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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며 싸우며[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13)] 이종대 전 국민일보사 사장ㆍ전 동아일보사 정치부 기자
  • 관리자
  • 승인 2017.01.16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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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웠던 기자생활과 저항의 몸부림

1971년 유신헌법의 발효로 독제체제의 폭압통치가 강화되면서 언론의 상황은 참담하기 짝이 없었다. 중앙정보부 직원이 마치 동아일보 사원이기나 한 것처럼 아침마다 버젓이 편집국에 출근하여 오늘은 무슨 기사를 쓰는지 점검·감시하는 가운데 중요기사가 누락되거나 왜곡·축소되는 사례가 날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어쩌다 독재세력의 비위를 건드리는 부주의를 저지르기라도 하면 매서운 응징의 매질을 당해야 했다. 편집국 편집부의 최 모 기자가 한번은 기사제목을 잘못 붙였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 간 일이 있었다. 그는 밤새 조사를 받고 이튿날 풀려 나왔으나 몸이 아파 바로 출근을 하지 못하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최 기자의 집을 방문한 동료기자들의 말로는 그의 방에 들어섰을 때 상처에 바르는 안티플라민 냄새가 코를 찔렀다고 한다. 가서 맞았느냐는 물음에 최 기자는 절대 그런 일이 없다면서 과민반응을 보이며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얼마나 때렸으면, 또 얼마나 겁을 줬으면 그 지경이 됐을까

기사를 팔아 밥을 먹는 기자에게는 불량기사’ ‘함량미달의 기사를 제작하기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매 맞는 아픔보다 더 쓰라렸다. 바로 그 무렵 대학생들이 신문사 앞으로 몰려와 3층 편집국을 향해 돌을 던지고 삿대질을 하며 비난의 욕을 퍼부었다. 사실보도를 똑바로 못하는 주제에 무슨 신문이냐고 무슨 기자냐고 외치고 있었다. 모든 사실을 경중에 따라 있는 그대로 알려줄 것이라 믿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신문과 신문사의 기자들은 나날이 사기행위를 일삼고 있는 셈이었다. 기자들의 가장 아픈 상처부위를 대학생들이 콕콕 찌르고 있었다. 나는 당시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 창문을 통해 대학생들의 항의시위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운 순간들이 이어졌다. 당장이라도 기자 짓을 때려치우고 뭣이든 딴 짓을 하며 먹고 살아야겠다는 충동이 자주 솟구치는 시절이었다.

그 무렵 어느 겨울날이었다. 입사동기생으로 나와 가깝게 지내던 고준환 방송뉴스부 기자를 느닷없이 방송프로듀서로 옮기는 인사조치가 단행되었다. 기자와 프로듀서는 엄연히 다른 직종이어서 사원모집도 분리해서 시행했고 두 직종 간 인사교류는 생각조차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런 전례 없는 직종전환인사를 단행하면서 회사는 사전에 본인의 의사를 묻거나 양해를 구하는 최소한의 절차조차 묵살해 버렸다.

당시의 전반적 상황으로 미루어 정부의 압력에 회사가 굴복했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기자들의 신분과 신변안전에 회사가 바람막이 역할을 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고 보니 기자들로서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앞으로 정부나 여당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기만 하면 누구든 기자직을 박탈당할 수 있으니 몸조심하라는 경고였다. 그 경고는 유감스럽게도 정부와 회사의 합작품이었다. 고 기자의 가까운 친구들을 포함하여 많은 동료기자들이 분개했다.

고 기자의 인사조치를 알리는 벽보가 붙던 날 저녁 그들은 김두식 기자의 집에 모였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는 자구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강력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그날 저녁 그들은 기자노조를 결성했다. 회사는 이튿날 노조집행부를 바로 해임조치했고 노조가 새로 집행부를 구성하면 회사가 즉각 그들을 해임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한 달쯤 지난 뒤 회사는 웬 일로 해임 또는 무기 정직당한 기자들을 모두 복직시키고 노조 결성으로 단행된 일련의 인사조치들을 없던 일로 하겠다고 발표했다.

유신헌법에 기초한 대통령 긴급조치가 1호에서 9호까지 잇따라 발표되고 언론자유의 숨통을 옥죄는 당국의 폭거는 한층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럴수록 동아일보사 편집국, 출판국방송국을 감도는 저항의 분위기는 날로 고조되고 있었다.

가중되는 신변의 위협

1975317일 새벽, 술 취한 폭도들이 휘두르는 각목에 떠밀려 회사를 쫓겨난 후 살얼음판을 걷는 위태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축출당한 직후 5명의 기자가 한 여관방에 몰래 모였다. 광고탄압과 대량해고의 실상을 담은 소책자 동아사태의 진상을 제작하기 위한 작업팀이었다. 정부의 만행과 동아일보사의 폭거를 규탄하는 책자의 발간을 정부가 알면 가만둘 리 없었다. 작업팀의 팀원들은 각자가 맡은 부분의 원고 작성을 서둘러 끝내고 인쇄소를 물색한 끝에 을지로의 한 작은 인쇄소와 접촉하여 한밤중에 작업에 들어갔다. 지하실의 흐릿한 전깃불 아래서 소형 윤전기를 돌리는 인쇄소 주인의 얼굴에는 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불법 불온문서로 취급될 것이 분명한 인쇄물의 제작에 관여하고 있는 만큼 수사기관에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인쇄소에 벽력이 떨어질 것이 뻔했다. 밤 새워 인쇄와 제본을 마치고 묵직한 책뭉치를 들고 나오면서 인쇄소 주인에게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몇 차례나 건넸는지 모른다. 아무쪼록 무사하기를 빌었다.

그해 여름 동아투위 대변인을 맡고 있던 이부영 기자가 당국에 붙들려 가 이내 구속되었다. 그는 바로 그 무렵 개정된 형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개정형법은 외국인에게 정부를 비방하는 행위를 처벌하도록 규정한 것이었는데 이 조항이야말로 동아투위 대변인을 겨냥하여 맞춤제작한 올가미였다. 당시 동아투위에는 자연스럽게 외신기자들이 몰려들어 투위 활동을 취재하고 있었다. 반대로 강력한 재갈이 물린 국내 신문과 방송들은 투위 활동을 아예 취재조차 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부영 대변인의 구속 직후 동아투위는 나를 제2대 대변인으로 임명했다. 소심하고 겁이 많았던 나로서는 그 위험한 대변인 노릇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서울주재 외신기자는 물론 해외 본사에서 파견된 특파원들을 만나 그들의 취재를 돕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 한국의 철권통치와 이에 저항하는 동아투위의 활동은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이를 반영하여 동아투위는 미국, 유럽, 일본 등지의 유수한 언론사들로부터 자주 인터뷰 요청을 받고 있었다.

외국기자와의 접촉활동은 고스란히 수사당국의 치밀한 감시망에 노출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외국 언론사들은 한 대뿐인 동아투위 사무실 전화를 통해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휴대폰이 없던 시절 그 일반전화 한 대를 수사당국이 도청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을 것이다. 실제로 외국인 특파원을 만난 다음에는 얼마 안가 수사당국으로부터 확인전화가 걸려왔다. 한번은 일본의 유력지 기자를 만났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날 밤 중앙정보부의 투위 담당 직원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와 기자와의 대화내용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몇 시부터 몇시까지 만났으며 기자가 무슨 질문을 했고 대답을 어떻게 했느냐는 식으로 물어오면 대체로 무난하게 간추려 대답하는 일에 차츰 익숙해져 갔다.

당시 동아투위에는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치안국, 서울시경 등 주요 수사기관의 기관원들이 상시로 출입했는데 우리는 그들을 관선기자라고 불렀다. 그들 역시 대변인을 찾는 때가 많았다. 그들 중 열성적인 직무수행자들은 불광동의 집에까지 찾아와서 내 동정을 염탐하기도 했다. 하루는 저녁 늦게 귀가했는데 집사람이 아직도 성이 풀리지 않은 듯 낮에 찾아왔던 한 무례한 불청객을 큰 소리로 성토하고 있었다. 오후에 한 젊은 남자가 대문간에서 이웃 아이들과 놀고 있는 다섯 살짜리 아들을 붙잡고 유도심문을 했다는 것이 집사람의 설명이었다. “아빠는 어제 몇 시에 집을 나갔느냐, 저녁에는 몇 시에 돌아왔느냐, 그저께는 자고 오지 않았느냐.” 집사람이 뒤늦게 그 광경을 보고 어린 것을 상대로 이게 무슨 짓이냐고 쏘아부치자 그 남자는 멋쩍은 듯이 골목길을 빠져나가더라는 것이었다.

그해 봄과 여름의 가파른 나날들을 버티면서 때로 몸은 지치고 마음은 주눅들 때가 많았지만 30대 중반의 팔팔한 기백은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아침마다 9시면 동아일보사 앞에 모여 정부와 동아일보사를 규탄하는 구호와 즉각적인 복직을 소리 높이 외쳤다. 회사 앞 도열 집회는 반년이 넘게 계속되었는데 그 동안 경찰당국은 여러 차례 집시법을 들먹이며 집회 중지를 요청하고 만약 불응하면 전원 연행하겠다고 위협했다.

날이 갈수록 이런저런 혐의로 투위 위원들이 수사당국에 연행되는 사례가 잦아졌고 상당수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았다. 얼마 안 가 그들을 면회하고 재판이 열리는 법정을 찾는 일이 투위 위원들의 주요 일과로 자리잡았다.

여름이 다 갈 무렵이었던가. 김수환 추기경께서 동아투위를 명동성당으로 초대했다. 조촐한 칵텔파티를 열어 우리들을 불러모은 김 추기경은 짧은 인사말로 동아일보사 해직언론인들을 위로했다. “여러분, 견디기가 무척 어렵더라도 절대로 기죽지 마십시오온 세상이 무서워서 등 돌리는 시절에 우리 모두를 한꺼번에 특별히 초청한 것은 정말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유난히 겁이 많았던 나는 추기경의 그 겁 없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기죽지 말라는 당부는 정곡을 찌르는 메시지였다. 사실 그 무렵 우리는 기죽지 않으려고 개별적으로 또는 집단으로 말없이 애쓰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500원 술판이었다. 투위의 하루 일과가 끝나고 귀가할 시간이 되면 누군가가 “500하고 손을 들어 외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삼삼오오 작당을 하여 들리는 곳은 세종로 뒷골목의 목로주점. 드럼통을 개조하여 만든 술상 앞에 둘러앉아 소주잔을 주고받는다. 안주는 예외 없이 민중을 깔아뭉개는 저들이다. 술판의 참석자들은 그러나 한 번씩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얼마 전에 어느 술집에서 대통령을 욕하던 취객이 어디론가 붙들려가 뭇매를 맞았다는 소문이 한창 번지고 있던 때였다. 술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체질상 술이 잘 받지도 않은 나였지만 아침마다 집을 나설 때는 주머니속의 500원을 꼭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를 보존하는 술판의 효험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충전한 500원어치의 로 이튿날 아침 또 씩씩하게 싸움판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도서외판원으로 나선 해직언론인들

회사를 쫓겨난 후 몇 달 동안은 국민들의 성금으로 투위가 주는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작은 돈이었지만 생계를 꾸려가는 데 제법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끊어진 후부터 집안 살림이 막막해졌다. 75세의 아버지와 집사람 그리고 다섯 살 난 아들과 겨우 첫돌을 지낸 딸아이가 내가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었다. 10원이라도 내 손으로 밖에서 벌어들이지 않으면 다섯 식구의 끼니가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불과 반년 전에 배우자를 잃고 그 충격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면 상심이 너무 클 것 같아 내가 회사에서 나온 사실을 되도록 오래 숨겨야 했다. 살림에 주름이 깊어질 무렵 그 기미를 알아 챈 가까운 친구가 어느 날 쌀 한 포대를 싣고 집을 찾아왔다. 눈물이 핑 돌았다. 집사람의 친구들이 연탄과 쌀을 들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절박했다. 무언가 특단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투위는 투위대로 구성원들의 생활난을 공동으로 타개하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다. 그 중 하나가 번역·출판사업이었다. 이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전담작업팀이 구성되고 나도 거기에 참여했다. 작업팀은 번역할 책의 선정과 번역진의 구성을 순식간에 마무리하고 바로 책의 번역작업에 착수했다 에릭 프롬이 쓴 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의 원서를 구해 통째로 복사를 한 다음 6부분으로 쪼개어 6명의 번역진에게 나누어주었다. 누가 성가시게 재촉하지 않았는데도 번역작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궁하기는 모두 마찬가지여서 빨리 책을 팔아 돈을 손에 쥐어야 했다. 낮 동안은 당시 투위 사무실로 쓰고 있던 세종여관에서 방바닥에 엎드려 원고를 쓰다가 밤에는 집에서 새벽까지 일손을 놓지 않았다. 초벌 번역에 열흘 정도를 쓰고 감수에 사나흘이 지났다. 두툼한 원고 뭉치를 보따리에 싸던 날 다시 작업팀의 회의가 열렸다. 어느 출판사를 찾아갈 것인가를 두고 머리를 맞댄 회의였다. 번역·출판사업 추진과정에서 최대의 난제가 바로 출판사 물색이었다. 온 세상이 겁을 먹고 돌아앉은 무시무시한 세월에 과연 어느 출판인이 불온세력으로 내몰린 동아투위의 손을 선뜻 잡아 줄 것인가. 설왕설래 끝에 월간 다리발행인인 범우사의 윤형두 사장을 일단 찾아가 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다리지의 필화사건으로 윤 사장이 당국에 불려가 곤욕을 치른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좁고 허름한 사무실에 네 사람의 투위 위원들이 도착하자 미리 연락을 받은 윤 사장은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마침 우리 일행 중에는 윤 사장과 좀 아는 사람도 있었다. 원고보따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우리는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빨리 책을 만들어 팔아야 하는 사정을 설명하고 천지에 윤 선배가 아니면 누가 이 위험한 일을 맡아주겠느냐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윤 사장은 혹시 저들이 꼬투리를 잡을만한 책 내용상의 문제는 없느냐고 물었다. 그런 문제는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 윤 사장은 마침내 한 번 해보자고 승낙하면서 내가 이런 방법으로라도 당신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덧붙였다.

인쇄와 세 차례의 교정 그리고 제본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발간이 끝나자마자 바로 문화공보부에 발간신청서를 제출했다. 문공부가 과연 발간승인을 해줄지, 질질 끌지나 않을지 걱정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그리 오래지 않아 승인이 나왔다. 초판 2천권이 투위 사무실에 도착하던 날 투위 위원들은 가뭄에 단비를 만난 것처럼 환호성을 올렸다. 그날부터 투위원들은 저마다 열 권 내지 스무 권씩의 책을 들고 외판원으로 나섰다. 신출내기 외판원들이 무거운 책을 한 아름씩 안고 부산하게 쏘다니는 세종로 거리에 한 여름의 폭염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나는 열권의 책을 보자기에 싸서 가까운 서울신문사로 향했다. 내가 잘 아는 권기진 기자가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편집국으로 그를 찾아가자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빈 의자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다짜고짜 자네 몫이 두 권이야라고 말했다. “왜 그것 밖에 안 되느냐면서 그는 보따리에서 다섯권을 빼앗다시피 꺼냈다. 그리고는 지갑을 꺼내더니 책값을 잽싸게 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차 한 잔까지 얻어 마시고 사무실을 나설 무렵 미안한 생각이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다시는 이런 일로 그를 찾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짜 외판원은 뱃심부터 키워야 하는 것···.

수십명의 외판원들은 정계, 종교계, 학계, 법조계, 기업체 등 주로 가까운 지인들과 투위 지원인사들이 있는 곳을 누비면서 짧은 기간에 놀랄만한 판매실적을 올렸다. 얼마 안 가 초판이 매진되자 우리는 출판사에 재판 인쇄를 요청했다. 책 판매대금 중 출판사에 인쇄비용을 지불하고 남은 돈이 그리 큰 액수는 아니었지만 투위로서는 꽤 요긴한 수입이었다.

여섯 동업자의 의기투합-참기름사업에 뜻을 모으다

아무래도 좀 더 본격적인 생계수단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입사동기생이자 해직동기생인 윤석봉, 이종욱, 박순, 권근술 등 6명의 친구들은 돈벌이방법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참기름방앗간을 차리자는 데 뜻을 모았다. 투위 위원 중 한사람이 어렵사리 어느 회사에 취직했으나 며칠 안 되어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투위 위원들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사건은 취업문제와 관련된 투위 위원들의 판단에 중요한 지침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취직은 멀리 갔으므로 남은 한 가지 방법은 무엇이든 자영업을 해 보는 것이었다. 참기름집 창업의 발상에는 그 같은 현실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6인의 동업자는 그전보다 더 자주 만나 창업에 필요한 사전준비계획을 짜고 기초적인 시장조사에 병행하여 사업계획안을 만들어 나갔다. 이와 함께 효창동, 원효로 일대의 복덕방을 찾아다니며 마땅한 사업장이 있는지 알아보았다. 복덕방의 안내로 몇몇 가게를 돌아본 끝에 원효로의 한 가게가 임대평수, 위치, 임대료 등 여러 면에서 가정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가게주인을 만나 임대차계약을 했다. 그 밖에도 준비할 일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참기름 짜는 기계 물색, 참기름병 조달, 참깨 구입 등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파악해가는 과정에서 동업자들은 차츰 사업 착수와 사업경영의 현실적 난관들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투자비와 초기경영자금의 마련도 빈털터리 동업자들의 능력을 훨씬 초과하는 난제였다. 문제점을 하나씩 하나씩 심도 있게 검토한 결과 너무 늦기 전에 이 사업에 대한 생각을 접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창업의 뜻은 두 달만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종각번역실’의 번역사들

주로 한데를 돌아다녀야 했던 1975년의 겨울은 몹시도 추웠다. 해가 바뀔 무렵 집안 살림은 긴박감을 더해갔다. 집 사람을 고생시키기는 했지만 그래도 온 식구가 하루 세 끼를 거르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제일 참기 어려운 것은 노쇠한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를 아침저녁으로 마주해야 하는 일이었다. 서너달이 지나면서 아버지 역시 모든 낌새를 알아차린 듯 했다. 웃음이 드물어지고 말수도 줄어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그늘이 묻어났다. 저녁에 귀가하여 아버지 방문을 열 때마다 난감한 느낌이 어깨를 짓눌렀다. 무언가 좋은 소식이 없느냐고 묻고 싶은데도 아버지는 늘 잔잔한 미소로 그 궁금증을 덮어버리곤 했다.

실직사태의 장기화에 대비할 더 안정적인 돈벌이의 필요성은 날이 갈수록 절박해지고 있었다. 5명의 투위 위원들이 번역 일거리를 열심히 찾아보자는 데 의견을 모은 것은 해가 다 갈 무렵이었다. 다행이도 이들이 한데 모여서 원고작업을 할 장소 확보문제는 이인철 선배의 주선으로 손쉽게 해결되었다. 종로 1가 종각 근처에서 치과를 개업하고 있던 이인철 선배의 동생이 치과에 딸린 빈방 하나를 우리에게 무상으로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이인철, 이계익, 박순철, 우승용 그리고 나는 이 사무실을 종각번역실이라 이름 붙이고 중고 가구점에 가서 책상과 걸상 다섯벌을 사들이고 조그만 석유난로 하나도 설치했다. 다섯 평 남짓한 사무실은 작업실인 동시에 우리들의 좋은 휴식공간이기도 했다. 일거리가 없는 날에도 우리는 투위의 일로 추운 거리를 쏘다니다가 이 사무실에 들러 꽁꽁 언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일거리를 구하기 위해 종각번역실을 소개하는 전단을 만들어 종로 일대의 출판사에 보내고 알음알음으로 잠재적 고객으로 생각되는 개인 및 단체에도 전화를 걸어 일거리를 찾는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활동의 결과로 일거리가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예상보다는 많이 들어왔다.

평균적으로 한 달의 절반가량을 번역에 매달려야 할 정도의 일이 들어왔는데 원고료가 매우 낮았던 시절이라 월급만큼의 돈을 벌지는 못해도 생활에 큰 보탬이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아침마다 출근할 곳이 있고 또 거기서 함께 지내는 가까운 동료와 선배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려운 시절에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날마다 만나 밥도 먹고 술도 마시며 서로 격려하며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종각번역실은 그런 행운을 느끼게 해주는 마음의 안식처이기도 했다.

회사를 쫓겨나 거리를 헤매기 시작한 후 두 번째의 해가 저물고 있었다. 복직 요구를 관철시키는 일도 독재정권과 싸우는 일도 단기간에 바라던 성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 확실해졌다. 대부분이 30대 또는 40대인 투위 위원들은 각자 생애의 한가운데쯤에서 너나없이 엄청난 시련에 부대끼고 있었다. 인생의 허리가 부러져 두 동강이 나면 그것을 이어 붙이는 작업은 얼마나 많은 고초를 수반할 것인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눈앞에 벌어지는 하루하루의 정치적 상황도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절망적 상황 속에서 투위 위원들로 하여금 끈질기게 버티며 싸움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그들이 공유하고 있던 희망과 믿음이었다. 설령 내일 모레는 아닐지라도 몇 년 못 가서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유신독재체제가 붕괴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었다. 독재제제가 어쩔 수 없이 드러내고 있던 단말마적 발악 즉 반대세력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과민반응과 폭압이 그 믿음의 유력한 근거였다.

예컨대 국회 본회의에서 대통령을 강도 높게 비난한 김옥선 의원을 상대로 벌였던 유신정권의 신경질적 반응과 보복은 오히려 체제 내부의 불안과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에 불과했다. 많은 경우 유신정권의 행태는 자신감과 여유가 없는 자들의 일반적인 행동양식과 닮아 있었다. 누르는 자들이 눌리는 자들보다 더 깊은 불안감과 위기감에 떨고 있다니. 끝이 멀지 않았음을 저쪽이 먼저 감지하기 시작한 것인가.

믿음은 확고했다. 좀 더디더라도 그날은 틀림없이 그리고 너무 늦기 전에 오고야만다는 믿음이야말로 먹고 살며 싸우는 나날의 고통을 거뜬히 견디게 해 준 최강의 버팀목이었다. 그 믿음으로 내년과 후년 또 그 후년들을 능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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