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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에 사로잡힌 나의 삶[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16)] 이부영 동아투위 위원ㆍ전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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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2.0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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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인 나의 삶에 관한 이 글을 동아투위의 성립 이전과 이후로 나눠 기술하려 한다. 동아일보 해직 사태는 나뿐만 아니라 우리 투위원 모두의 삶에 지울 수 없는 고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2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에 이르는 연배의 투위원들이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려던 시기에 부닥쳐야 했던 사회로부터의 배제와 격리, 이단자(아웃사이더)의 굴레는 우리들의 삶을 한 순간에 금 밖으로내던졌다. 1975년에 시작된 동아투위원들의 스산한 삶의 역정은 무려 38년의 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되고 있다. 그 세월은 일제 식민지배 35년보다 긴 기간이다. 6명의 대통령 치세를 지냈고 더욱이 민주화 시대 대통령 2명의 치세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잡히지 않고 있다. 18명의 동료들이 그 동안 유명을 달리했다.

나는 민주화운동과 정치 참여의 길을 38년이라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걸어왔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민주화운동가나 정치인이기 보다는 해직언론인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동아 해직언론인들의 임의단체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나의 삶을 자유언론으로 사로잡았다. 이 글은 유신체제 전후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1980년대 이후의 삶은 거의 생략했다.

동아투위 창립 이전의 삶

당시 언론계의 성지처럼 선망의 대상이던 동아일보사에 수습 11기로 입사한 1968년은 3선 개헌을 앞둔 해였다. 박정희 정권은 언론에 대해 온갖 압박과 회유를 일삼았다. 예를 들면 서울 봉천동 같은 달동네에서는 한겨울에 으레 연탄파동이 일어났다. 연탄업자들의 사재기 때문에 산꼭대기 동네에서는 아래 동네의 2~3배 값을 내고도 연탄을 구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사태를 보도하면 중앙정보부에서 기자를 연행해서 민심 선동으로 대북 이적행위를 저질렀다면서 구타해서 내보냈다. 정치부나 경제부 등 핵심부서보다는 일선 경찰기자들에게 겁을 줘서 언론 전반에 공포 분위기를 서서히 퍼뜨리는 수법이었다.

편집국에는 중앙정보부와 보안사 등 정보기관원들이 늘 출입하고 있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를 거쳐 1972년 유신체제가 선포되자 언론은 완전히 침묵했고 오히려 독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분위기로 전환했다. 당시 언론이 서서히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간다는 자조적 탄식이 번지고 있었다. 그래도 동아일보사에서는 최소한의 기자정신을 지켜가려는 몸부림이 계속되었다.

자유언론운동이 본격화될 즈음 나는 문화부로 자원했다. 유신시대 들어서자 정치·경제·사회부 등에 대한 정권의 통제가 강화되고 상대적으로 문화부 기사가 지식인들의 저항의 목소리를 전달하자 문화부를 정치부라고 우스갯소리로 불렀다. 동아일보사에서 자유언론운동을 펼치는 데 있어서 문화부 기자들의 활동은 종교, 문화예술, 법조, 대학 등 지식인 사회의 광범한 지지 성원을 이끌어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 형성한 지식인 네트워크는 이후 동아투위원으로서 재야민주화 운동의 한 활동가로 일해 가는데도 적지 않은 보탬이 되었다. 자유언론운동에서 우리의 중심인물은 천관우 주필이었다. 유신체제 선포 전후에 동아일보에서 퇴사와 복귀를 거듭했던 천관우 선생은 유신 직후 회사에 복귀한 뒤, 아예 민주수호국민협의회’(약칭 민수협) 대표를 맡아 재야인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천 선생은 함석헌, 김재준, 장준하, 유진오, 이병린, 김정한, 계훈제 선생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성명을 낼 일이 있으면 나와 몇몇 기자들을 불러 성명서 원고를 주고 서명을 받아오라는 심부름을 보내시곤 했다. 서울이 아닌 대전에 머물고 있던 유진오 선생 댁에 감시형사들의 눈을 피해 새벽에 들러 서명을 받아온 다음 아무 일 없는 듯이 출근하기도 했다.

유신체제가 선포되고 두 차례 언론자유선언 사건이 있었지만, 박정희 독재정권은 언론의 숨통을 질식시키고 있었다. 언론자유운동에 열심이고 정권에 비판적인 기사를 쓰는 기자를 하루아침에 편집부서가 아닌 광고국으로 전보하기도 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산업화로 대형화하기 시작한 재벌기업들이 사원들에 대한 처우를 비약적으로 올리자 언론사들의 급료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격차가 생겼다. 이때부터 적지 않은 수의 유능한 언론인들이 재계나 관계로 자리를 옮겨갔고 또 일부 언론인들은 장래에 깊은 회의를 품고 유학길을 떠나기도 했다. 언론자유의 마지막 보루라고 믿으면서 동아일보사에 근무하던 젊은 언론인들은 요즘 세태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독립운동 하는 심경으로자유언론운동에 매달렸다. 대학생들이 동아일보사 앞에 몰려와서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펼침막을 앞세우고 언론화형식 시위를 벌일 때, 후배들에게 그 같은 욕을 먹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했다.

제대로 특종기사를 쓰고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논설을 쓰는 일이 신분상의 불이익을 당하고 정보수사기관에 끌려가 온갖 모욕과 구타를 당하는 시국을 맞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언론인들은 비상한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 대응방안이 언론노동조합의 결성이었다.

19743월 동아일보의 언론인들은 당시에 언론노조가 없었으므로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 분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사주측은 즉시 대량해임, 무기정직 처분으로 대응했다. 노조 측은 노동조합의 성립을 기정사실화하고 조합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동아일보사에서 노동조합 결성 문제로 긴장이 조성되고 있던 19744월초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발표되었고 수백 명의 학생, 지식인, 종교인, 작가, 예술인들이 구속되었다. 무더기 구속에 따른 고문조작수사 의혹이 제기되었고 종교계를 비롯한 지식인 사회에서는 공포감 속에서도 그대로 있을 수 없다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명동성당, 기독교회관 등지에서 열리는 민청학련, 인혁당 구속인사를 위한 기도회는 문화부와 사회부 경찰출입 기자가 담당하는 행사였다. 다른 신문사와 방송사의 기자들은 아예 행사장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기자들만 나타나 열심히 취재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취재해 송고하는 기사들도 실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시국사건기사들은 중앙정보부 등 정보수사기관의 간섭과 통제로 철저히 보도되지 못했다. 그런 현장에 나가 취재하는 동아 기자들에게도 구속자 가족들의 항의가 빗발쳤다. “나가지도 않을 기사를 왜 취재하느냐”, “너희들 중앙정보부의 하청 받고 대리 정보수집하는 것 아니냐는 등의 항의를 하면서 취재기자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도 했다. 유신군사법정에서는 사형, 무기징역, 20~15년 징역형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법정에서 변론하던 변호사가 변호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던 시절이었다.

이런 사태를 맞아 동아노조는 다시 결단해야 했다. 우리가 언론노조를 만들어 조직을 확대·강화했던 것도 단지 신분보장 받고 월급 몇 푼 더 받자고 한 일은 아니었다. 민주주의 파괴행위에 맞서 자유언론의 책무를 다하려고 언론노조를 결성한 것이었다. 우리는 19741024일 국제연합 창립일(유엔데이)인 공휴일에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그 이전에 몇 차례 있었던 언론자유선언이 아니라 자유언론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동아 언론인들 입장에서는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유신독재정권과 정면으로 대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1974년 연말에 다가서자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는 점차 광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유신정권의 동아에 대한 광고탄압이 시작된 것이었다. 성탄절 임박해서는 완전히 광고가 사라졌다. 텅빈 광고지면에는 자유언론, 민주주의 회복, 구속자 석방, 유신헌법 개정, 학원의 자유 등을 기원하는 격려광고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백지광고 지면에는 민주주의의 성찬(盛饌), 축제가 벌어졌다. 세계 언론사에 전례가 없는 백지광고 탄압사태는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동아노조의 대변인(섭외부장)을 맡고 있던 나는 동아일보사로 찾아오는 국내외 외신기자들의 취재에 응해야 했다. 기자 자신이 취재원이 된 것이다.

1975년에 들어서자 동아일보사 내외에서는 박정희 정권이 사주 측을 압박하여 자유언론에 앞장서고 있는 언론인들을 축출하려는 것이 백지광고탄압의 공공연한 의도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사주 측은 2월에는 기구축소라는 이유를 내세워 자유언론운동에 앞장서고 있던 기자들이 소속된 부서를 없애면서 그들을 해임시켰다. 이에 항의하는 기자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량 해임·징계했다. 동아의 언론인들은 제작거부를 하면서 사내 농성에 들어갔다. 1975317일 새벽 사주 측은 폭력배들을 동원, 농성하던 남녀 언론인들을 몽둥이와 쇠파이프를 휘둘러 사외로 내쫓았다. 유신정권과 이에 야합한 동아 사주가 합작하여 동아언론인들을 축출한 것이었다. 자유언론을 실천한 동아언론인들의 38년에 걸친 거친 들판의 삶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청우회 사건으로 1차 투옥

유신체제 아래서 체제 밖의 삶이란 바로 국가폭력에 내맡겨진다는 뜻이었다. 언제 어디서 개인이 사라지고 구속되고 고문당하는지 알 수 없던 시절이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 해직된 134명의 언론인들은 축출된 바로 다음날 한국언론회관에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약칭 동아투위)를 결성했다. 초대위원장은 나와 함께 문화부에서 차장으로 일했던 권영자 선배가 맡았다. 나는 동아노조에 이어서 동아투위의 대변인 역할도 맡았다. 동아투위는 동아 언론인들 대량축출의 부당성과 자유언론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뛰어다녔다. 필경(筆耕)과 등사판을 이용하여 매일 유인물을 수백부씩 만들어서 외신기자들, 다른 언론사 기자들, 대학교수들, 문화예술인들에게 배포했다. 시간이 흐르자 중앙정보부 등 수사정보기관에서는 동아투위원들의 그런 활동을 주시하기 시작했고 특히 나의 외신기자접촉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드디어 여러 가지 이유로 동아투위원들이 구속되거나 구류처분당하는 일이 계속 벌어졌다. 서울대 학생회에서 동아언론인 집단해고사태의 부당성을 알리고 자유언론투쟁의 정당성을 알리는 연극 진동아굿을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현장에 갔다가 학생들의 요청으로 동아사태의 전말을 설명한 것이 내가 첫 번째 구류처분을 당한 이유였다.

동아언론인들을 회사 밖으로 축출한 이상, 그들의 자유언론 투쟁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그래서 그들이 축출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필자가 미리 각오한 바이기는 했지만 정권탄압의 촉수가 점차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9755월초 미국 AP통신의 부사장 겸 대기자인 존 로더릭이 서울을 방문, 동아일보 사태를 취재하겠다고 해서, 자유언론 농성현장을 우리와 함께 지키다가 함께 쫓겨난 제임스 시노트 신부의 안내로 그를 플라자 호텔 로비 커피점에서 만났다. 우리 회견 자리 주변에서는 중앙정보부원을 비롯한 여러 정보기관원들이 촉각을 세우고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의 화제는 동아사태뿐 아니라 민청학련 사건과 처형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혁당 희생자들에 관한 것 등 꽤 광범한 내용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돈 오버도퍼, 뉴욕타임스의 리차드 핼로런 등 미국, 영국, 유럽, 일본의 여러 외신기자들을 만날 때마다 숨바꼭질이 있었고 기관원들이 주변을 맴돌았다. 동아 언론인들이 축출되기 얼마 전에 유신국회에서는 외국인에게 대한민국 정부를 비판하는 발언을 하는 경우, 국가모독죄로 처벌할 수 있는 형법 1042항이 개정, 신설되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나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동아투위원들에게 가혹한 운명이 너울처럼 겹쳐왔다. 학교 다닐 때 같은 서클 선배였고 동아일보사에 먼저 들어왔다가 민주화운동에 전념하겠다고 회사를 그 얼마 전 떠난 이창홍이 중앙정보부에 자수하여 필자와 성유보 그리고 정정봉이라는 또 다른 선배와 만나 나눴던 이야기들을 모두 털어놨다는 것이었다. 우리들과 이창홍은 동아일보 안의 여러 문제들에 관한 이야기도 나눴지만, 그보다 그는 민청학련 사건의 이현배 등 주모자급 후배들을 만나 간여한 것 때문에 수배를 당하고 있었다. 그 후배들이 사형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것 때문에 충격과 공포에 짓눌려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졌다가 제 발로 중앙정보부에 걸어 들어갔다고 그의 부인이 나에게 알려왔다. 이창홍은 민청학련에 관련된 것이 아니었고 나와 성유보 등과 동아의 자유언론운동에 간여했다는 쪽으로 정보부에서 진술했다는 것이었다. 즉 무거운 쪽으로부터는 빠져나오고 가벼운 쪽을 자수했다는 것이었다. 나눈 이야기라는 것이 대수로운 것이 못돼서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19756월초 나는 돌을 갓 넘긴 첫 딸과 함께 둘째 아이의 출산을 위해 친정이 있는 부산에 머물고 있던 아내를 만나러 갔다. 둘째 아이는 아들이었다. 출산 사흘 만에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언론회관 투위 모임에 나갔다가 중앙정보부원들에게 동지들이 보는 앞에서 연행됐다. 두 어린 것을 데리고 친정에 머물고 있던 아내의 얼굴이 연행 순간 떠올랐다. 그리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중앙정보부 6국, 이른바 정치적 사건을 다루는 수사국에서 조사받았다. 민청학련, 인혁당 사건, 최종길 교수 고문치사 사건 등을 다룬 악명 높은 부서였다. 수사관들은 나를 의도적으로 조금 먼 거리에 있는 3층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그곳이 최 교수가 뛰어내려 자살한 곳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를 담당한 수사관은 3명이었는데 2명은 경찰 수사관 출신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헌병 출신이었다. 경찰 출신 가운데 한 사람은 50대 중반의 나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나를 넘겨받자마자 지하실의 골방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곳에는 한쪽에 야전침대 몽둥이들이 잔뜩 쌓여 있었는데 그는 다짜고짜 나를 엎드려뻐쳐 자세를 시키고 이른바 빠따를 치기 시작했다. 짙은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그는 “너희 서울대놈 새끼들은 힘들여 가르쳐 놓으니까 빨갱이나 된다. 무엇이 부족해서 역적이 되느냐”고 미친 듯이 소리치면서 때렸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조사나 해보고 말합시다”라면서 실랑이를 벌였다. 그 뒤의 조사과정에서도 그는 선임자로서 옆에 서 있으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커다란 삼각뿔자로 나의 등과 어깨를 때리고 때로는 찌르기도 했다. 사흘 동안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나는 심한 설사증세를 보였다. 그는 나를 지하 조사실로 끌고 가서 다시 구타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설사를 해버렸다. 그를 수행했던 공채출신 보조 수사관이 그를 만류했고 나를 샤워실로 데리고 가서 씻도록 해주었다.

그날 밤 지하 3층 조사실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데 문을 열고 누가 들어섰다. 겁이 덜컥 났다. 들어선 사람은 큰 주전자를 들고 있었다. 물고문을 하려고 왔나보다고 긴장했다. 나의 고등학교 1년 선배, 유명한 럭비선수 성 모씨가 서 있었다. “마음 놔, 네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서 찾아왔다. 술이나 한 잔 하자”면서 반말들이 대주전자에 생맥주를 가득 담고 점퍼 주머니에 닭튀김을 넣고 나타났다. 그가 정보부 수사관으로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풍편으로 들은 바 있었다. 그날 그와 나는 새벽 3시에 가깝도록 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언론자유 문제로 이렇게 다루는 것에 대해 불만을 말하자 자기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런 시국에서는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다고 위로했다. 오래 고생하지 않을 것이니까 몸만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정말 그 다음날부터 평안도 말씨의 서북청년단 출신은 나타나지 않고 다른 수사관이 보충되었다. 수사는 이창홍의 진술대로 진행되었다. 고대 총장을 지낸 김상협의 <모택동 사상>과 육군사관학교 교재인 버트람 울프의 <레닌에서 흐루시쵸프까지>라는 책(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시리즈)이 내가 공산주의에 심취해서 읽은 책으로 압수목록에 들어갔다.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그리고 긴급조치 9호와 형법 104조 2항(국가모독)이 나에게 적용된 법령이었다. 이른바 ‘청우회’ 사건이라는 대단한 사건으로 포장되어 발표되었다.

1심 재판 때 나는 서울지법과 영등포지원 두 곳을 번갈아 가면서 출정했다. 이른바 ‘청우회’ 사건의 경우엔 서울지법에서, 이신범이 관계된 서울대 데모 배후조종 혐의에 대해서는 영등포지원에서 재판 받았다. 사건들이 폭주해서 재판을 늦게 시작한 탓으로 한 주일에 3회 이상 재판정에 나갔다. 1심 재판의 형량은 ‘청우회’ 사건의 경우 구형 15년에 선고 8년, 서울대 데모 배후조종의 경우는 구형 3년에 선고 1년, 도합 구형 18년에 선고 9년이었다. 한겨울 추운 날씨에 구치소로, 재판정으로 쫓아다니던 아내는 1심 선고가 있던 날, 장기형을 선고받고 나오는 나에게 “여보, 밥 잘 먹고 기운내요”라고 소리쳤다. 기죽지 말고 건강해야한다는 뜻이겠지, 나는 미소로 답했다. 많은 동료 동아투위원들이 재판정에 응원 나와 주었다. 박정희 유신정권이 나와 성유보가 관련된 ‘청우회’ 사건을 통해 동아자유언론운동을 왜곡하고 유린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굳굳하게 우리를 믿고 성원해 주었다.

나는 서울지법에서 재판받는 동안 취재하러온 지난날의 언론사 동료 기자들과 자주 얼굴을 마주쳤다. 동아 기자들은 차마 우리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다른 언론사 기자들은 다가와 따듯한 위로의 한두 마디 말을 건네고 갔다. 시세 흐름에 빠르기로 소문났던 몇몇 기자들은 “꼴좋다. 그렇게 날뛰더니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모욕적인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박정희 정권뿐 아니라 전두환·노태우 정권 그리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서도 언론계에서 승승장구했다. 어떤 정치상황에서도 더 빨리, 오히려 앞서 순응해나가는 저들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 뒤로도 계속 고민한 주제였다.

1심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영등포구치소에 갇혀 있었다. 1975년 한여름 8월 20일 경 아내가 초췌한 얼굴로 면회 왔다. 장준하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추락사하셨다고 발표되었지만 믿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내는 장 선생께서 8월 17일 돌아가시고 장사를 치른 다음 바로 면회왔다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심경이었다. 나는 나의 작은 독방(0.72평)에서 사과와 참외, 그곳의 밥과 찬으로 제상을 차리고 홀로 장례식을 올렸다. 선생님의 독립, 민주, 통일의 유지를 이어갈 것을 다짐했다. 항소심 재판은 싱겁게 끝났다. 심리할 것이 없었다. 항소심은 1심 선고 9년 형을 2년 6월 징역형으로 줄였다.

우리들을 변호해준 분들은 홍성우·황인철·이돈명·강신옥·조준희·이범열 변호사였다. 홍성우· 황인철 변호사는 동아 노조 때부터 한결같이 우리와 함께 해주었다. 그 뒤 숱한 나의 송사에 그 분들은 선배가 되고 동지가 되어 주었다. 나의 대학 동기이자 민주화운동을 뒷바라지해온 김정남은 홍성우 변호사와 황인철 변호사를 위해 재판 준비를 도왔다. 항소심 재판 동안에 머물렀던 서울구치소에서는 더 많은 시국사범 인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영등포구치소가 서울대생들 천지였다면 서울구치소는 전국의 남녀노소 정치범들의 집합소 같은 곳이었다. 함세웅·문정현 신부 같은 종교인, 김지하 시인, 한승헌 변호사, 최열·조성우·서상섭 등 청년활동가들이 갇혀 있었다.

김지하 시인에게 나는 마음의 큰 부담을 지고 있었다. 1975년 2월 그가 민청학련 사건에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을 때, 나는 그로부터 ‘고행 1974년’이라는 제목의 옥중수기를 받아 동아일보에 실었다. 무엇보다 그 글에 인혁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다는 사형수 하재완의 증언이 최초로 공개됐다. 이제는 인혁당 사건이 고문 조작으로 8명의 생명을 사법살인한 치욕적 사건으로 판결되어 법원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지만 당시에는 그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김 시인은 바로 재수감되어 그 자신이 박 정권의 사법살인의 희생양 처지를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를 살리기 위한 ‘양심선언’ 반출 작전이 내가 서울구치소에 머무는 동안 진행되고 있었다. 김정남-전병용 라인이 움직이고 있었다. 당시 서울구치소 교도관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인사들이 유신반대 취지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여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민주인사들을 돕고 있었다. 지금은 모두 은퇴했지만 전병용, 한재동, 김제술, 최양호, 안유 등 여러 헌신적인 동지들을 만났다. 지금도 그 때 만났던 교도관 출신 인사들의 친목모임에서 가끔 나를 불러 함께 산에도 가고 회식을 하기도 한다.

항소심에서 2년 6월형이 확정되자 나는 안양교도소로 이감되었다. 역시 그곳에도 30여명의 정치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정치범들과 함께 수용되기 전, 한 달 동안 5평 남짓 되는 감방에서 14명의 일반수들, 다시 말해 강절도범과 사기범들과 함께 생활했다. 한 여름 뜨거운 슬라브 지붕 밑의 2층 감방 안은 사람들의 체열까지 더해져 한증막이나 다름없었다. 용케 참다가 자주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팬티만 걸치고 있어도 더웠다. 대법원 확정 판결이 있자 이른바 형 확정방으로 옮겼는데 그곳이 정치범들만 모아 놓은 곳이었다.

나는 연세대 출신으로 나중에 농민운동가가 된 강기종 군 그리고 서울대 출신으로 노동운동가가 되었다가 지금은 변호사가 된 송병춘 군과 한 방에 살게 되었다. 그곳에는 이미 영등포와 서울 구치소에서 만났던 이호웅, 최열, 조성우, 이명준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의 김효순 등 학생운동 출신들과 이창복, 김종대, 황현승, 정만진, 이재형 등 인혁당 사건 인사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하루 한 번 30분 동안의 운동시간에 넓은 운동장에서 함께 축구시합을 하는 것이 큰 낙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30분을 뛰고 나서 세면장에서 찬물로 목욕하고 나면 상쾌했다. 감방 안에서는 열심히 공부했다. 여러 차례의 감옥살이 가운데 꽤 충실한 생활이었던 것으로 기억됐다. 책 검열이 엄격해서 성경 등 종교서적과 문학 서적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아놀드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총서 12권을 처음부터 읽어나갔다. 그곳에서 맺어진 인연들은 그 후 민주화운동을 전개해 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안양교도소의 행복한(?) 수용생활은 1976년 연말에 끝났다. 나는 인혁당 사건 관련자 이창복·김종대 선생과 학생운동 관련자 이명준 등과 함께 전주교도소로 이송됐다. 이제 본격적인 고생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주교도소의 특별사동에 수용됐다. 특별사동이란 정말 특별한 사람들만 수용된 곳이었다. 이미 먼저 와 있던 인혁당 관련자 전창일·유진곤·김한덕· 강창덕 선생 그리고 천주교 수사 김명식 선생, 오래 전 그러니까 10~20여년 전부터 수용되어 있던 미전향 장기수 15명 정도가 그 특별사동에 갇혀 있었다. 특별사동의 왼쪽 남향으로만 0.72평짜리 독방 32개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중앙정보부의 직할통제를 받는 ‘전향공작반’이 교도소의 교무과 안에 배속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 ‘반정부 정치범들’을 미전향 장기수들 감방 사이사이에 끼워 넣어 수용했다. 그리고 미전향 장기수들과 통방하면 국가보안법 추가기소를 하겠다고 엄포를 놨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첫 번째 환경 변화는 좁은 방안에 높이 달린 스피커를 통해 고음으로 흘러나오는, 전날 방송된 10분짜리 KBS 대북방송이었다. 오승용이라는 성우가 진행하던 그 프로는 “김일성이 이 놈, 네가 제 명에 죽을 줄 아느냐···.” 뭐 그런 내용이었다. 좁은 방안에서 하루에 10차례 이상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듣도록 하는 ‘전향공작’이었다. 소리를 피하기 위해 창문 쪽으로 달린 변소 안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 봐도 사동 전체를 울리는 방송 소음을 피할 길 없었다. 그것은 심리전 고문이었다. 그러나 우리보다 먼저 와서 생활하고 있던 수용자들 쪽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나는 작심하고 일종의 난동(?)을 부렸다. 감방 문짝을 발로 차고 소리를 질렀다. “방송 고문 중단하라”면서 교도소장 면담을 요구했다. 그러자 교무과장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나는 방송을 중단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는 그 조치는 오래 전부터 해온 것으로 중단할 수 없으며 오히려 나와 같은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의 전향공작을 더욱 강화할 예정이라고 통고했다. 혹 떼려다 혹을 붙인 꼴이 되었다. 나는 전향해야 할 대상이 없는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전향공작을 거부한다고 통보했다. 다시 감방 안으로 들어와서 방송이 나오면 계속 방문을 걷어차고 소리를 질렀다. 며칠 이런 상태가 계속되자 방송의 횟수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중단되었다.

어느 겨울날 하루 30분 두 명씩 운동하도록 하는 운동시간에 옆방 미전향 장기수 고광인 선생이 나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방송소리 시간 조금 지나면 자장가처럼 들려요.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에요. 1973년 사회안전법(미전향수가 전향하지 않으면 2년마다 심사하여 수감을 연장토록 한 법)이 생기고 나서 이 독방에 깡패를 함께 넣어서 두들겨 패도록 했고 한 겨울에 방 안에 찬물을 끼얹어서 폐렴에 걸려 죽게 만들곤 했어요.” 전향공작반원들이 전향에 성공하면 성공보수를 받도록 했기 때문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 그래도 1975년부터 긴급조치로 반정부 정치범들이 들어오면서 전향공작이 부드러워졌다는 것이었다. 1976년의 겨울 추위는 혹독했다. 밖의 기온이 영하 10도 정도이면 독방의 실내 온도는 13~14도로 내려갔다. 시멘트 응달의 냉장효과가 더해지는 탓이었다. 잠자고 일어나면 뺨과 코가 얼었다. 마루 바닥에 깔고 자는 가마니와 요는 마루바닥 아래 찬 공기와 체온 탓으로 습기에 흠뻑 젖었다. 한 겨울에 말릴 곳도 마땅치 않아 다시 그대로 깔고 잤다.

1977년 2월 문익환 목사께서 전주교도소로 이감 오셨다. 1976년 ‘3·1구국선언’이 있은 뒤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것이었다. 절친한 친구 장준하 선생이 1975년 8월 의문의 죽음을 당하신 것에 격분, “장준하의 혼이 나를 씌웠다”면서 민주화운동에 뛰어든 문 목사는 그 뒤 1980년대 동안 내가 모시고 운동을 벌인 어른이었다. 우리의 인연은 전주교도소에서 맺어졌다. 그 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청년이셨다. 나는 그분의 동생이신 문동환 목사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분은 전주에서 처음 만났다. 아직 한 겨울인데도 사모님 고생시키지 않겠다면서 세면장에서 손수 빨래를 하시고 우리들에게는 요가수행 방법이나 심신단련법을 가르치셨다. 그 즈음에는 정치범들 사이의 통방(뒤 창문으로 수감자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이 수월해져 있었다.

내가 이감 온 이후 특별사동을 내려다보는 바로 옆의 2사 상층의 일반 재소자들이 특별사동의 정치범들이 통방하는 것을 내려다보고 전향공작반에 고자질해서, 공작반이 국가보안법 추가기소하겠다고 소동을 벌이고 특별사동의 각개 독방 뒤 창문을 나무판자로 막아버린 사건이 있었다. 방 안에서 하늘을 바라볼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 손바닥만한 하늘이라도 바라볼 수 있게 해달라고 항의해서 겨우 나무판자를 제거할 수 있었다. 일반 재소자들은 정치범들의 통방을 고발하면 감형과 가출옥의 혜택을 볼 수 있었다. 그에 대한 대응방안으로 정치범들은 호를 지어 서로를 부르면서 통방했다. 그래서 한문에 능한 인혁당 장기수 강창덕 선생이 나에게는 청우(靑牛)라는 호를 지어 주셨다. 나는 강 선생께 “하필 공화당의 상징인 소를 붙여 호를 지어 주셨느냐”고 항의했더니, “젊은 나이에 왕성하게 일할 사람이어서 그랬다”는 말씀이었다. 예를 들면 문익환 목사님이 나에게 통방하시려면, “9방 이부영 동지 좀 나오시게”처럼 일반재소자들이 모두 알아듣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청우 동지, 좀 나오시게”라고 부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작은 오해가 생기곤 했다. 나의 사건 이름이 ‘청우회’(靑友會)여서 호도 그렇게 지은 것이 아니냐는 게다. 그것은 전혀 관계없는 일이었다. 지금도 나는 강 선생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비록 강 선생이 자신의 호를 나의 호보다 더 멋있는 야성(野星) 또는 들별이라고 지은 것에 불평을 말하곤 했지만.

1977년 5월에 접어들면서 전향공작반에서는 전향서가 아니라 반성문을 쓰면 석방하겠다는 제의를 했다. 그것도 모든 반정부 정치범에 대해서가 아니라 형량이 얼마 남지 않은 극히 일부 인사들을 대상으로 한 공작이었다. 확신범의 경우 자신의 신념을 굽혔다는 죄의식 때문에 더 이상 민주화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만들려는 저의가 깔려 있었다. 우리는 단식투쟁으로 저항했다. 교도소 측은 나를 특별사동에서 떼어내 병사로 옮겨놓았다. 그곳에서 의외의 인물 강문봉 장군을 만났다. 그는 1976년 10월 국군의 날 행사장에서 박정희를 저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고 했다. 그가 1956년에 일어난 특무대장 김창룡 장군 저격암살사건의 배후로 지목되어 구속되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었다.

강 장군은 해방 직후부터 1976년 당시까지도 한국 정계와 군부를 배후에서 움직이던 미8군 사령관 고문 하우스만을 만난 것이 박정희를 저격하려 했다는 혐의로 둔갑하여 구속된 것이었다. 중장으로 예편한 강 장군은 4·19혁명으로 석방되었다가 5·16 뒤에 공화당 국회의원, 대사로 기용되었고 유신 선포 뒤에는 유정회 국회의원으로도 활동했다. 박정희와는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 선후배 사이였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사흘 동안 아무 말도 없이 매만 맞았다고 했다. 1977년 11월 교도소 안의 바람은 벌써 겨울이었다. 대법원 형이 확정된 강 장군이 머리를 깎는 날이었다. 병사 작은 뒷마당의 앉은뱅이 의자에 앉아 강 장군이 머리를 깎고 있었다. 그 앞을 전향한 좌익 무기수 몇 사람이 출역(出役)차 지나가다가 강 장군을 보고 “당신 강문봉 장군 아니시오. 어찌 된 일이요?”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지난 1957년 처음 강 장군이 구속되었을 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났던 장기수들을 20년 만에 다시 만난 것이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서로 건강히 지내시라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는 1977년 12월 28일 2년 7개월 만에 옥문을 나섰다. 아내와 동아투위의 여러 동료들이 마중 나와 주었다. 아직 유신체제는 계속되고 있었다. 민주주의 파괴와 인권탄압으로 미국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월남 패망과 주한미군 철수 압박으로 불안해진 박정희 정권이 핵무기와 미사일을 개발함으로써 미국의 경계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강문봉 장군과 하우스만의 만남이 떠올랐다.

내가 구속되었을 때 나의 거처는 불광동 천관우 선생 댁 부근 전세 집이었지만 아내는 내가 없는 동안 집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청와대 바로 뒤 인왕산 기슭의 청운아파트 10평짜리였다. 내가 없는 2년 7개월 동안 여섯 차례 삭월세방을 전전한 모양이었다. 연년생 어린 아이들이 딸렸다고 해서 삭월세방을 얻지 못해 고통을 겪은 얘기도 들려주었다. 생활비는 부산에서 한성여대 교수로 계시던 장모님이 감당하셨다. 또한 동아투위와 여러 민주인사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했다. 아내는 두 어린 것들 데리고 나의 재판정에 가고 교도소에 면회 나다니면서도 근검절약해서 나의 출옥에 맞춰 작은 보금자리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친구들은 내가 없어야 우리 재산이 늘어나는 모양이라고 놀렸다. 동아투위는 1977년 송년회를 나의 출소를 환영하는 모임으로 삼아 많은 민주인사들을 초청, 민주화와 자유언론의 성취를 다짐하는 자리로 만들었다. 고마웠고 새로운 결의를 다짐했다. 청운아파트 새 집의 두 개 방을 하나로 터버린 넓은 방에서 백기완 선생, 고은 시인 그리고 많은 투위 동지들과 후배들이 함께 모여 나의 출소를 축하해주었다.

박정희는 갔으나 유신은 끝나지 않았다

동아투위 동료들에 대한 유신 정권의 감시와 통제는 해직 초기보다는 다소 완화되기는 했어도 언론계에만은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했다. 나의 경우는 택할 수 있는 길이 더 좁았다. 정권과 타협하지 않는 이상, 나는 국보법, 반공법, 긴급조치 등을 위반한 전과자였으므로 감시대상일 뿐 아니라 언제라도 재수감할 수 있는 사회안전법 대상이었다. 실제로 해당경찰서 정보과에서는 사회안전법 대상자로 분류하여 수시로 호구조사를 나왔다. 나는 우선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영미 소설, 사회과학 서적의 번역에 매달렸다. 당시 동아투위에서는 안종필 위원장을 중심으로 안성열, 박종만 등이 제도언론에서 1년 동안 외면하고 보도하지 않은 사건들을 수집, 1978년 10월 24일 자유언론선언 4주년을 맞아 ‘10·24민주·인권일지’를 발간했다. 이 사건으로 해서 안종필 위원장과 홍종민 총무를 비롯해서 안성열, 장윤환, 윤활식, 박종만, 성유보, 이기중, 김종철, 정연주 등 10명의 투위원들이 구속되는 ‘언론인 대거구속사건’이 일어났다. 주요 투위원들이 구속되고 상당수가 불구속 기소되었으므로 나로서도 달리 방관할 길이 없었다. 구속된 투위원들의 법정투쟁과 옥바라지, 가족들과의 연락 등을 떠맡게 되었다.

아직 다수 투위원들의 재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10·26 박정희 피살사건이 일어났다.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10월말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열어 최규하 권한대행을 새 대통령으로 다시 뽑겠다는 발표가 나왔다. 제2기 유신대통령을 내서는 안 된다는 국민의 소리가 나와야 했다. 나는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동아·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그리고 제적학생들의 모임인 민주청년협의회 등 5개 단체 이름으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윤보선 전 대통령 저택에서 발표했다. 5개 단체의 대표급 인사 18명이 계엄당국의 체포로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받았다. 그러나 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백낙청·이우정·김찬국 교수, 이병주·정태기 동아-조선투위 위원장 등 나머지 인사 17명은 모두 석방되었다. 나는 보안사 서울분실로 넘겨졌다가 곧 서울구치소와 육군형무소(일명 남한산성)로 옮겨졌다. 그 사이에 신군부의 12·12반란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나는 김재규 중정부장의 의전실장인 박선호 예비역 해병대령을 비밀리에 만났다. 그들은 10·26사건에 대한 군법회의의 재판을 받고 있었다. 서울구치소에서 어느 간부직원의 호의로 감독의 눈이 거의 없는 휴일에 그와 단독으로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를 만나려고 한 까닭은 그가 김재규 부장의 측근이었으므로 동아투위 사건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자 말자 손을 맞잡고 “귀하들의 손이 역사를 바꿔놨다”고 치하했다. 그는 무인답게 호방했다. 1976년 김재규 건설부 장관이 중정부장으로 취임하면서 현안(懸案)으로 인계받은 것 가운데 동아투위 문제가 들어 있었으며 그 문서 속에 “정부의 방침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내용의 김상만 동아일보 사장의 각서가 들어 있었다”고 기억해 주었다. 중정 안가에서 박정희를 위한 술자리를 준비하는 업무를 책임졌던 그는 수많은 여성 연예인들과 가수들을 불러 들였다고 했다. 그는 1981년 5월 김재규 부장과 함께 처형당했다.

나는 대전교도소를 거쳐 70~80년대 민주화운동 수감자들의 기피대상 1호시설인 대구교도소에 수감됐다. 박정희·전두환의 본거지인 대구는 군사독재 반대자들에게 극단적인 적의를 보였다. 나는 대구교도소 2사 하의 독방에 갇혔다. 일반재소자들뿐인 사동의 독방에 내가 왔으니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을이 짙어가는 어느 날, 1사 특별사동 쪽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이부영 형, 나 서승이요. 창문으로 나와 보세요.” 재일교포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1971년 구속되어 수사받다가 난로를 뒤집어써서 얼굴과 손 등 온몸에 화상을 입고 10년째 징역을 살고 있던, 지금은 일본 리쓰메이칸 대학 석좌교수인 서승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가 그곳에 온 소식을 듣고 통방을 시도한 것이었다. 나는 즉시 그의 부름에 응답했다. 그는 교무과에 나갈 테니 나에게도 함께 교무과 연출(직원 면담요청)을 신청하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고소고발을 일삼는 옆방의 노스님이 내가 빨갱이와 통방했다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고소하겠다는 것이었다. 내가 통방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 누군가 불러서 대답한 것이라고 해명, 해명해서 겨우 가라앉혔다. 그 스님은 모든 재소자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있었지만 완력이 젊은이 못지않아 아무 것도 개의치 않는 태도로 생활했다. 승려였고 내연의 여인을 살해했고 그리고 모든 일에 공격적이고 고소를 일삼는다니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냥 먼 산 바라보듯 생활하는 수밖에 없었다.

늦가을에 접어들자 교도소 안이 웅성거리고 교도관들이 군복으로 갈아입는 등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바뀌었다. 삼청교육 혹은 순화교육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수감되어 있는 재소자는 예외 없이 교육을 이수한다는 것이다. 국가보안법으로 복역하고 있는 미전향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1980년 11월말부터 12월말까지 한 달여 동안 나는 군대의 PT체조, 봉체조, 포복 등 군부대의 삼청교육대에서 실시했다는 악명 높은 폭력적 훈련을 받았다. 80년 겨울엔 대구에도 눈이 많이 내렸다. 연병장에 눈이 내리면 눈을 쓸어 쌓았다. 쌓인 눈 더미는 흙과 잔돌들이 뒤섞인 채 젊은이 키 한 길 정도 높이로 연병장 군데군데 무더기를 이뤘다.

군대에서 나온 조교들은 빨간 모자를 쓰고 국보위 몽둥이를 휘둘렀다. “앞으로 포복, 좌로 굴러, 우로 굴러, 뒤로 포복.” 장난감 다루듯 훈련생들을 부리다가 그들은 별안간 “포복 전진 앞으로, 눈 더미 굴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소리 지르면서 국보위 몽둥이로 훈련생들 엉덩이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내려치는 몽둥이를 피하고자 눈 더미를 열 손가락으로 허우적거리면서 파헤쳤다. 그 순간 저쪽 눈 더미에서 건장한 청년 한 명이 벌떡 일어서면서 “에이 씨팔!!” 소리 지르면서 국보위 몽둥이를 휘두르는 훈련조교를 노려봤다. 그 청년에게 몽둥이질을 하던 훈련조교는 전체 훈련생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그 청년의 옷을 팬티 한 장 남기지 않고 모두 벗겼다. 그 청년에게 자신의 생식기를 잡도록 했다. 가는 지휘봉으로 그 생식기를 내려쳤다. 그 청년은 눈 녹은 진창 속에서 지렁이처럼 몸을 떨면서 꿈틀거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 청년은 기절했고 퉁퉁 부어오른 그의 생식기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몸을 떨면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나 자신도 겁에 질려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인간의 근본을 짓밟는 그런 야만행위에 항의 한 마디 못한 나 자신에 대해 모멸감을 느낀다.

그런 삼청교육을 나는 이수했다. 나는 순화됐다고 해서 1981년 2월 25일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에 맞춰 특별사면으로 대구교도소 문을 나섰다. 1년 4개월만의 출소였다. 아내와 동아투위를 비롯한 많은 민주인사들이 영접해주었다. 대구에서 탄 고속버스 안에서는 전두환의 취임연설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폭력으로부터의 해방’ ‘정의사회 구현’ 이런 말들이 전두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바로 얼마 전까지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면서 현실과 말의 괴리, 말이 현실과 동떨어져서 허공에 둥둥 떠 다니는듯한 환각에 사로잡혔다.

나는 1980년대에도 내내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등 연대운동-연합운동에 매달려 세 차례 더 감옥살이를 했다. 구류, 가택연금을 셀 수 없이 겪었다. 한겨레신문이 창간을 준비할 때 감옥 안에 있어서 국민의 성금으로 만들어진 언론으로 돌아갈 기회를 잃었다. 1987년 양김 분열로 대통령 선거에 패배한 뒤 침체에 빠진 재야민주화운동을 재건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에도 언론 복귀를 결심하지 못했다. 결국 나 자신의 선택으로 재야에 남았고 1991년에는 분열된 야권 정당들을 재야의 주선과 압박으로 통합하여 노태우 정권의 공안탄압을 저지해야 한다는 명분에 따라 정치에 참여했다. 그러나 정치에 참여해서도 재야운동과 언론인의 시시비비 체질 때문에 순탄치 못한 역정을 걸었다.

3선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여야의 정당에서 고위간부직을 맡았다. 김일성 조문파동, 국가보안법 개폐파동을 비롯해서 많은 곡절을 겪었고 여야 정당들의 이합집산과 정쟁에 휩쓸리기도 했다. 나는 자신의 몸과 마음 속에 분단의 아픔과 상처, 치열한 정쟁의 증오와 분열의 앙금이 남아 있는 것을 알고 느낀다. 내가 재야운동을 끝내고 정치참여를 개시한 시기가 독일통일, 소연방의 해체와 동구권의 붕괴, 중국의 개혁개방(자본주의 도입), 다시 말해서 사회주의 진영의 붕괴와 탈냉전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던 때였다. 세계사적 전환은 국내정치에도 큰 전환을 요구했지만 세계에서 유일한 냉전·분단 지역으로 남아있던 한반도에는 그 전환도 가장 늦게 찾아오기 마련이었다. 2000년 6·15 남북정상선언을 한나라당에서 맞은 나는 한나라당 안에서 유일하게 그 선언에 지지를 표명했다. 견딜 수 없는 색깔론으로 탈당을 압박했고 그 선택은 종국에는 나의 정치적 운명도 결정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이후 나는 지역, 이념, 계층, 세대를 아우르는 중도적 실천에 몰두했다. 보수·진보 양측의 비난을 사기도 했다. 정치와 시민운동을 건강하게 연결하려고 노력했다. 연해주의 고려인동포들과 문화적·경제적으로 연결하는 동북아평화연대, 묘지와 납골묘를 줄이고 산지를 보존하려는 수목장실천회, 중도적 시민운동인 화해상생마당, 박정희 시대를 정리하려던 정치인 모임 민주-평화-복지 포럼, 최근의 전직 국회의원 단체인 민주헌정 포럼 등의 활동을 이어왔다. 이제 언론인, 재야운동가, 정치인의 생애도 정리해야 할 때가 가까워졌다.

끝내는 말

나는 민주화와 산업화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이 시대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수단이 아닐까 생각한다. 민주화의 연원은 3·1독립운동과 민국의 선포에 닿아 있다. 그에 비해 한국전쟁의 폐허 이후 외자도입으로 본격화된 산업화는 식민지 수탈, 전쟁파괴로 생존의 벼랑에 몰린 국민 대중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절박성에서 출발했다.

민주화와 산업화는 대한민국 국민대중의 필요를 각각 어느 정도 충족시켰다. 이제 우리 국민은 집권자를 비판한다고 잡혀가고 고문당하는 일은 겪지 않을 것이다. 터무니없이 군사쿠데타로 민주정부가 전복당하는 수모도 겪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부의 불평등, 양극화를 겪고 있어도 사회안전망과 의료보장 등 최소한의 복지제도가 마련되어가고 있다.

바로 주인(국민대중)의 부름에 심부름꾼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응답한 일이 민주화요 산업화였다. 그리고 그 혜택은 부족하기는 해도 주인에게 돌아갔다. 주인은 심부름꾼이 열심히 일하도록 서로 경쟁시키고, 주인에게 봉사하도록 요구했다. 때로는 심부름꾼이 자신의 본분을 잊고 날뛰다가 주인에게 벌 받는 일도 있었다.

오늘의 시대정신을 국민대중의 부름이라고 해석한다면 민주화와 산업화는 그 부름에 봉사한 것이었다. 부름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을까. 다소간 주관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20세기 내내 그리고 지금까지도 억눌려온 한반도 구성원의 자유와 정의의 해방 아닐까 생각한다. 분단의 해소, 즉 대륙과 해양의 원활한 소통의 접점 역할을 준비하라는, 문명의 교류와 대화를 주선하여 21세기 새로운 문명의 태동을 준비하라는 부름이 그 지향일 것이다. 국민대중은 이미 민주화와 산업화 주역들의 공로를 인정했고 포상했다. 이제 주역들은 주인의 부름의 다음 목표를 헤아리고 협력하면서 달려가야 할 것이다.

대통령선거의 먼지도 털어버릴 겸, 올해 초 좋은 벗의 초청을 받아 서울에서 대학에 다니는 북한출신 젊은이 몇 사람과 산행을 다녀왔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차별, 폐쇄성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3명 중 2명은 지금이라도 할 수만 있으면 자신들의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우리가 민주화·산업화한 것을 보고 그들은 이곳으로 목숨을 걸고 찾아왔다. 외국인 노동자들도, 동남아 여성들도 새 삶을 찾아왔다. 이제 그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들 안에서 영호남이, 보수·진보가, 세대들이, 민주화·산업화세력이 서로 대립·갈등하는 데서 비롯되었다. 우리 안에 우리 자신을 담을 여유가 없는데 하물며 어떻게 남들을 담을 수 있겠는가. 주인은 이미 웃으면서 받아들였는데 심부름꾼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성과에 재를 뿌리면서 우리를 부러워해서 찾아온 손님들까지 등을 돌리게 만들고 있다. 심호흡 한번 하고 눈을 들어 멀리 봐야겠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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