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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엄혹한 시절을 어찌 살아왔던가[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17)] 이기중 전 동아일보사 체육부 기자ㆍ전 한겨레신문사 판매국장
  • 관리자
  • 승인 2017.02.13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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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6810월 동아일보사에 제11기 수습기자로 입사했다. 처음에는 세상을 모두 얻은 것처럼 기뻤으나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했다. 수습이라고는 하지만 우선 월급이 쥐꼬리여서 생활에 찌들려야 했고 막상 신문사 안에 들어와서 보니 밖에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기도 했다. 그리고 무언가 모르게 신문사에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대한 2학년 때 첫 옥살이

나는 뛰어난 이론가도 아니고 용감한 투사도 못 된다. 그저 순박하고 남을 쉽게 신뢰하는 원만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런데도 대학 2학년 때 데모를 하다가 주동자로 몰려 구속되었다. 미군 기지에는 어디에나 이른바 양색시가 있었고 그들에 대한 린치가 당시 크게 사회문제가 되어 있었다. 주한미군들의 야만은 치를 떨게 했고 우리 누이들의 참상은 처절했다. 그런데도 우리 정부는 그들의 손끝 하나 건드릴 수 없는 치욕적인 상태에 있었다.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미행정협정 체결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계엄령이 엄존하고 있었지만 모두들 개의치 않았다. 나는 처음에는 깊이 알지 못했으나 친구들의 주장과 대의에 따라 선뜻 동조했다.(주한미군들의 탈선사건이 잇따르고 한국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게 되자 비로소 미국은 협상에 응하기 시작하여 우여곡절 끝에 196679일 한미주둔군지위협정이 체결되고 196729일 발효되었다.)

그러한 경향은 동아일보에 입사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대학 졸업하고 군대 다녀온 후 취직 시험 볼 곳조차 별로 없던 나에게 꿈에 그리던 동아일보 입사는 감지덕지였다. 그저 동아일보가 고맙고 자랑스럽기만 했다. 그렇지만 언론 환경이 나날이 악화되고 있는 것은 어렴풋이 느끼고 또 주위에서 보기도 했다. 회사 동료 간에, 선후배 간에 차를 마시면서, 밥을 먹으면서, 술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어 점차 눈을 뜨게 되고 가슴에는 무언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노동조합을 결성할 때 이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창립노조 집행부에 참여하는 것도 고사하지 않고 별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그 자리에 모였던 동료들에 대한 신뢰와 그 동안 쌓았던 따뜻한 동료애 때문에 앞날에 대한 걱정이나 세속적 이해타산이 범접할 수 없었으리라. 창립 집행부는 다음 날 해고되고 연이어 차기 집행부가 뭉텅뭉텅 몇 차례 난도질당했다. 그런데도 집행부를 하겠다는 자원자들이 줄을 섰다. 가슴이 뭉클했다. 참 훌륭한 동료들이라고 생각했다. 참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들과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든 함께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삶의 보람과 긍지를 만끽하게 해 줬던 자유언론의 현장. 19741024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그 자리에도 나는 늦게 참여했다. 그러나 아무런 주저함 없이 그 대열에 합류했다. 앞서지는 못했지만 뒤처지고 싶지는 않았다. 전에 위축되었던 분위기가 활기를 찾게 되고 취재를 나서거나 친구들을 만날 때도 기운이 나고 자랑스러웠다. 동아일보라는 신문사가 자랑스러웠다.

자유언론의 열풍이 휩쓸고 간 뒤 그 자리에는 해고의 칼바람이 몰아쳤다. 그러나 실감이 나지 않았다. 퇴직금을 받아가라는 통고에도 좀 지나면 없던 일이 되겠지하는 막연한 기대가 깔려 있었다. 얼마나 좋아하고 자랑스럽던 동아일보였던가. 1968년 입사했을 때 하늘을 날 것 같던 그 기분이 아련하게 스쳐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동아일보가 있어 행복하다고 하지 않는가. 동아일보마저 굴복하면 이민 가겠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지 않는가.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우리는 계속 전진해야 한다고 믿었다. 우리는 복직될 것이며 또 복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해고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19743월에도 해고를 당했다. 노동조합 때문에 수많은 기자들이 해고되었다. 그때는 50여일 만에 해고가 취소되고 모두 사면되어 복직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가. 이번에도 머지않아 다시 복직이 되리라는 기대도 한편에서 꼼지락거렸다. 그때와는 사안이 다르고 형편이 다르지만, 지금은 무자비한 무력을 휘두르는 무소불위한 군사정권과 맞붙어 있지만 그래서 더욱더 회사는 우리가 필요할 것으로 믿고 싶었다. 동아일보만큼은 없어질지언정 무릎을 꿇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어린 두 아들이 병마에 시달리고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활은 어려워지고 사회는 더욱 엄혹해져 갔다. 평소 불평 없던 아내도 조금씩 지쳐가기 시작했다. 내가 집에 잘 들어가지도 못하는 가운데 자유언론실천운동이 한창이던 19751월에 태어난 둘째 아들이 탈이 났다. 잘 놀던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맥을 탁 놓았다. 일어나 앉지를 못하고 안으면 팔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머리도 가누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뜨렸다. 너무 놀라 서둘러 서울대학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검사해봐야 알겠지만 척추 카리에스가 염려된다고 했다. 척추 결막염 말이다. 의사는 당장 검사하기는 어렵다며 나중에 검사 날짜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앞이 캄캄했다. 얼마 전에는 세 살밖에 안 된 큰아이가 눈 수술을 받았다. 방치하면 실명될 수도 있다는 의사의 소견에 더럭 겁이 났다. 수술 후 세 살 박이 아들은 안경을 쓰게 되었다. 수술비가 적지 않았다. 다행이 선배의 소개로 집도 의사가 자신의 재량으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할인을 해 주었다. 그런데도 그 금액이 나로서는 크게 부담스러운 액수였다. 당시 나는 동아일보사에 목숨만은 붙어 있는 정직 상태였기 때문에 월급이 반절 나오고 있었다. 나는 병원에 사정해서 그 반절 나오는 월급에서 몇 달 할부로 분납하기로 했으며 할부가 아직 얼마간 남아 있던 상태였다. 그런데 또 일이 생긴 것이다. 너도 나도 여유가 없던 시절이었다. 비축이 있을 리 없었다. 도움을 청할 곳도 별로 없었다.

하루 저녁 자고 나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병원에 다녀온 다음 날 죽은 듯이 누워만 있던 아이가 손발을 약간씩 움직이더니 어느 순간 힘을 되찾고 목도 가누기 시작한 것이다. 약을 먹은 것도 아니고 어떤 조치를 취한 것도 아니었다. 얼마 뒤 아이는 예전처럼 기어 다니기 시작했다. 의사에게 전화를 했더니 천만 다행이라며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으니 다른 이상이 없으면 기다려 보라고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무슨 전조였을까? 엄마가 받은 심한 스트레스를 아이가 대신 나타낸 것일까. 하여간 한 시름 놓기는 했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걱정되기 시작했다.

해직 기간이 길어지고 손에 돈이 말라갔다. 먹고 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1975년 말 생계가 다급했을 때 한 주간지 편집을 맡게 된 이계익 선배가 불러 주었다. 동료 10여 명이 함께 일하게 되었다. 모두들 열심히 했다. 시장 바닥을 기어 다니며 취재를 하기도 했다. 모두들 기획하고 취재하고 기사 쓰고 편집하고 교정 보는 일로 일주일이 숨 가쁘게 넘어가곤 했다. 심지어 인쇄하는 것까지 머리를 디밀으며 신경 써야 했다.

취재를 하면서는 갖은 수모를 당해야 했다. 찬바람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마땅히 갈 곳은 없고 언 몸을 녹일 수 있는 차 한 잔 마실 여유가 없어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름 없는 주간지 기자라고 사이비 기자로 매도되고 사갈시되는 것은 참으로 참기 어려웠다. 특히 시장을 싸돌아다니며 상인들을 취재하는 경우 시장회사나 연합회에서 백안시하며 사이비 기자 취급했다. 특히 당시 동대문종합시장에서는 회사와 상인들 사이에 고소사건이 벌어졌을 때 상인들 입장을 대변했다며 회사 측으로부터 협박을 당하기도 했으며 경찰에 참고인으로 불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무명이던 주간지가 세상에 알려지고 주목을 받게 되었다. 운동권 출신 학생들도 몇 명 기자로 일했다. 그런 신문이 오래 갈 리 없었다. 어느 날은 용산경찰서 형사들이 권총을 뽑아든 채 편집국에 난입해서 마치 대간첩 작전하듯 수색하고 기자들을 깡그리 경찰서로 끌고 가서 몇 시간씩 조사하기도 했다. 주간지를 발행하던 중앙대학은 어렵게 끌고 가다 결국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주간지는 폐간되고 나는 다시 자유인이 되었다.

주간지와 출판사를 전전하다

그때부터 시작된 나의 직장 편력은 화려(?)하다. 나는 동아일보에 입사하기 전에 시사영어사에 다녔다. 대학 저학년이나 고교생을 상대로 하는 <영어세계>라는 월간지를 1년 정도 만들었다. 그리고 <주간시민>을 그만 두었으니 벌써 세 군데를 편력한 것이다. 그 뒤 태양문화사라는 출판사를 거쳐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한겨레신문사, 한길사, 월간 자동차생활, 전자신문까지 모두 9개 직장을 전전해야 했다. 어디에 뿌리를 내리기 힘든 부평초 같은 생활이었다. 항상 불안과 동거하고 초조와 동행하는 생활이었다. , 감옥도 월급 없는 직장이라면 딱 10개를 채운 셈이다.

태양문화사 사무실은 창작과비평사 사무실 맞은편에 있었다. 주간시민을 나와 어정거리고 있으니 누가 그곳을 소개했다. 다른 건 몰라도 교정은 제법 본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시사영어사에서 영어사전 만들 때 여관에서 합숙하며 교정을 본 적이 있었고 동아일보에서는 수습 과정으로 각 부서 로테이션을 할 때 교열부장으로부터 은근한 유혹을 받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도 하루 종일 교정을 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오전, 오후 한 차례씩 10여 분의 커피 브레이크와 점심시간 한 시간을 빼고는 활자에 온통 코를 박고 있어야 했다. 말하자면 교정 기계였다. 그래도 그나마 고마운 일로 생각되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그곳에서 박정희 대통령 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의 조카라는 외국어대학교 박 모 교수가 정리한 방대한 자료였다. 사장은 대박을 꿈꾸며 흥분해 있었다. 7~8명의 출판사 편집 인력을 집중 투입했다. 나는 사장을 만나 전기 교정에 관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장도 내 사정을 이미 알고 있는지라 별 거부감 없이 내 요구를 받아들였다. 출판사에는 전기 말고도 걸려 있는 책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책들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편집 인력 가운데 학생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제적당한 서울 문리대 사학과 학생이 있었는데 그도 나와 같이 전기 교정에서 빠졌다. 그러나 그런 상태가 오래 갈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아투위에 민권일지 사건이 일어났다. 1978102410·24 선언 4주년 기념식에서 언론에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일지를 유인물로 알린 것을 트집 잡은 것이다. 바로 그날 저녁 귀가 길에 홍종민 총무가 연행되고 26일에 안종필 위원장과 안성열· 박종만 위원이 연행됐다. 그리고 그 뒤에 장윤환, 이규만, 임채정, 정연주 위원과 함께 내가 연행되었으며 31일에는 김종철 위원이 또 연행됐다. 모두 10명이었다.

우리는 종로경찰서 형사 보호실에 갇혀 있다가 1110일 안종필 위원장과 홍종민 총무, 안성열·장윤환·박종만·김종철 위원 등 6명이 구속되고 나머지 이규만·임채정·정연주 위원과 함께 나는 불구속 입건되었다. 이어 1120일에는 이병주 위원장 대리와 양한수 총무 대리, 정연주 위원이 다시 연행되고 27일에 정연주 위원이 구속되었다.

이병주 위원장 대리 등이 연행되자 1124일 윤활식 위원이 위원장 대리로 선임되고 내가 총무 대리를 맡게 되었다. 그리고 1227일 송년회 자리에서 배포한 유인물을 문제 삼아 해를 넘긴 197919일 윤활식 위원장 대리와 성유보 위원 그리고 내가 연행되었다. 이번에는 송년회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했기 때문에 중부경찰서에 연행되어 115일 구속 수감되었다.

막상 감옥에 갇히자 아내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 그러면서도 어느 면에서는 천만 다행이라는 자위를 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 네 식구는 처가살이를 하고 있었다. 1971년 결혼할 때만 하더라도 비록 무허가였지만 어엿한 내 집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줄고 줄어 처가살이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결혼 후 여덟 번째 집이 처가였다.

다섯 살짜리와 두 살짜리 두 아이를 데리고 살기에는 7평짜리 원룸이 너무 좁아 방 두 개짜리 주택 반지하로 이사 갔다가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 대치동 논바닥에 지은 집이라 부엌 아궁이에서 물이 계속 나와 겨우내 동태가 되어야 했다. 그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연탄가스 위험이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해 처가로 들어간 것이었다. 아내는 1977년 겨울에 얼마나 떨었던지 우리가 그 뒤 다섯 번을 더 이사해서 모두 13번째 집에 지금 살고 있지만 늦가을에 이사하는 일 만큼은 한사코 반대했다.

감옥 생활은 견딜 만했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로서는 큰 불편이 없었다. 오히려 편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무엇이든지 잘 먹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누구에게도 떳떳했기 때문에 심리적인 압박감이 없었다. 감옥 안의 수많은 학생들은 우리에게 힘이 되기도 했다. 밖에서 고생하는 식구들이나 동료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앞섰다.

얼마 동안은 그랬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잇몸에 탈이 났다. 잇몸이 붓기도 하고 욱신거리더니 통증이 심해졌다. 잇몸 아픈 것은 별로 신경 써 주는 사람 없이 홀로 견뎌야 했다. 아내가 면회 왔을 때도 내색하지 않았다. 괜히 걱정만 더하게 할 것 같아서였다. 잇몸은 꾸준히 아픈 것이 아니라 왔다 갔다 했다. 견딜 만큼만 아팠다. 아니, 많이 아팠지만 견딜 수밖에 없었다.

영원할 것 같던 박정희 정권이 무너져 내린 뒤 감옥에서 나왔을 때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치과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역시 우리 같은 빈털터리들은 선배들의 신세 속에 살아간다. 박지동 선배가 소개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거쳐 갔다. 나는 그 치과에서 좌우 아랫니와 좌측 윗니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을 하는 가운데 어금니 한 개씩 세 개를 뽑고 멀쩡한 어금니 여섯 개를 갈아 뭉개 크라운을 씌웠다. 그때까지 충치 하나 없고 이빨 튼튼하다고 자랑했는데···. 지금 같으면 시간이 들고 돈이 들더라도 모두 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그럴 여유가 없었고 치료비도 제대로 낼 수 없는 입장에서 살리자고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아픈 이빨은 언젠가는 뺄 수밖에 없다는 발치주의 풍조 또한 한 몫을 거들었을 것이다.

감옥에서 얻은 치통과 허리 통증

감옥에서 겪은 또 하나의 고통은 허리 통증이었다. 감옥 안에서의 가장 큰 즐거움은 일단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 가운데도 가장 큰 즐거움은 면회를 나가는 것이고 그 다음은 운동을 나가는 것이다. 물론 목욕이나 이발을 나가는 것도 있다. 우리처럼 독방에 갇혀 있는 경우는 운동을 할 때도 혼자 나가 교도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혼자 해야 한다. 그래서 10여분 동안 줄기차게 뛰기도 하고 추운 날씨에는 양지바른 쪽에 서서 햇볕바라기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재미있던 운동시간이 고통의 시간으로 변할 줄이야. 별다른 이유 없이 슬근슬근 아프기 시작한 허리 통증이 심해지더니 앉고 일어서기에 힘들 정도로 아팠다. 어디에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면회를 온 아내에게 아픈 모습을 보이는 것이 허리 통증보다 더 가슴 아팠다. 허리 통증이 상당 기간 계속됐다. 지금도 척추관 협착증으로 애를 먹고 있다.

또 하나의 고통은 머리 빠짐이었다. 구속된 지 6개월 넘어서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이부자리로 쓰던 담요에 머리칼이 듬성듬성 보이더니 시간이 지나자 그 수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이것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감옥이란 무슨 일이 벌어져도 내 힘으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곳이 아닌가. 옛날 사진을 보면 내 머리숱이 엄청 많았는데 지금은 이발하려면 이발사가 고생해야 할 정도로 머리칼이 모두 달아나고 없다.

한 번은 아버지께서 면회를 오셨다. 면목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멍청해졌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극장에 들락거리다가 훈육주임에게 연속으로 걸려 정학을 맞은 일이 있었다. 그때 학부형을 불러 아버지께서 오셨는데 그때보다 더 죄송했다. 아버지는 첫 마디가 먹을 것을 좀 가져와야 하는데 못 가져와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몸은 성하냐고 물으셨다. 그때 감옥에 들어와 처음으로 눈물이 나왔다. 아내가 왔을 때는 크게 소리 내어 웃으며 너스레를 떨기도 했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1910년생인 아버지는 10살 이전에 양친 부모를 모두 여의시고 갖은 고생을 하시며 자수성가하신 분이다. 어느 정도 생활의 기반이 잡혔다고는 하지만 별로 여유가 없었을 때에도 아버지 생신에는 마을 어른들을 모시고 아침식사를 함께 했다. 그리고 설날과 추석에는 쌀을 몇 가마 풀고 양말을 사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했다. 우리 형제들은 그때마다 쌀바가지와 양말짝을 들고 동네를 누벼야 했다. 그 사람들은 농사일이 한창 바쁠 때도 우리 집에서 일을 한다면 만사 젖혀놓고 달려오곤 했다. 아버지는 면회 오신 뒤 4년 만인 1984년에 돌아가셨다.

아내가 와이셔츠 가게를 차리다

아내는 내가 없는 동안 생계를 꾸리기 위해 을지로 지하상가에서 와이셔츠 맞춤가게를 했다. 아내는 생활 능력이 없었다. 장사 경험이 전혀 없고 건강도 실한 편이 아니었다. 두 아들과 함께 먹고 살기 위해서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장사는 처음부터 지나가는 일반 손님을 보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주위에 아는 사람들에게 작정하고 신세를 지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점차 잊히고 우리 주위에 와이셔츠를 입는 사람이 많지 않아 어느 날엔 하루 종일 손님이 한명도 없는 날이 있을 정도였다. 품목이 잘못된 것이었다. 아침 10시에 나와 저녁 8시 너머까지 공기 탁한 가게에 앉아 그저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1979년 말 감옥에서 나와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몇 가지 기다리고 있었다. 우선 아내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져 있었다. 전에도 활기가 넘치거나 무슨 일을 가쁜하게 처리하는 체력은 아니었지만 평소 조용조용한 생활에는 불편이 없었다. 그런데 조금만 움직여도 피로를 느끼고 숨쉬기를 힘들어 하고 계단 오르는 것을 힘겨워 했다. 아무래도 문제가 심각하다고 해서 병원을 찾기 시작했다.

먼저 한양대학병원을 찾아갔다. 심장 승모판막증이라 했다. 승모판막증은 어렸을 때 감기 비슷한 열병을 앓고 난 뒤 심장판막에 염증이 생겨 판막이 서서히 망가지면서 좁아진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가슴을 열지 않고 혈관을 통해 간단하게 수술할 수도 있지만 당시는 상당히 중한 병이었다. 심장 수술로 성가를 올리고 있던 한양대학병원 측에서는 당장 수술 날짜를 잡자고 했다.

서울대학병원을 찾아갔다. 그 병원에서도 같은 진단이 나왔다. 그러나 수술에 대해서는 판단이 달랐다. 심장수술이 많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위험 요소가 너무 많다. 견딜 수 있는 데까지 견뎌보고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될 때 수술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그동안 심장수술 기술도 발달해서 성공률이 크게 향상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한양대학병원 측에서는 서울대학병원 측의 주장도 일리는 있지만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원기가 있을 때 수술하는 것이 성공률도 높고 회복도 빠르다는 것이었다.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여러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했으나 누구 하나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사실상 그러한 문제는 어느 쪽을 자신 있게 권유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 문제를 꺼낸 것은 너무나 답답해서였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양쪽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어 어느 쪽의 의견을 따르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서울대학병원 측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결정한 주된 이유는 사실상 그 당시 심장 수술을 감당할 만한 돈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감옥에서 나와 보니 아내가 교회에 열심히 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보고 함께 교회에 나가자고 했다. 나는 그 동안 고생한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가정을 지켜준 고마움 때문에 아내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시골 우리 동네에 버젓한 교회가 있었고 성탄절 즈음엔 대체로 상 받는 재미로 예배당에 나가 성극도 하고 성경 암송도 했던 기억이 있어 교회가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그리고 감옥에 처음으로 들어온 책이 성경이었고 그 안에서 구약을 한 번, 신약을 두 번 읽은 것은 다 이를 위한 준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내 따라 교회에 다니다

아내는 내가 구속되었을 때 처음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동료 구속자 가족들과 어울리면서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으며 격려하기도 했다. 당시 긴급조치와 보안법 등으로 이리 꿰이고 저리 엮여 구속된 민주인사와 학생들이 넘쳐났다. 그 가족들을 위해서 매주 목요일 기독교회관에서 구속자 가족을 위한 목요기도회가 열렸다. 그곳에 참석하면서 아내는 처음으로 기독교를 접하게 됐다.

그 뒤 아내는 집 가까이에 있는 자그마한 개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몸은 병들고 남편은 감옥에 있고 아이들은 커가고 벌어놓은 돈은 없고 어디에 의지해야 할지 막막했던 것이다. 그러한 막막함 때문에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세상이 온통 암흑 같았다. 혼자 있을 때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 돌파구가 된 것이 하느님이었다. 신에게 간절하게 매달림으로써 숨 쉴 수 있는 구멍을 찾게 된 것이다. 한 줄기 빛을 찾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부부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감옥에서 나와 또 하나 놀란 것은 내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는 아파트가 생겼다는 것이었다. 비록 16평짜리 아파트였지만 나에게는 궁전처럼 느껴졌다. 아내에 대한 고마움과 놀라움이 절로 일었다. 우리는 처가로 들어가면서 주택청약저축을 들었다. 그것이 알을 낳아 병아리를 깐 것이었다. 그런데 그간에 사정이 있었다. 내 이름으로 청약신청을 하려는데 동사무소에서 재소자라며 인감증명을 발급해 주지 않았다. 몇 번을 찾아가서 사정해도 막무가내였다. 결국 아내는 동료 구속자 가족들과 함께 동사무소에 몰려가 데모를 벌였다는 것이다.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인감증명은 그렇게 해서 발급됐다.

아파트 당첨은 그것만으로 된 것은 아니었다.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직후 우리의 앞날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것이란 판단 아래 내린 고뇌의 결단이 한 몫을 한 것이다. 우리는 회사에서 쫓겨난 다음 날부터 회사 정문 앞에서 양쪽으로 도열을 했다. 어느 날 작고한 안종필 위원장과 나란히 서 있게 되었다. 안 위원장이 뜬금없이 나에게 정관수술 하러 가자고 했다. 서울구치소 앞에 있는 현저병원에서 공짜로 수술을 해 준다는 기사가 아침 신문에 실렸다는 것이다. 그때 아들만 둘을 두고 있던 나로서는 귀가 솔깃했다. 앞으로 애를 더 갖는다는 것은 어려울 것 같고 아내가 허약하기 때문에 내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정관수술에 관하여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있었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좋다고 했다. 우리 둘은 도열이 끝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갔다. 인구 증가를 막기 위해 산아제한에 총력을 쏟던 정부는 아파트 청약 때 정관수술자들에게 가산점을 주었다. 그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국책 연구기관이다. 농업정책을 수립하기 위한 세미나 내용을 책으로 묶어 내는데 녹음을 풀어낼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3개월 계약으로 일하게 됐다. 이것저것 따질 형편이 못되었다. 일은 별로 힘들 것 없었지만 마음이 여러 가지로 편하지 않았다. 이방인 같은 느낌이었고 무엇을 해도 흡족하지 않았다. 얼굴은 표정을 잃었고 내가 보기에도 어색하기만 했다. 불편한 친척집에 얹혀사는 형국이었다.

계약이 끝나갈 무렵 누군가 원고 한 뭉치를 들고 와서 손 좀 봐 달라고 했다. 마음 놓고 고쳐보라고 했다. 마치 누군가에게 시험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나쁘기는 했지만 못하겠다고 마냥 뿌리칠 수도 없었다. 언뜻 보기에 한문을 번역한 것 같았다. 문장이 고투인 데다 원문을 고지식하게 번역한 때문인지 많이 꼬여 있었다. 필자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마음 내키는 일도 아닌지라 ‘에라 모르겠다!’ 하며 심할 정도로 마음대로 고쳐 나갔다. 고치기보다는 차라리 원고 행간에 빨갛게 새로 썼다.

원고를 넘기고 얼마 지나자 원고 주인이 보자고 했다. 농수산부에서 파견된 연구위원이었다. 농수산부 차관보를 지낸 뒤 연구원에서 농업관련 고문서를 번역하고 있었다. 그는 고친 내용이 마음에 든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나로서는 싫다 할 이유가 없었다. 3개월 임시직 계약이 끝나고 6개월 계약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한 번 두 번 계약이 연장되고 후에 그가 부원장이 되고 원장이 되면서 임시직에서 정규직원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농사직설> 등 농업관련 고문헌이 다수 번역 출간되었다.

내가 연구원에 임시직으로 있을 때부터 청량리경찰서에서 매달 주기적으로 다녀갔다. 처음에는 모르고 지냈지만 후에는 그러려니 했다. 연구원에서는 한 번도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일부 고위직에 있는 몇 사람은 나에게 아주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며 기회만 있으면 업무를 통해 골탕을 먹이기도 했다. 결재를 받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고 과도하게 몰아붙일 경우에는 멱살을 꼬나 잡고 한 방 후려친 뒤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겨레신문 창간에 동참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이 발의되고 준비되고 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기쁘고 흥분된 마음으로 창간 작업에 참가했다. 열심히 일했고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힘든 줄 모르고 정력적으로 일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압박이 점차 심해졌다. 다른 것은 견딜 수 있어도 아이들 교육 문제만은 외면할 수 없었다. 대학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애들의 등록금을 마련하기가 너무 벅찼다. 한겨레를 그만두게 된 결정적 계기도 역시 학자금이었다. 회사가 어려워지자 그동안 겨우겨우 지급되던 중고등학교 학자금을 중단한다고 결정했다. 그 때문에 동료가 하는 출판사로 옮기기는 했지만 그곳에서도 여의치 못해 직장을 계속 옮겨 다녀야 했다.

동아일보사 해직 후 내 생활은 상당 기간 너무나 어려웠다. 후에 어느 정도 안정된 직장을 잡아 생활이 안정되기는 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직장과 셋방을 전전해야 했다. 내가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것과 나의 고달픈 삶과는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동안 내가 겪었던 고통과 좌절만큼은 동아일보사에 그 책임의 일단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너무도 사랑했던 동아일보가 끝내 잘 되기를 바랐었다. 그런데 지금 이토록 무너져버린 동아일보를 보면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측은하면서 한쪽 가슴이 시리기도 한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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