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언론역사 동아투위사람들
자유언론운동, 해직, 그 후의 삶[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14)] 박종만 전 동아투위ㆍ 전 YTN 이사
  • 관리자
  • 승인 2017.01.23 11:17
  • 댓글 0

내가 동아일보사에 입사한 것은 1967년 11월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동아일보사에 들어간 걸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나이 서른에 남편을 여의고 어렵게 홀로 키운 아들이 학교도 다 마치기 전에 그 어렵다는 신문사 시험에 합격한 것만도 대견스러운 일인데, 그 회사가 대한민국 최고의 신문사로 알려진 동아일보사라니! 어머니는 처녀시절부터 동아일보 애독자이시던 외조부의 영향을 받아 동아일보를 국내 제일의 신문으로 굳게 믿고 계셨다. 그러니 그 기쁨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1960년대 후반엔 내 어머니의 믿음이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발행부수로 보나 영향력으로 보나 사원들에 대한 대우로 보나 타사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신문이었다. 더구나 내가 입사하던 1967년 무렵엔 사세가 더욱 크게 신장되어 구성원 모두가 회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던 때였다.

동아일보 기자의 드높은 자부심

지금 최대의 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조선일보는 한국일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2~3위 순위 경쟁을 벌이고, 중앙일보는 태어난 지 몇 해 안 되는 신생신문에 지나지 않던 때였다. 그런 만큼 동아일보는 언론계 지망 대학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60년대 동아일보 편집국은 매우 자유롭고 활달하면서도 질서가 잘 잡혀 있었다. ‘무형식의 형식’이랄까, ‘무질서 속의 질서’랄까, 그런 것이 당시 편집국의 분위기였다. 겉보기엔 선후배 간의 질서가 뚜렷해서 엄격해 보이나 어떤 문제를 놓고 의견을 나눌 땐 아무리 후배라 해도 굽힘없이 자유로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었고, 선배나 상사도 불합리하게 후배들의 의견을 억누르는 일이 없었다.

동아일보 사내 분위기를 모르는 외부 사람이 보면 ‘젊은 사람들이 버릇없다’고 할 만큼 후배 기자들도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고 비판하고 토론했다. 모두 기(氣)가 살아 있었다고나 해야 할까? 나는 그것이 1970년대 전반기에 동아일보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된 자유언론운동의 토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문사에 입사할 때까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모순들이나 병든 언론 현실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낮은 수준이어서 특별한 문제의식 없이 기자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입사 후 1~2년이 지나고, 그 동안 동아일보뿐 아니라 언론계 전체로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인 1968년의 이른바 ‘신동아 사건’과 69년의 ‘3선개헌 파동’을 지켜보면서 한국 언론이, 그리고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 문제들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국의 정치와 언론 상황은 악화일로를 치달았다. 그러나 한국의 언론들은 진실 보도와 비판이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러자 대학가에서부터 언론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사건기자로 경찰서와 대학가를 주로 취재하고 다녔는데, 언론에 대한 학생들의 불신과 비난이 극도에 달해 마침내 신문사 차량에 돌팔매를 던지는 사태까지 목격하게 되었다. 투철한 사명감이나 신념 없이 시작한 기자생활이었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머리를 들쑤셔놓기 시작했다.

부끄러운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

부끄러웠다. 대한민국 최고의 신문사 기자라고 우쭐대던 것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다른 동료들의 생각도 비슷했다. 입사한 지 3~4년, 팔팔한 정의감과 패기로 가득한 젊은 기자들로선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71년의 ‘언론자유 수호선언’이었다.

1971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언론통제가 다소 풀리는가 싶더니, 2학기 들어 교련 반대 데모 등으로 대학가가 다시 술렁거리자 언론에 대한 감시와 통제는 더욱 강화됐다. 그러다가 10월 15일엔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선포되고 대학가에 무장군인들이 진주하는 숨 가쁜 상황이 전개됐다.

그 무렵 나는 비로소 눈물을 흘리며 취재하기 시작했고, 기자라는 직업에 대한 강한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나 개인적으로는 그 해 3월에 결혼해서 아내가 임신을 하고 있던 신혼시절이었는데, 거의 매일 최루탄을 맞으며 온 종일 데모 현장을 취재하고 다니느라 저녁이면 파김치가 되어서 아내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못 해주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여 취재한 기사가 날이 갈수록 쪼그라들더니 마침내 위수령이 선포된 이후엔 아예 한 줄도 반영되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 끓어오르는 울분을 억제할 길이 없었다.

특히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고려대학교에 난입하던 현장에서, 군인들이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을 곤봉으로 사정없이 후려친 뒤 트럭에 가마니때기 싣듯이 쌓아올리는가 하면, 최루가스를 발사하며 4층 강의실까지 학생들을 쫓아올라가는 바람에 달아나던 학생이 결국 4층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는, 최루탄 때문이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격정 때문에 진짜 눈물을 흘리며 기사를 송고해야 했다. 그런데 그 기사가 한 줄도 보도되지 않을 때는 정말로 기자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싶어졌다.

1971년 12월의 ‘국가비상사태 선포’는 언론을 극도로 위축시켰다. 이제 ‘언론자유’는 ‘사전에만 존재하는 단어’가 되어 갔다. 당시 나는 동아방송의 뉴스를 담당하는 편집국 방송뉴스부에서 경찰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기자실이 폐쇄당하는 황당한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한두 달 뒤 기자실이 되살아나기는 했지만, 취재환경은 크게 악화되었다. 경찰 취재가 다시 허용된 1972년 3월, 나는 아주 사소한 기사 하나 때문에 육군 제3범죄수사대에 연행되어 치욕스러운 욕설과 협박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경험을 했다. 기사 내용은 “한 방위병이 변심한 약혼녀의 집에 방화했다”는 것이었다. 그 기사가 보도되자 육군범죄수사대는 나를 포함해서 11명의 언론인들을 연행하여 조사했다.

그들은 내가 조사실에 들어서자마자 “야, 이 빨갱이 새끼야. 너 군·민을 이간질시키는 간첩새끼지?” 하는 욕설을 퍼부어대며 협박했다. 몇 시간 만에 풀려나기는 했지만, 이른바 ‘민주국가’라고 하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을 당하고 보니 황당하기도 하고 가슴 속에서 울분이 치솟기도 했다.

‘보도하지 않을 자유’마저 박탈한 ‘10월 유신’

1972년 가을의 ‘10월 유신’은 모든 언론을 한층 더 공포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게 되었다. 기자들은 일상적인 취재활동마저 엄격히 제한을 받았으며, 정부 일부 부처와 경찰 기자실 등은 또 다시 폐쇄됐다. 모든 언론이 ‘보도할 자유’는 물론 ‘보도하지 않을 자유’마저 완전히 박탈당했다. 당국이 허용하지 않는 기사는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는 반면에 정부당국이 배급하는 기사나 해설은 한 줄도 빠뜨리지 말고 보도해야 했다.

그뿐 아니었다. 정부당국이 배급한 기사를 다루면서 기사 내용 중에서 제목을 뽑더라도 그게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호되게 질책을 했다. 실제로 동아일보에선 이런 일까지 있었다. 편집부 최 모 기자(5공 때 청와대 공보수석, K신문사 사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가 유신헌법 관련 기사의 제목을 달았는데, 관급 기사 내용 중에서 뽑은 제목임에도 당국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제목이라 하여 군 수사기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던 것이다. 그것이 ‘10월 유신’ 전후 한국 언론의 현실이었다. 뜻있는 젊은 기자들은 심한 자괴감과 좌절감에 빠졌다. 차라리 붓을 꺾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났다.

1974년 3월, 기자들은 언론자유운동을 효율적으로 벌여나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신분보장 방안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그를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처음부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설마’ 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동아일보사가 노조 임원 11명 등 13명을 전격 해임했고, 이에 화답하듯 서울시는 “노조 임원 전원이 동아일보사에 재직하지 않고 있으므로 노조설립 신고증을 내줄 수 없다”면서 노조 설립신고를 반려했다. 언론노조 설립의 의미와 파장을 간파한 정치권력과 노조를 사갈시(蛇蝎視)하던 동아일보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억지춘향으로 만들어낸 합작품이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노조 발기인 33명 중의 하나로 참여하고, 임원을 비롯한 13명이 해임된 뒤 1차 대책위원이 되었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가 한 달여 만에 복직되는 아픔을 겪었다.

해고된 노조 간부들과 대책위원들이 회사에서 쫓겨나와 있는 동안 정부는 이른바 민청학련사건과 관련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해서 우리 사회를 그야말로 커다란 감옥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제 자리로 돌아간 복직자들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기자들은 언론계를 떠나느냐, 주는 월급이나 받으며 죽은 듯이 살아가는 비겁한 샐러리맨으로 남느냐, 아니면 결사항전 하느냐 하는 세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특히 언론이 침묵하고 있을 때 기도회에서, 미사에서, 무자비하게 고문 받고 구속된 수많은 정치범들에게 관심을 쏟고 고발하는 것을 보면서, 또한 그러한 사건들이 한 줄도 보도되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깊은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1974년 10월 24일 발표된 ‘자유언론실천선언’과 그 이후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내가 동아일보에서 해직된 것은 제작거부 농성 첫날인 1975년 3월 12일이었다. 내 나이 33세, 동아일보에 입사한 지 7년 반, 결혼한 지 만 4년 되던 때의 일이었다. 그날 나를 비롯한 17명의 기자들은 단 한 번의 소명 기회도 갖지 못하고 인사위원회도 거치지 않은 채 밤늦게 전격 해임되었다.

해직 뒤 감시와 미행에 시달리다

그날 해고된 17명 가운데 6명은 노조 간부, 4명은 기협분회 간부였으나, 나를 포함한 7명은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열성 참여자였을 뿐 노조나 기협에서 아무 직책도 맡지 않았는데 회사 측이 어떤 기준에 근거해 해고했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보아 이날 해고자 명단은 회사가 단독으로 만든 것이 아닐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나는 어머니, 아내, 세 살 난 아들과 함께 화곡동에 있는 13평짜리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회사에서 쫓겨난 뒤 2~3개월 동안은 동아투위에 대한 각계각층의 지원도 있고 친지들의 도움도 있고 하여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실직 상태가 장기화하면서 살아갈 일이 정말 막막해졌다. 아내가 서둘러 조그만 출판사의 임시직이나마 일자리를 구하긴 했지만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신문사에서 쫓겨난 직후부터 우리들은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른바 ‘담당’ 형사들이 주변을 맴돌며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였고, 걸핏하면 중앙정보부로, 경찰서로 동료들을 연행해 조사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나도 해직 후 2개월 만에 정말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동료 두 사람과 함께 폭행혐의를 뒤집어쓰고 구속됐다가, 워낙 말도 안 되는 사건인지라 불기소처분을 받고 풀려나는 일까지 겪게 됐다.

사건의 전말은 이런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동아투위 임시사무실로 사용하던 여관방에 제작거부 농성에 동참하다가 회사로 되돌아간 한 기자가 술에 취해 찾아와 주정을 부렸다. 그 때 방 안에는 6명의 동료 기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기자와 방문객 사이에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져 다른 동료들이 이를 말리느라고 밀고 당기는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다음날 종로경찰서는 6명의 기자들을 연행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세 명을 폭력범으로 구속했다. 정말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건이 단순한 형사고발 사건이 아니라, 이른바 ‘윗선’의 지시에 따라 처리된 일종의 정치적 사건이었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대검 수사국 간부로 있던 내 처삼촌의 이야기를 들어 알게 되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 종로경찰서에 연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친구인 조(趙) 모 경찰서장에게 선처를 부탁했더니, 조 서장이 말하기를 “이 사건은 ‘윗선’에서 지시를 받은 사건이라 선처고 뭐고 어떻게 해볼 여지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해 여름 우리 동아투위 위원들 가운데 이부영·성유보 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심한 고문을 받고 구속되었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도 중앙정보부 등 수사기관에 연행되어 이러저런 조사를 받았다. 동아일보에서 우리가 대량 해직된 것이 단순한 노사간의 문제였다면 이러한 수사기관의 감시나 탄압이 왜 그렇게도 끈질기게 자행되었는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에게 1975년 여름은 참으로 길고도 고통스러운 계절이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맞아주는 일자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성급하게 일자리를 구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국민과 역사 앞에 신명을 바쳐 지키기로 약속한 자유언론의 깃발을 내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민권도 제한당하고

그리고 또 하나의 큰 이유는 당국의 훼방이었다. 당시 우리들은 항상 수사기관의 감시를 받고, 외국여행도 철저히 통제받는, ‘일종의 공민권 제한 대상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봉이나마 그달 그달의 급료로 살아가던 사람들이 실직상태로 반 년 넘게 버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쫓겨난 지 6개월 만에 각기 생업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나는 출판사 임시직원으로 일자리를 잡은 아내에게 거의 전적으로 살림을 떠맡기다시피 하고 동아투위 총무로 2년 가까이 더 사무실을 지켰다. 그러는 사이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각계각층 인사들과 교유하면서 우리의 자유언론투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갈수록 무겁게 짓누르는 생활고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임시직으로 다니던 아내의 일자리마저 잃고 보니 앞이 캄캄해졌다. 결혼반지며 아들 돌 반지며 집안에 있던 금붙이는 모두 팔아 썼지만 그것으로 견뎌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무슨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아내는 하는 수 없이 13평짜리 아파트를 팔아 장사라도 해보자고 제안했고, 그래서 우리는 집을 팔아 마침 남대문시장 근처에 새로 생긴 ‘새로나 백화점’이라는 곳에서 2평짜리 스낵 가게를 시작했다. 그러나 대학을 마친 뒤 한국은행에서 일하다 결혼한 아내가 백화점 스낵 코너에서 우동이나 부침개를 파는 건 처음부터 무리한 일이었다. 힘만 들고 장사는 잘 안되니 오래 버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조그만 구멍가게에까지 정보기관의 이른바 ‘담당’이라는 자들이 뻔질나게 찾아와 아내에게 “남편 하는 일을 못 하게 하라”며 때로는 협박도 하고 때로는 회유도 하니 그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몇 달 만에 그 일도 접고 말았다. 그 후 우리는 나도 약간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내도 다시 출판사 임시직원으로 일하게 되어 다소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당국의 감시는 날이 갈수록 더 심해졌다. 동아투위 사무실 주변엔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서울시경, 보안사, 종로경찰서 등 5~6개 수사기관 요원들이 감시망을 펴고 있었고, 투위 동료들의 집에도 각 기관의 이른바 ‘담당들’이 수시로 맴돌며 감시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나의 경우, 회사에서 쫓겨나던 해인 1975년에 처음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조사를 받고 나온 이후 수시로 ‘기관원’들의 방문조사를 받았으며 한두 차례 연행되기도 했는데, 특히 1977년 4월엔 ‘민주구국헌장’ 서명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6일 동안 조사를 받기도 했다.

나는 2년 동안 동아투위 총무를 맡았던 데다 1977년경부터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운동 단체인 ‘인권운동협의회’ 등에도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심한 감시를 받았다. 당시 우리 가족은 수유리에 있는 누님 집 반지하 방에서 살고 있었는데, 내 ‘담당 형사’가 같은 집에 살던 자형과 동향이어서 서로 잘 안다는 핑계로 걸핏하면 찾아와 내 동향을 묻고 가곤 했다.

또 1976년의 ‘3·1민주구국선언’ 발표 이후 해마다 3·1절이나 광복절 같은 국가기념일만 되면 이른바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경찰의 대대적인 연금과 미행이 되풀이되었는데, 나 역시 1978년 3·1절 때와 같은 해 7월 4일 ‘민주주의국민연합’ 발족을 전후하여 5일씩 동네 목욕탕에도 갈 수 없이 연금되기도 했다.

동아투위는 1978년 여름께부터 ‘동아투위 소식’(유인물)에 민주화운동 관련 소식을 한두 가지씩이라도 싣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미 정권의 나팔수가 되어 제 구실을 못하는 제도언론(우리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같은, 당시 합법적으로 발행되던 국내의 모든 언론을 그렇게 불렀다)에선 철저히 외면하고 있으니, 역사의 기록을 위해서라도 몇 백 장 안 되는 유인물에나마 게재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이 되는 10월 24일엔 지난 1년 동안에 있었던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운동 관련 소식 120여 건을 ‘동아투위 소식’에 게재했다. 비록 펜과 마이크는 빼앗겼지만 우리는 여전히 언론인이며, 따라서 언론인으로서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감행했던 일이었다.

그 유인물이 발표되자 경찰은 그 날 밤 홍종민 총무를 연행해 가더니, 26일엔 안종필 위원장과 안성열 선배, 그리고 유인물 작성자인 나를 연행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동아투위에선 10명이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돼 모두 1년 넘게 감옥살이를 했다.

나는 그 무렵 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회에 나가고 있었는데, 그 일을 시작한 지 석 달도 못 되어 갑자기 구속되는 바람에 또 일자리를 잃게 되니 모든 생계 부담이 다시 고스란히 아내의 어깨로 넘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내 아내는 물론, 늙은 어머니까지도 내가 언론인으로서 떳떳한 길을 걷다가 당하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위안을 받는 것 같았다.

감옥에서 받은 어머니의 편지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어머니는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신 일이 있다.

“…어느 정도 예측은 했던 일이다. 올 것이 왔으니 우리의 숙명이다. 대의를 위해 험한 길을 선택했으니 인내하고 연단함으로써 온전함에 이르기 바란다. 아비 없이 너를 키워온 나의 과거 생활을 아는 사람들 중엔 너를 보고 무책임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 줄 안다만, 나는 오히려 자부심을 갖고 위로받으며 산다. 양심을 속이고 인간답지 못하게 살아가는 불쌍한 존재들과 비교하니 양심의 지배 하에 떳떳하게 살아가는 자식을 가진 내가 다행스럽다.…”

편지는 그렇게 써 보내셨지만 얼마나 가슴 아파 하셨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또, 내가 구속된 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산하 인권위원회에서 일하게 된 아내는 그 많은 인권탄압 현장을 지켜보면서 나보다 훨씬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아내는 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지금 막 명동성당 기도회에서 돌아왔습니다. 아아, 그 많은 인파! 대성당을 송곳 꽂을 틈도 없이 꽉 채우고, 그 넓은 광장에 빈틈없이 앉았습니다. 노동자도, 변호사도, 학생도, 할머니도, 우리는 모두 한마음이었습니다. 그 다음 일어난 이야기는 다음에 하지요. (···) 당신은 날 보고 고생한다고 하지만, 징역 사는 사람보다야 몇 백배 내가 낫겠지요. 정말 고생하는 건 당신이어요. 그러면서도 못 참겠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밖에 사람 걱정만 하는 당신이 내겐 더없이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당신 지금까지 9개월 동안 훌륭했어요. 우리 조금만 더 참아요. 마음 느긋하게 먹고 멀쩡하다가도 하루가 급하게 조바심이 나기도 합니다만, 어쩌겠어요. 어차피 이런 세상에 태어난걸…”

아내는 또 이런 편지도 보냈다.

“요즘 내가 얼마나 기고만장한지 아세요? ‘설마 옥바라지한 마누라를 내쫓으랴’ 싶어서 아주 으스대며 다녀요. 얼마나 당당한지 당신이 나와서 보면 ‘아니 이 여편네가 왜 이리 기(氣)가 살았지?’ 할 거예요. (···) 당신이 나온다 해도 무슨 직장이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이 모두 다 나처럼 당신을 사랑하며 맞아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골치 아프고 실망스런 일들이 많을 거에요. 그렇더라도 당신 나와서 우리 식구 김치 한 가지라도 같이 먹고, 아침저녁 당신 얼굴 보면서 살고 싶어요.

난 앞으로 당신이 나를 부자로 만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럴 사람 같으면 신문사에서 쫓겨나지도 않았겠죠. 그저 우리 식구 남에게 부끄럼 당하지 않고 살면 그만이지요. 성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어요. ‘증거는 가지고 있지만 약속한 것을 아직 받지는 못했다.’고요. 누가 알아주든 안 알아주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이라면 할 수밖에 더 있겠어요? 건축가가 버린 돌을 하느님께서는 머릿돌로 쓰신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선한 뜻을 가지고 열심히 살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머릿돌로 쓰실 거에요. 당신은 지금 그 훈련을 받고 계신 거구요.”

우리는 유신체제만 끝나면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언론자유도 만끽할 수 있게 되리라 믿었다. 10·6 이후 감옥에서 풀려난 나는 ‘동아투위 소식’에 다음과 같은 글을 실은 일이 있다. 그건 나의 작고 소박한, 그리고 진정 어린 꿈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우리는 늘 가나한 애인이었고, 가난한 부부였소. 결혼생활 9년, 그 가운데 5년이 실업자 생활로 메워졌다면 그게 어찌 순탄한 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겠소? 그래도 당신은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지요. 아니 오히려 당신은 때로 휘청거리는 나를 위로하고 격려했지요. 하지만 나는 가끔 잠자는 당신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당신의 얼굴에 숨길 수 없이 서려 있는 삶의 깊은 고뇌를 발견하고 뼈저린 죄책감 같은 걸 느끼곤 한다오.

할 수만 있다면 난 정말로 직업윤리에 충실한 하나의 기자이고 싶소. 그리고 당신이 말하던 대로, 김치 한 가지 놓고 먹고 살더라도 웃음이 걷히지 않는 평범하고 단란한 삶을 살고 싶소. 우리의 꿈은 이렇게 작고 소박하지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요즘 세상은 우리의 이 가엾으리만큼 소박한 꿈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세상이 되었구려.

죄 없이 갇히는 일도, 그래서 울며 거리를 헤매는 아내와 어머니도 모두 사라지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던 당신의 편지가 생각납니다. 그래요. 그동안 우리 주변에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착하고 의롭게 살려다 갇히고, 매 맞고, 억압을 당해 왔지요. 그리고 지금도 고난은 계속되고 있어요. 이제 이런 일만은 제발 없었으면 좋겠소.

이젠 말로만의 화해가 아니라, 지정한 의미의 ‘화해의 시대’가 열렸으면 좋겠소. 이 눈치 저 눈치 보지 않고도 하고 싶은 얘기, 듣고 싶은 얘기를 자유스럽게 할 수 있는 세상, 상식이 상식으로 통하는 세상, 부모를 잘못 만난 죄로 길거리를 방황하다가 끝내 범죄의 길로 들어서는 아이도 없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힘이 없다는 이유로 구박을 받는 사람도 없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소. (·····)

이러저런 이유로 아직도 죄 없이 옥고를 치르고 있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새로 또 고생하는 사람들이 자유의 몸이 되고, 서로가 미워하지 않아도 좋은 세상이 빨리 이루어졌으면 좋겠소. 그 때 우리도 정말 한 번 밝게 웃어봅시다.”

이것은 지금도 변함없는 나의 소박한 꿈이다. 그러나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신체제가 막을 내린 뒤에도 상황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더 악화했다. 1980년 5·17 이후엔 동아투위 사무실마저 폐쇄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여름 많은 동아투위 위원들이 수배를 받아 몸을 피해야 했다. 나도 당시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5·17 이후 한동안 이리저리 숨어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7월 중순쯤 오랜만에 밤늦게 집으로 들어가다 집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형사들에게 잡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1주일 동안 고초를 겪었다.

살벌했던 1980년 한 해를 보내면서 암울하고 참담한 마음을 가누기가 어려워졌다. 다른 모든 분야의 민주화운동이 그랬듯이 동아투위 활동도 거의 중단된 상태여서 어디에 마음 붙이기도 힘들었다. 더구나 가장의 몸으로 6년 동안이나 실업 상태에 있었으니 생활의 곤궁함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에 대한 미안함도 주체할 수 없었다. 이제 정말 가족을 위해서 무언가 진짜 생업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30대 중후반의 한창 나이에 꼬박 6년을 실직상태로 있었던 데다 그 때까지도 감시의 대상이 되다 보니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뒤죽박죽 인생의 험난한 길

생활인의 입장에서 보면, 또 이른바 ‘사회적 성공’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나의 인생은 뒤죽박죽 형편없이 꼬여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언론탄압이 없었다면, 또 동아일보가 국민의 열망에 등을 돌리고 권력에 굴복하는 일이 없었다면, 경험하지 않아도 될 온갖 시련과 고초를 겪는 사이에 나는 세속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다른 친구들에 비해 저만치 뒤쳐지게 된 것이었다.

동아일보사에서 해직된 지 만 6년 만에 어렵게 잡은 첫 일자리는 친구가 간부로 있는 아동서적 출판사 편집부였다. 그리고 그 후 나는 오랜 세월 이른바 주간지, 전문지 등을 전전했다. 동아투위 위원 가운데는 물론 해직 이후에 누가 보아도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람도 있고, 유명해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엄청난 시련과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이 ‘뒤죽박죽’ 인생의 험난한 길을 걸어 왔다.

우리 동아투위 위원들이 유신독재에 맞서 언론 본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자유언론운동을 벌이다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지 이제 37년이 지났다. 일제 식민지배 기간과 맞먹는 긴 세월이다. 1975년 당시 대부분 30대 초중반이던 동료들은 이제 70 안팎의 노인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열여덟 분의 동료가 세상을 떠났다. 때로는 지난 세월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37년 전 동아일보에서 치열하게 전개했던 우리의 자유언론운동이 언론뿐 아니라 이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도 큰 족적을 남긴 자랑스러운 사건이었으며, 언론자유를 압살하려는 독재권력과 벌인 위대한 투쟁이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언론 현장에서 강제 축출된 지 35년 만에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 내가 이 재판에 참여한 것은, 궁핍해진 생활형편을 펴보자는 것도 아니고, 정부의 선처나 자비를 구걸해 보자는 것도 아니엇다. 나는, 비록 과거 정부가 저지른 잘못이라 해도 그 때문에 정의로운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었다면 그 고초에 대해선 현 정부가 마땅히 배상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어 그 재판에 참여한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후일 우리의 후손들이 역사에서 배울 것이 있지 않겠는가.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리자의 다른기사 보기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