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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해직이 만들어 준 ‘미스터 스쿠프’[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15)] 윤석봉 전 동아일보사 사진부 기자, 전 로이터통신 사진기자
  • 관리자
  • 승인 2017.01.31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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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사건 현장을 찾아 생생한 순간을 영상으로 취재한 사진기자였다. 내가 카메라와 인연을 맺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뒷동산에 텐트가 몇 개 쳐져 있고 총을 멘 외국 군인들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그 무렵 중공군의 대공세에 밀리던 미군들이었다. 호기심에 가득 찬 나는 매일 학교에서 돌아오면 미군들을 찾아가 그들과 놀았다. 그들은 친절했고 검과 초콜릿을 나누어 주기도 했다. 며칠 후 미군들이 떠날 때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에게 네모지고 까만 코닥 자동카메라를 선물했다. 그 이후 카메라는 내 일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꿈에 그리던 동아의 사진기자가 되다

1967년 가을, 나는 동아일보 수습기자 공채시험에 응모하여 사진기자로 합격했다. 그 무렵 동아일보의 인기와 명망은 하늘을 찌를 듯하여 수습기자 모집은 수 백 대 일의 경쟁을 보였다. 동아일보 자매 매체인 동아방송은 낮 12시 뉴스 맨 마지막에 수습기자(10기생) 합격자 명단을 발표했다. 당시 나의 아내 이정희는 충남 당진의 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아내는 교실에서 가슴을 졸이며 그 방송을 듣다가 내 이름이 나오자 제자들 앞에서 체면도 버린 채 환호작약했다고 한다. 고향 마을에서는 경사가 난 듯이 친척이며 친구들의 축하가 이어졌다. 나는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사진기자는 나의 천직이 되었다. 몸을 돌보지 않고 현장을 누볐다. 사진은 순간을 놓치면 재현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건의 현장에서 밤을 샐 때도 많았고 그야말로 생명을 걸고 모험을 감행해야 할 때도 있었다. 1969년 6월, 흑산도 무장공비 침투 사건을 취재하던 때이다. 국군과 북한 공비들 간에 교전이 벌어져 총알이 빗발쳤지만 나는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그때 내가 특종 보도한 현장 사진이 20여 년이 지난 뒤 광주민주항쟁 당시 진압군의 민간인 학살 현장 사진으로 잘못 알려져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일도 생겼다. 1988년 12월 국회의 광주민주항쟁 청문회에서 이해찬 의원이 내가 찍은 ‘흑산도 공비 소탕작전’ 사진을 제시하면서 진압군이 민간인을 학살한 증거라고 당국을 추궁했던 것이다. 그 해 <월간중앙> 3월호가 민간인 학살의 증거라며 나의 사진을 무단 게재한 것이 소동의 발단이었다. 그 소동은 나의 증언으로 싱겁게 끝났다.

3선개헌 이후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철권통치가 시작되자 학생들과 지식인, 야당 정치인들의 반발도 점점 거세어졌다. 그러나 신문에는 그런 움직임이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박 정권이 중앙정보부를 통해 학생 데모나 야당의 움직임 등 반체제 관련 기사는 물론 연탄 파동 같은 서민생활 관련 기사까지 신문에 싣지 못하게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아예 신문사 편집국에 상주하면서 “기사를 넣어라, 빼라” 하며 일일이 간섭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지 않으면 해당 기자와 편집국 간부들을 남산(중앙정보부)으로 끌고가 협박과 폭행을 일삼았다. 그래서 현장에 나가면 학생들이 “싣지도 못할 사진을 왜 찍느냐? 경찰 끄나풀 아니냐?”며 심한 욕설을 퍼부었으며 때로는 돌을 던지기도 했다. 나는 헬멧과 방독면으로 중무장하고 현장을 뛰었지만 데모를 벌이는 학생들과 이를 막는 경찰,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 받는 처지가 못 되었다. 그나마 어렵게 취재한 현장 사진이 보도도 되지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때는 정말 비통했다.

나는 1975년 3월 17일, 동료언론인들과 함께 동아일보사에서 폭력에 밀려 쫓겨났다. 그 당시 동아일보사는 광고 탄압을 받고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도록 광고주들을 협박했던 것이다. 동아일보사는 “광고 탄압으로 경영이 어려워져 할 수 없이 일부 기구를 축소하고 기자들을 해고 했는데, 이에 항의하는 다른 기자들이 집단으로 제작을 거부하며 위계질서를 문란시켰기 때문에 이를 바로 잡기 위해 취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해고 이유를 밝혔지만, 그런 해명은 터무니없이 부당한 것이었다. 나는 동아일보사에서 근무한 7년 반 동안 해마다 특종상과 노력상을 받을 정도로 최선을 다했으며, 상급자나 동료들과 사소한 갈등도 없이 원만한 직장생활을 했다. 그렇다고 내가 집단행동의 선봉에 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회사측은 나를 4차 해고자 명단에 넣었다. 그것도 나에게 소명할 기회조차 전혀 주지 않은 채.

광고 탄압이 몇 달째 계속되자 동아일보사는 이를 모면하기 위해 자유언론 실천에 앞장선 기자들을 내쫓아 당국의 환심을 사려고 작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해고당하고 빚더미에

신문사에서 쫓겨나자 당장 살림이 어려워졌다. 아내가 교편을 잡고 있었지만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홀로 된 어머니와 동생, 그리고 어린 네 딸 등 여덟 식구의 셋집살이가 너무 힘들어 용산구 효창동 재건축 단지에 집을 지은 것이 큰 부담이 되었다. 내가 회사를 다니는 동안 내 월급은 그 때 끌어 쓴 은행 빚과 사채의 이자로 몽땅 나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해고되었으니 아내의 월급으로 이자를 내야 했고, 그러다 보니 당장 생활비 마련이 막막했다. 나는 백방으로 일 할 곳을 찾았으나 모조리 거절당했다. 그렇게 절박한 상황에 용산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 매일 집에 찾아와 나의 행방을 감시하고 심지어 집안에 들어와 “이 피아노는 어떻게 샀느냐?”면서 죄인 심문하듯 캐묻기까지 했다. 그들의 행패가 어찌나 심하던지 꾹꾹 참고 지내던 아내가 어느 날인가 마침내 폭발했다. “그것은 남편이 실직하기 전에 월부로 산 것이다. 당신들이 우리 남편 잘랐으니 월부금을 대신 내달라”고 호통을 쳤다.

실직 기간이 길어지면서 사기는 저하됐고 안과 밖에서 코너에 몰릴 즈음 입사 동기인 이종대, 박순철, 조학래, 권근술, 박종만이 자리를 함께했다. 현실적으로 직장 구하기는 불가능하니 당국의 관심에서 멀어지도록 돌파구를 찾아보자고 의논했다. 그리하여 조그마한 가내 ‘참기름 공장을 설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유해식품이 범람하여 먹을거리가 불안할 때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이 최고 순도의 참기름을 제조하여 박리다매로 식생활 개선에 참여하고 미력이나마 그간 동아투위에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보답하자고 참기름공장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민가의 1층 30여 평을 임대하기로 하고 계약금을 지불했다. 모두가 할당된 참기름 제조기 구입과 건물 임대료 잔금 준비에 동분서주했다. 참기름은 식품이라 관할 보건소에 설립 신고를 하고 대표자는 공장 설립 신고를 위해 반드시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대표를 정해 신고절차를 진행해야 하는데 모두가 대표 되기를 고사하고 지역 거주자인 나에게 떠맡기는 바람에 나는 용산구 보건소에서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긴 실직 생활은 각 가정에 경제적인 압박을 초래하여 운영비를 마련하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모두가 책상물림들인지라 막상 일을 시작하려고 하니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계약금을 포기하고 ‘참기름 공장’ 설립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생활고가 계속되자 아내가 또 나섰다. 퇴근한 뒤 가정교사를 시작한 것이다. 지금은 밤 늦도록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당시의 효창공원 일대는 후미진 곳이었다. 아내는 통행금지시간이 다 되어서야 일을 끝냈다. 나는 도원동 큰 길까지 나가 아내를 기다렸다. 주말에는 동대문 시장에 나가 옷가지를 사고 가을에는 충남 당진에서 고추, 마늘 등 농산물을 모아서 자기가 근무하던 학교 선생님들에게 팔았다. 옷가지와 농산물 배달은 나의 일이었다. 나는 부끄럽고 창피했으나 아내의 동료 교사들은 나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며 “이 선생은 또순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아내에게 미안하고 마음이 너무나 착잡했다.

1980년대 초까지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유신독재가 무너진 뒤 민주화된 세상이 찾아올 줄 알았으나 옛날을 뺨치는 군부독재가 들어섰다. 나의 취직 길은 여전히 막혀 있었다. 찾아 가는 곳마다 처음에는 호의적 반응을 보이다가 10여 일 지나면 “곤란하다” “미안하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세상은 점점 시끄러워지고 거리는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데모로 마비되었다.

로이터의 비정규직으로 취업

1986년, 국제적인 통신사 로이터에서 “취재 일손이 달리니 파트 타임으로 도와줄 수 있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나는 조건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신문사를 쫓겨난 지 거의 10 년 만에 다시 카메라를 들고 사건의 현장에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도 국내 언론사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세계 굴지의 통신사이기 때문에 중앙정보부도 방해를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열심히 뛰었다. 최선을 다했다. 현장에는 얼굴도 모르는 앳된 기자들뿐이었다. 나의 옛날 동료들은 그 사이 차장, 부장으로 진급하여 데스크로 물러나 있었다. 나는 데모 현장을 취재하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건국대 데모 현장에서는 돌에 맞아 발등이 부러졌고 발 밑에서 화염병이 터져 불길에 휩싸이기도 했다. 연희동 전직 대통령을 취재 할 때는 경호원들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지만 노력의 성과는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 이한열 군을 가족들이 확인하고 실신하는 장면, 몸에 불이 붙어 화염에 휩싸인 학생 등 현장을 증언하는 생생한 사진들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더 타임스 등 세계적 권위지에 실렸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는 약물 파동으로 금메달을 박탈당한 벤 존슨이 추방당하는 모습을 나 혼자 잡는 세계적 특종도 했다. 그 때부터 나의 상사이자 직장 동료이던 로이터 통신 서울 지국장 로저 크랩(Roger Crabb) 씨는 나를 ‘미스터, 스쿠프 MR. Scoop’라고 불렀다. 스쿠프란 다른 기자들을 따돌리고 단독으로 취재 보도한 기자를 뜻하는 언론계의 속어이다. 나는 로이터에서 15년이나 근무 하고 60세가 넘어 은퇴했다.

내가 만일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60이 넘도록 현장을 뛰지 못했을 것이다. 운이 좋았다면 40대 중반에 차장이나 부장 노릇을 잠깐 하다 밀려났을 것이다. 그렇다고 60이 넘도록 ‘미스터 스쿠프’ 소리를 들으며 현장을 취재할 수 있었던 것이 동아일보사의 덕만은 아니다.

나는 아직까지 동아일보사가 나를 왜 해고했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동아일보 시절 동아일보가 바라는 모범 사원이었다고 자부한다. 이 점은 그때 받은 상장들이 증명한다. 동아일보사가 나를 해고한 것은 분명 자기들의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악바리’라고 소문 난 내가 현장에서 없어지기를 바라는 누군가가 나를 자르라고 협박했던 것이 틀림없다.

2008년 10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가 동아일보 광고탄압사태의 진실을 규명하면서 “동아일보사와 중앙정보부는 강제 해고된 언론인들에게 사과하고 응분의 화해 조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나는 동아일보사가 당연히 그 권고를 받아들일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의 반응은 정말 뜻밖에도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동아일보사는 중앙정보부의 압력을 받아 언론인들을 해고 한 것이 아니라 광고 탄압으로 경영이 어려워 해고했다”고 옛날의 변명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들은 날마다 신문을 만들면서도 역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있다. 동아일보사의 한심한 모습은 전통도 명분도 잃고, 긍지도 스스로 짓밟는 작태가 아닐 수 없다. 한때 내 청춘을 바쳐 일했던, 그리고 그토록 사랑했던 내 첫 직장의 현재 모습에 서글픔을 금할 수 없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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