결간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 1단벽 깨기 운동과 왜곡된 뉴스용어 바로잡기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기자들의 힘에 의해 ‘보도 금지의 성역’이 사라지자 데스크들은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큰 뉴스나 작은 뉴스나 모두 1단짜리 기사로 간략하게 보도했다. 말하자면 5,000명이 데모하든 500명이 데모하든 1단짜리 기사로 내보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를 ‘1단벽“이라고 불렀고 처음 한 달은 이 ‘1단벽’ 깨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즈음인 1974년 11월 11일 명동성당을 비롯한 전국 14개 성당에서 일제히 ‘인권회복 기도회’가 열렸다. 기자협회 동아일보분회 자유언론실천특위는 이 뉴스를 1면 톱이나 사회면 톱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회사 측은 이를 거부하고 사회면 3단 정도로 다루려 했다. 동아일보는 다시 휴간되었다. 12일 휴간 후 당시 편집국장이던 송건호는 “내일부터는 언론인의 양식에 따라 정상적인 신문 제작을 할 테니 믿어 달라”라고 호소하고, 인권회복 기도회를 사진과 함께 사회면 중간 톱으로 보도하겠다고 제안했다. 제작 거부는 일단락되었다. 이후부터 최소한 ‘1단벽’은 깨어졌다.

2) 왜곡된 뉴스용어 바로잡기

박정희 유신독재의 정보기관과 홍보기관들은 뉴스용어 왜곡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던 모양이다. 그들은 학원데모를 ‘학원사태’로, 물가 인상을 ‘물가 현실화’로, 공공요금 인상을 ‘공공요금 재조정’으로, 임금 동결을 ‘임금 안정’으로, 중앙정보부나 보안사령부를 ‘모 기관’”으로, 부정부패를 ‘사회 부조리’”로, 국가재산 불하를 ‘민영화’로, 세법 개정을 ‘세제 개혁’으로 둔갑시켜 정책을 발표했다. 당시 언론들은 유신정권이 발표하는 대로 용어를 베껴 썼다.

당시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나섰던 동아일보사 기자, 동아방송 아나운서와 프로듀서들은 이러한 용어들이 주권자이자 언론 소비자인 국민들의 입장에서 원상회복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러한 입장에서 기사와 해설을 썼고, 데스크들에게 원상회복된 용어들을 ‘유신정권’의 입맛대로 왜곡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3) 동아일보 사주, 자유언론실천특위 해체 요구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11월 12일의 제작 거부 사건을 계기로 ‘기협 동아일보 분회 자유언론실천특위’의 해체를 요구했다. 기협 분회는 이를 거부했다. 11월 23일, 회사 측은 “사내에서 특위 모임을 갖지 말라”는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분회장을 비롯한 28명의 기자를 감봉 처분했다.(본인도 이 23명에 포함되어 있었다.)

4) ‘유신독재’, 동아에 대한 광고탄압 시작하다

박정희 유신독재는 동아일보 사주와 경영진이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하자 사주를 확실히 굴복시키기 위해서 신문, 잡지, 방송에 대해 기업 광고주들이 일제히 광고를 못 내게 만들었다.

·12월 16일, 박 정권, 광고 탄압 시작.
·12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등에 대한 무더기 광고 해약사태 밀어닥침.
·기자들, 빈 광고란을 기사로 채우지 않고 백지광고로 대처할 것을 결의.
·74년 12월 30일, 원로 언론인 홍종인, 격려광고 첫 테이프.
·1975년 신년호에 천주교정의구현 전국사제단, 신민당 등이 격려광고를 냄.
·이후 전국 각계각층의 격려광고 봇물을 이룸.

박정희 정권에 끝내 백기 투항한 동아일보사 사주

1975년 2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발행인 교체설과 함께 광고탄압 사태가 곧 해결될 것이라는 추측성 소문들이 나돌았다. 간부들은 노골적으로 시사적 프로그램을 축소 또는 변질시키기 시작했다. ‘민청학련과 인혁당 인사들’에 대한 고문 폭로는 축소 보도되었고 또다시 용어 왜곡이 시작되어 고문은 ‘가혹행위’로 신문 좌측 상단의 이른바 ‘로열박스’에는 박정희 관련 동정기사가 연일 보도되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찾아와 격려광고를 내는 광고자들의 문안을 회사 측이 일방적으로 심의해서 고치기 시작하자 격려 광고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75년 2월 28일, 동아일보사 정기 주주총회가 열렸다. 주주총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① 일부 사원들의 거듭되는 사규문란 행동을 주시하면서 모든 방법을 다하여 조속히 사내의 질서와 기강을 확립할 것을 요망한다.
② 경영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하여 불요불급한 사업과 기구를 정비하고 기타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하여 경영을 합리화할 것을 요구 한다“고 결의했다.

1971년 봄 회사를 떠났다가 3년 만에 주필로 돌아온 이동욱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① 주주총회의 권한이나 이사회의 권한에 도전하는 언사나 행동은 용납할 수 없다.
② 위계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언사나 행위는 용납할 수 없다. 특히 부차장, 국장단, 이사나 사장 등에 대한 싸움조의 언사, 야유조의 언사는 용납할 수 없다.
③ 신문과 방송의 재작과정에서 몇몇 사람의 의견을 채택하라고 강요하면서 집단적 폭력행위를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④ 회사 내 무허가 집회는 근무시간과 관계없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용납할 수 없다.
⑤ 회사 내에서 무허가 유인물을 배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동아일보사의 주주총회와, 그에 따른 이동욱의 ‘회사 내 계엄령’은, 동아일보사가 기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박정희 정권에 항복한 것임을 내외에 천명한 것이었다. 그는 동아일보사를 군대식 복종체계로 만들겠다고 박정희에게 ‘충성서약’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75년 3월 5일, 동아일보사 경영진은 인사규정과, 복무규정을 개정해서, “회사의 허가 없는 집회나 무단 유인물 배포를 금지한다”는 조항과, “기구를 폐지하거나 회사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는 사원을 해임할 수 있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3월 8일, 기협 분회 집행부가 새 기협 분회장을 뽑기로 한 바로 그 날, 회사 측은 기구축소라는 명목으로 노조 지부장 조학래를 포함한 18명의 기자들을 해고한다는 방을 붙였다. 그날 저녁 열린 기협 분회 총회는 예정대로 새 분회장에 문화부 차장 권영자를 선출한 후 긴급 기자총회를 열어, “기구축소가 경영난 때문이라면, 분회원들의 봉급을 깎아서라도 동료사원 18명을 구제해 주도록 회사에 건의하고, 이 건의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신문, 방송, 잡지의 제작은 계속하되 밤에는 농성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회사 측은 3월 10일 또다시, 새 분회 집행부에서 실천특위 상임간사를 맡은 장윤환과, 외신부 기자 박지동을 해고했다.

새 집행부는 3월 12일, 긴급모임을 갖고 ‘자유언론 실천 백서’를 발표했다. 백서에서 기협 분회는 “① 경영진에게 자유언론을 위한 기자들의 몸부림을 위계질서를 깨뜨리는 행위로 인식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초래할 것임을 경고하고 ② 우리 기자들은 언론모리배, 언론정상배 밑에서 곡필을 휘두르는 무기력한 기자로 동화되기보다는 신음하는 국민의 편에 서서 양심의 수인(囚人)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일제히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그날 회사 측은 밤 11시에 새 기협분회장 권영자를을 포함하여 제작거부에 들어간 17명의 기자를 추가로 해고했다.

동아일보는 부·차장들과 일부 사측 기자들의 합류 속에 출판국에서 편집하고 인쇄는 조선일보사, 한국일보사, 신아일보사 등을 전전하면서 초라하게 발행했고, 동아방송은 영등포 오류동 송신소에서 음악만 내보내는 변칙방송을 했다.

그 와중에 신부, 목사, 재야인사, 변호사, 야당 정치인들, 문인, 예술가, 교수 등 사회 원로들과 지도자급 인사들의 농성장 격려 방문이 잇따르자 회사 측은 3월 17일 새벽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농성자들을 길거리로 쫓아냈다. 그들 중 113명이 75년 3월 18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초대 위원장에는 권영자가 추대되었다.

1974년 10월부터 1975년 3월까지 동아일보사 내에서 자유언론실천운동에 앞장섰던 언론인들이 거리로 쫓겨난 지 3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복직하지 못하고 있다.

‘긴급조치 9호’ 자체 검열에 나선 동아일보사의 행보

박정희 ‘유신독재’에 굴복한 언론사는 동아일보사만이 아니었다. 동아일보사는 이승만 시대에 야당지로 독재와 맞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 군사독재 초기에는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저항정신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로 전환한 1972년부터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 독재 권력에 굴복하고 저항정신을 포기한 언론사 사주들에게 민주주의니 언론의 자유니 하는 운동들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동아일보사의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들처럼 젊은 언론인들이 국민의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를 사회에 널리 알리는 운동을 박정희 ‘유신독재’가 어떻게 탄압했는지는 긴급조치 1~4호와 동아일보사에 대한 전면적 광고 금지가 확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유신독재 시대 지식인 사회에서 중립지대, 회색지대의 공간은 한 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물며 언론인 사회에서야 말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실제로 박정희의 중앙정보부가 광고탄압의 와중에서 동아일보 사주에게 주을 내놓으라고 협박했다는 여러 증거가 있다. 당시 동아일보사의 사주 김상만은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모든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들을 ‘학살’이라 할 정도로 무자비하게 길거리로 내몰고 나서야 유신독재를 향해 동아일보사 경영권 유지를 구걸할 수 있었다.

‘진실화해위’의 진상조사 보고서에는, 1975년 7월, 당시 동아일보사 회장 김상만이 회장이 중앙정보부 국내 담당 차장보 양두언에게 불려가, “① 앞으로 긴급조치 9호를 준수한다. ② 앞으로 편집국장, 정치부장, 경제부장, 사회부장 등 주요 간부 인사는 중앙정보부와 협의한다” 라는 서약을 하고서야 광고탄압을 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MBC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시리즈 28회 댜큐프로 2001년 7월 13일자가 ‘동아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방송한 바 있는데, 그 프로에는 이런 설명이 나온다.

남한에 진정한 의미의 언론의 자유가 사라진지는 오래 되었습니다. 일반 국민들은 박정희 정부가 읽히고자 하는 내용만을 읽고 있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 전, 서울에 있는 한 신문사 사무실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젊은 기자들은 박 정권에 비판적인 내용의 기사를 싣도록 신문사 측에 요구했습니다. 젊은 기자들이 승리했고 신문에는 반정부적 기사를 1면에 게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사가 강경해질수록 정부의 위협과 압력도 가중되었습니다. 12월 말 동아일보 최대의 광고주는 계약을 취소했습니다. 아무런 이유도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매일 신문사 밖에는 경찰이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격려광고를 싣고자 하는 국민들에게 위협을 주기 위해섭니다. 광고주들의 보이콧이 시작된 이래 이 신문의 발행부수는 하루 70만에서 80만으로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광고 수익은 하루 5천 달러씩 감소했습니다. 이제 문제는 동아일보의 사주측이 정부에 굴복하여 젊은 기자들을 해고하기 전까지 얼마나 지탱할 수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한국, NBC 뉴스의 돈 올리버였습니다.

나레이션 : 그러나 사주의 의지는 오래가지 못했다. 경영진의 명분은 광고 사태에 따른 경비절감.

그러나 기자들이 제작거부에 나서면서 상황은 소용돌이쳤다. 2층 공무국을 점거한 23명의 기자들은 대량해고 등에 항의하는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고 3층 편집국과 4층 방송국에서도 18명의 부장 차장들이 농성에 합류해 제작거부에 돌입한 기자, PD, 아나운서의 수는 무려 150명이었다.

나레이션 :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주도하던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들이 길거리로 쫓겨난 지 넉 달 후 동아일보사 편집국을 취재한 일본 NHK 기자는 이렇게 방송하고 있습니다.

작년 말부터 언론탄압 문제로 주목받고 있는 동아일보사의 편집국입니다. 게시판에는 긴급조치 9호의 내용이 붙어 있습니다. 데스크는 긴급조치 9호의 내용이 적혀 있는 게시판을 옆 눈으로 보면서 기사를 2중 3중으로 체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문을 보더라도 같은 내용만 나온다는 시민들의 목소리도 듣게 되었습니다.”

(뉴스 자료화면) “지금 긴급조치 9호라는 것이 있습니다. ‘긴급조치 9호’라는 것은 제가 해석하기로는 이것은 일종의 계엄령하고 비슷한 거다. (한국에서) 경제라든지 이런 것에선 뭐 계엄령 같은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만, 언론관계, 정치활동 이런 것은 계엄령하고 별반 다름이 없는 제약을 받고 있습니다.”

맺음말

만약 모든 실정법을 다 지켜야 하고 어떠한 악법이라도 이를 위반할 경우 사회적으로,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범법자로 몰린다면 그 사회는 결코 한 걸음도 민주사회로 나아갈 수 없다. 실로 민주주의는, 신분사회의 억압적 실정법에 신음하던 중세 신민들을 근대 자연법사상으로 무장케 하고 왕의 법이던 법률체계를 시민들이 주권자인 법률체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근대문명은 기본적으로 중세문명에 대한 계승자가 아니라 반란자인 것이다. 또 법철학에서는 “주권자란 한 나라의 법을 만들 권리를 갖고 있는 자이다”라고 규정한다.

이런 관점에서 ‘유신시대’를 살펴보자. 국민 중에 누군가가 헌법을 비판했다고 해서, 고치자고 했다고 해서, 영장 없이 체포되고, 무기한으로 구금되고 고문 받고 가택 수색을 당하고, 공산주의자로 몰리고, 사형 또는 무기징역까지 받는 사회를 우리는 감히 ‘민주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실제로 ‘‘유신독재시대에 살고 있던 때, 많은 어용 지식인들과 언론인, 학자들은 “유신만이 살 길이다”, “유신체제는 한국적 민족주의 민주사회다”라고 기회 있을 때 마다 되뇌었을 뿐이다. 유신독재에 편승하여 민주화를 외치는 수많은 학생, 청년, 종교인, 문화예술가, 학자, 노동자, 농민, 재아인사, 언론인들을 ‘빨갱이’ 또는 ‘좌익’으로 모는 데 부화뇌동한 바 있었다.

그들이 설령, 유신시대에는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서 유신세력에게 백기 투항한 것을 우리가 어느 정도 양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오늘에 와서조차 유신시대 판결문에 기초하여 당시의 자유언론실천 운동을 ‘불법 집회’니 ‘불법유인물 배포’니 하면서 당시 동아일보 기자, 아나운서, 프로듀서들의 3분의 2를 파리 목숨처럼 해고시킨 것을 ‘정당했다’고 주장하고, 아무런 성찰과 반성도 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다.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해직언론인들이 결성한 동아투위는 1978년에 당시 제도언론이 전혀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민권운동들을 “보도되지 않은 민주 민권 일지”라는 이름의 유인물로 을 제작·배포한 바 있었다. 이 사건으로 동아투위 위원 10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징역을 살았다. 그 끝에 당시 동아투위 위원장이었던 안종필은 감옥에서 얻은 간암으로 목숨까지 바쳤다. 민주적 사회였다면 언론들이 당연히 했어야 할 보도들을 당시의 제도언론들이 애써 외면했기 때문에, 실업자 생활과, 가난에 시달리던 해직언론인들이 인신의 자유까지 박탈당하는 것을 감수하면서도 심신을 바쳤던 것이다.

우리는 1987년의 6월 항쟁 때까지 참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수많은 청년, 학생, 노동자, 농민, 종교인, 지식인, 문화예술인들이 감옥에 가고 구류를 살고 납치되고 고문당했다. 그리고 의문사 당하고 실종되었다. 분신과 투신을 통해 유신독재에 항거하고 목숨을 바쳤다. 그 희생을 바탕으로, 또 온 국민의 뜨거운 열망으로 한국사회는 이 정도나마 민주화를 진척시켰다.

그러나 21세기 초반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한국인의 민주화운동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 운동은 더 체계적인 민주, 민권, 민생의 신장을 위해, 또 민족의 통합과 통일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 계속 전진해갈 것이다.

한민족의 민주·민생·통일운동의 힘이 한 번 더 본격화할 때, 아직도 1970~80년대의 기생적이고 굴종적인 마음가짐을 버리지 못 하고 있는 일부 제도언론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이 뒤따르지 않을지 염려스럽다.

정부든 언론사든, 한국사회의 밝은 내일을 위해서, 지난날 어두웠던 독재의 유산을 확실히 청산할 일이다. 1970~1980년대 ‘암흑의 공포시대’를 더 이상 ‘과거지사’로 덮어두고 외면할 게 아니라 탄압의 진상을 인정하고 충분히 배상에 응하는 것이 해결의 지름길이 아닐까?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리자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