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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뉴욕서 만난 킴수 테일러[내 인생의 취재기] 내가 후속 기사를 끝내 못쓴 까닭은
〈강기석 경향신문 전 뉴욕특파원〉
  • 관리자
  • 승인 2017.01.03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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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새해부터 현직을 떠난 ‘베테랑’ 기자, PD 등이 쓰는 ‘기억에 남는 취재/제작기와 취재원’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제 머리가 희끗한 그들이 먼지 쌓인 취재수첩을 꺼내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다양한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를 성찰케 하는 과거의 복원, 감동과 즐거움의 공유, 기억된 과거는 현재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새삼스런 깨달음……. 아마 이런 것들이 이번 연재를 읽으면서 우리가 함께 느낄 것들이 목록이 될 것 같습니다. 베테랑, 그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많은 관심과 기고 부탁드립니다.(원고 보내주실 곳 : freemediaf@gmail.com) 〈편집자 주〉

뉴욕특파원 생활 만 1년쯤이던 96년 4월 26일 뉴욕문화원에서 킴수 테일러를 만났다. 뉴욕문화원에서는 95년 10월부터 매달 마지막 주 금요일 저녁에 한국 영화를 상영하는 「시네 포럼」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는 주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 〈칠수와 만수〉 등 한국에서 만든 본격적인 극영화들이 상영됐지만 그 날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영화 전공 유학생들이나 동포 2세들이 만든 단편영화들만을 모아 소개하는 특별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한국인 강도 이야기, 이복 혼혈 누이를 찾아왔다가 말이 통하지 않는 바람에 경찰의 총탄에 맞아 죽은 한국 청년의 이야기, 흑인이 딸의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고 경악하는 한국 엄마의 이야기 등 충격적인 소재와 영상 처리 기법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입양 소녀가 생모를 찾기 위해 20년 만에 한국을 방문, 과거를 되새긴다는 내용의 〈그레이트 걸〉 을 출품한 킴수 테일러는 시사회가 끝난 후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자신의 이야기임을 밝혀 관객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아직 성공한 영화감독은 아니지만 아픈 과거를 자신의 예술 세계에 녹일 수 있을 만큼 당당하게 성장한 그녀에게 관심이 쏠렸다. 150㎝를 간신히 넘을 것 같은 작은 체구에 어쩐지 슬픈 느낌을 주는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아가씨였다. 그녀를 취재해서 경향신문 96년 5월 13일자 매거진X 1면 표지기사로 실었다. 다음은 그 기사 중의 일부다.

***


아픈 과거를 껴안은 당당한 한국인

“그녀는 한국을 잊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가슴 속에 파고드는 한국, 그리고 어머니. 15분짜리 16㎜ 단편영화 〈그레이트 걸(碩姬)〉 을 만든 킴수 테일러는 미국인이지만 주인공 석희는 한국 소녀다. 그러나 석희는 언제나 킴수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자기 자신이다.

지난 70년 한국에서 태어난 조석희씨는 5세 때인 75년 미국 뉴욕 주의 한 백인 중산층 가정에 입양됐다. 중년인 워너 테일러씨 부부에게는 이미 2명의 입양 남매가 있었다. 새 부모가 생기면서 킴수라는 새 이름을 얻은 석희는 오빠 더그와 언니 모니크까지 새로 생겼다. 그들은 장차 킴수가 만들 영화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동두천. 유년의 땅이며 고향. 극장 간판을 비롯한 동두천의 많은 기억들이 그녀에게는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아픈 것들이다.

『살결이 유난히 검은 10대 여자애가 한 집에 살았어요. 흑인 혼혈아였는지는 확실치 않아요. 이웃 사람들이 내 친언니라고 하는데 나는 그 여자애를 한 번도 언니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아빠는 매일 술을 마셨고 또 거의 매일 엄마와 싸웠어요. 나는 그 사람이 아빠였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한번은 엄마랑 할머니 집에 갔는데, 아마 아빠의 엄마였던 것 같아요. 그 할머니가 내 손목을 움켜쥐고 집밖으로 끌고 나오더니 축대 밑으로 날 집어 던졌어요. 그리고 큰 소리로 욕을 하면서 축대 밑에 떨어져 있는 나를 향해 내 신발들을 집어 던졌어요.』

그러나 엄마에 대한 그리움만은 아직도 진하게 묻어나온다.

『엄마는 미장원을 했는데 내가 3세 때부터 돈 세는 법, 바느질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어요. 여자는 언제든 혼자 벌어먹을 수 있어야 한다……. 무슨 그런 말을 한 것 같아요.』

그녀는 4세 때 고아원에 맡겨졌고 그 다음 해에 결국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엄마는 고아원에서 나를 배웅하면서도 결코 울지 않았어요. 사실 엄마가 우는 모습은 그때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는 엄마가 무서워서 나도 울지 못했어요. 지금은 그때의 엄마 심정을 이해하지만…….』

그녀는 엄마가 자신의 입장 때문이 아니라 딸의 행복을 위해 입양을 결심한 것이 틀림없다고 믿고 있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엄마도 날 보내고 섧게 우셨으리라.”

***


미국에서 중산층 백인 가정에 입양된 그녀는 아주 똑바르게 자랐고 18세 때 뉴욕에 있는 명문 아트스쿨 쿠퍼스 유니언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면서 양부모로부터 독립했다. 92년 9월 대학을 졸업한 킴수는 그해 11월까지 3개월 동안 동두천을 방문했다. 엄마를 찾고 고향에 대한 자신의 완전치 못한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자신이 1년간 의탁했던 고아원은 없어진지 이미 오래고 자신이 살던 동네도 기억만으로 찾기에는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그녀에게 남아있던 한국에 대한 아주 적은 기억들마저 혼미해져 버렸다. 고향을 찾으러 갔다가 ‘마음속 고향’까지 잃어버렸다는 느낌. 엄마를 찾고자 했던 꿈은 또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 〈그레이트 걸〉은 그때 수집했던 녹음과 화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한 청년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내가 심층 취재를 위해 그녀의 맨해튼 169 애비뉴 A1아파트 자취방을 방문했을 때 그녀가 가장 애독했다는 책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책장 한쪽에 몇 개의 영화 테이프들과 섞여 있는 것이 눈길을 끌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래픽 디자이너 일도 하고 일감이 떨어지면 식당 웨이트리스도 하면서 거장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단단하게 자란 그녀가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철이 든 후 입양된 그녀가 평생 지니고 견뎌야 했을 그리움과 고독이 안쓰럽기도 했다. 우리말을 거의 잊어버린 그녀에게 그래도 무슨 말이든 아는 말을 해보라니까 기어드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엄마”라고 웅얼거릴 땐 하마터면 내가 눈물을 찔끔거릴 뻔했다.

뉴욕특파원을 마치고 귀국한 후 3~4년 쯤 지났을 때 한 청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자신이 킴수의 동생이라는 것이다. 며칠 전 어머니가 자신을 부르더니 누렇게 색이 바랜 〈경향신문〉 쪽지를 내밀며 “네 누나다. 읽어 보고 찾을 수 있으면 찾아 봐라”고 하시더라는 것이다. 어머니는 진즉에 사실을 알았지만 새 남편은 물론 새 남편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들에게 심적 고통을 줄까 봐 여태 망설이다가 결국 자신에게 고백했다는 것이다. 나는 반색을 하고 뉴욕문화원을 통해 그녀의 새 연락처를 알아주었다. 그렇게 연락이 통한 그들 세 모자는 몇 달 후 서울에서 아주 기쁜 마음으로 만났다고 한다. 아! 그 녀가 그 사이 결혼한 백인 남편도 함께였으니 네 사람이 되겠다. 나는 남동생의 간곡한 부탁으로 후속 기사를 쓰지 않았다. 좋은 기사감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 가족의 상처를 헤집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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