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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빨’로 몰리며 살아온 세월[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10)] 박지동 전 동아일보 체육북 기자ㆍ전 광주대 언론대학원장
  • 관리자
  • 승인 2016.12.2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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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울 생활에서 사회적 불의에 대해 적으나마 분노를 느끼며 마음과 행동의 방향을 어렴풋이 조정하기 시작한 것은 학생 주도의 4·19 민주혁명이 시작되던 1960310일 경이었다. 1959년 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한국전쟁 때 1년 지체) 나는 등록금과 교복까지 무료로 제공해 주던 국립항공대학(철도청 산하)에 입학했다. 학교 강의는 용산 철도병원 바로 뒤의 가건물들에서 했다.

어느 날 지상전철을 타고 용산부터 삼각지를 거쳐 서울역과 남대문을 지나 을지로 입구 한전빌딩 앞에 이르렀을 때 전철이 멈추더니 요지부동으로 뭔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얼마쯤 지나니 남루한 옷차림의 노동자들이 이기붕 선생님을 부통령으로 모시자는 대형 플래카드를 어깨에 메고 을지로를 빽빽이 메운 채 행진해 오고 있었다.

알고보니 을지로 6가 서울운동장에서 ‘310일 노동절기념식을 마친 노동자들이 시위행진 중이었다. 그 무렵 나는 책가방 하나만 들고 고교선배가 소개해준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 먹고 자는 문제만을 해결하는 신세여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을지로 6가를 지나 문화동) 집까지 가는 길이었다.

이런 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노동절은 생산노동으로 고통받는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권익을 보장해주자는 다짐을 하는 날일 텐데, 어찌 미국 원조(특히 밀가루) 편중 배분의 장본인인 이기붕의 초상을 어깨에 메고 구호를 외치며 고생을 시키는 것일까.’

이기붕 패거리들이 밀가루 부정을 했다거나, 310일 노동절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한 국제노동절(5·1)을 부정하여 한국만의 독자적인 날로 지정한 것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역사책을 읽고 나서야 겨우 알게 되었다.

가뜩이나 눈칫밥을 먹는 가정교사 생활에 싫증이 났고, 학점을 따기도 힘들 정도로 재미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전공계열을 바꾸어 재수 끝에 들어간 곳이 서울대 문리대였다.

‘63 데모참여로 무기징학

새로 들어간 대학에서 성적은 그럭저럭이었고 만족도도 그만했다. 그런데 박정희 군사정권이 독재체제를 갖추어가면서, 악독했던 일본제국의 지원금(독립 축하금) 받기 협상에 몰두하는 모습(지상 최대의 굴욕외교)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선배들의 4·19정신과 조상들의 항일정신에 힘입어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6·3데모등에 참여하면서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나는 각성된 학생들의 모임인 민족주의 비교연구회에 가입했고 머지않아 해체될 운명인 줄 짐작하면서도 마지막 회장을 맡게 되었다. 사실은 이름뿐인 힘없고 연구실적도 전혀 없는 빈껍데기 조직인데도 정보기관에는 뭔가 있는 듯이 보였던 것 같다. 아니면 빈껍데기인 줄 알면서도 여론조작을 위해 적절히 써먹을 수 있는 재료로 보관해 두었던 것 같다.

나는 다른 동기생들보다 4년이 늦은 나이에 6·3데모에 참여했다가 무기정학을 맞아 1년이나 졸업이 늦어져 취직 마감나이인 28세에 가까스로 동아일보사에 기자로 들어갔다. 입사하여 6개월이 채 안 된 1967624일 신문사에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수상한 세월이라 항상 공포에 떨고 있던 나는 드디어 당할 때가 왔구나하는, 참담한 심정이 되어 뛰는 가슴을 달래며 얼른 옆자리 선배에게 알린 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저승사자들의 차에 올라탔다. 그들이 새까만 고급 승용차로 나를 잡아간 곳은 이문동 막사였다. 당시의 유명한 지옥은 남산이었는데, ‘이문동역시 지옥 제2청사정도는 되었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다.

나는 그로부터 얼마 전 수습기자이던 시절 반공교육과 견학을 겸하여 판검사, 기자들과 함께 이문동에 간 적이 있었다. 기관원들은 비밀정보자료 서랍장을 보여주면서 이곳에 30만 명이 넘는 요주의 인물들의 신상명세서가 들어 있다고 했다. ‘음지답게 반공영화도 흐릿한 빛깔로 퇴색시켜 공포스럽게 보여주어 보는 이들의 온몸을 냉동시켰다.

마침내 자라 보고 놀란 토끼가 솥뚜껑을 보게 되는 날이 왔다. 나는 오랏줄에 묶인 채 서대문구치소와 이문동 및 남산의 조사실을 한 달 가량이나 왕래하면서 험상궂은 사나이들한테 밤낮 없이 조사를 받으면서 협박과 고문을 당했다.

박정희는 5·16쿠데타 직후 공표했던 위기에 처한 조국의 반공 수호 작업이 끝나면 애국 군인 본연의 임무로 되돌아갈 것이라는 약속을 어기고 1963년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1967년 집권한 후 두 번째 대통령 선거에서 온갖 음모와 책략으로 다시 당선되었다. 반공 강압통치 아래서 숨을 죽여왔던 국민들은 또다시 민주화의 기회를 놓친 억울한 심정들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반정부 민주화 움직임은 당연히 청년학생들로부터 터져나왔다. 데모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박정희 정권은 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1967년에는 동백림 유학생 간첩단사건과 민족주의 비교연구회’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이 전국의 신문과 방송에 크게 보도되었다.

동아일보 기자를 간첩으로 몰아세운 중앙정보부

정작 당사자인 나는 감쪽같이 몰랐다. 도대체 수년 전 학생 때 데모 몇 번밖에 한 적이 없던 나를 향해 기관원들이 너의 지도교수는 간첩이었고 너는 간첩단이 배후 조종하는, 북괴를 위한 데모에 자주 참여한 간첩의 하수인이었다고 호통을 쳐대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황성모 교수가 간첩인데, 알고 있었지!”하고 다그치기에 내가 그럴 리가 없다고 대꾸하자, 그들은 여러 차례 협박 끝에 이 자식아, 간첩이 간첩이라고 말했겠냐, 대한민국의 정보요원이 간첩이라는데 우리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너 간첩 말을 믿냐 우리말을 믿냐?”라고 을러댔다. 결국 그들의 목적은, 허무맹랑한 거짓을 수긍해 줄 리가 만무하니까 여러 날 밤잠 안 재우며 협박 공갈 끝에 그들이 부르는 대로 피의자 조서를 만들고 공소장을 뒷받침해줄 증거자료랍시고 강제 자백서와 무인을 받아내는 데 있었다. 감방에 들어앉아 있는 동안 전국의 국민들은, 심지어 나의 가족?친지들까지도 연행된 사람들 모두가 악질 빨갱이 국가 반역자들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을 생각하니 인생이 완전히 끝장난 것 같았다.

이야기를 다시 돌려, 당시 간첩단 사건 시나리오 구상의 원천적 상황을 점검해보면 이러했다.

4·19 후 이승만 반공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학생들은 남북통일 대업을 달성하자는 애국열정으로 남과 북으로 자유롭게 왕래하여 평화적 통일논의를 벌이자고 부르짖다가 5·16 쿠데에 부닥쳐 여러 차례의 사건 조작으로 탄압을 받게 된 후로는 군사정권의 처분만 기다리며 비교적 잠잠하게 참고 있었다. 그러다가 군사정권이 끝내 반통일 성향을 계속 드러내면서 민주화의 길을 가로막고 장기 집권의 의도를 보이기 시작하자 학생과 재야인사들의 반독재 항거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마침 그때까지 동과 서로 분단되어 있던 독일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운 동서 베를린 시내에서의 자유왕래 기회를 틈타 서독 유학생(조선일보 기자였다고도?) 한 명이 동독을 거쳐 북쪽으로 넘어간 사건이 일어났다. 정보기관에서는 이 사건에서 힌트를 얻은 듯, 그동안 서독에서 유학하던 지식인들이 동쪽으로부터 불온한 자료를 간간이 받아보거나 몰래 왕래하는 경험도 해온 사실들을, 한국의 살벌한 분단 상황과 직결시키며 기막힌 지하운동조직의 시나리오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설을 세우고 반공 창작극을 구상했다. 정보기관은 수사요원들을 서독에 대량 급파, 개별 접촉과 연행을 통해, 나중에 독일 정부의 항의까지 받을 정도로 폭력적 수단으로 수십 명을 납치해왔다고 알려졌다.

박정희 정권의 시국 수습 의도는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선거 후유증을 씻어버리고 공포정치로 장기집권의 고삐를 굳게 틀어쥘 수 있게 되었으니까.

아무튼 재수없이 국가보안법 피의자로 엮이게 된 두 집단 중 앞의 동백림 간첩단멤버들은 참기 힘든 고문에 의해 사형선고까지 받는 고초를 겪었으나 내외의 여론에 밀려 2~3년의 형기를 마치고 대부분 독일로 돌아가거나 배신자의 신세가 되어 국내에 남은 사람도 생겨났다.

애당초 아무런 연관도 없이 걸려든 민족주의 비교연구회와 독일 유학생들의 연결고리로 이용된 황성모 교수는 정보기관에서 고문을 당한 끝에 불온서적 소지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회주의자로서 학생들에게 데모를 선동한 배후였다는 혐의를 뒤집어 쓴 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몇 년 후 출옥하여 고문 후유증으로 앓다가 사망했다. 다른 세 명은 실형 선고를 받고 옥살이를 하다 나왔고 나와 두 친구는 무죄선고를 받아 당일로 석방되었다. 그 후부터 나는 전과 없는 전과자가 되어 주변에서 감시의 눈길이 떠나지 않았다.

1974년에 접어들면서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1호에서 4호까지 발동하면서 재야 민주화운동과 학생데모를 철저히 통제했다. 유언비어를 입에 올리기만 해도 모두 잡아다 투옥했다.

신문사와 주변 지역 일대에서는 다섯 군데 (파출소?경찰서?치안본부?중앙정보부?보안사)에서 나오는 사복 요원들이 알게 모르게 개인과 집단을 감시?협박해댔다. 그러는 가운데 1973년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지고 육영수 저격사건이 일어났다. 1974년에는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서 수백 명을 투옥하는 데도 언론은 그 모든 사실들을 일체 보도할 수 없었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진 1973년 여름에 나는 마침 외신부 야간 당직을 할 때여서 통신을 번역하여 얼른 데스크에 넘겼다. 아침 편집시간이 되면 데스크 손에서 그 기사가 사라질 것이 틀림없는 시절이었다. 잘해야 1단으로 실릴 테니까, 큰 글자로 보이도록 횡()으로 제목을 달았다.

비겁한 언론인들 자폭하라

그 뒤 동아일보사 신문사 앞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몰려와서는 거짓보도, 왜곡보도만 해대는 비겁한 언론인들을 규탄하며 자폭하라고 소리쳤다. 그제서야 기자들은 부끄러움을 느끼며 언론노동조합을 만들고 1단으로라도 민주화운동 기사를 실어보자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동아일보사 경영주는 다짜고짜 노조 간부들을 해임하면서 노조간부가 아닌 나와 다른 한 동료를 함께 내쫓아 버렸다. 나는 얼결에 실업자가 되었다. 1974년 봄의 일이었다. 쫓겨난 기자들은 한 달가량 밖에 나와 있다가 경영주의 특사 조치로 회사로 돌아갔다. 나중에 쫓겨날 예행연습을 한 셈이었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19741024일 마침내 굴종을 박차버리고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했다. 다행스럽게도 다른 신문사 기자들도 잇따라 민주언론 실천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반독재 언론연합 투쟁이 가능하게 되었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동아일보사 경영의 생명줄인 광고 축소를 강요했고(기업주들을 은근히 협박하여 신문에 광고게재를 중단시킴) 신문사에선 공작의 주체가 누구인지 뻔히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묵묵히 굴종하면서 오히려 항의하는 기자들을 협박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중앙정보부와 동아일보사 사주 간에는 묵계가 있었다고 한다.

박정희와 친일충성의 경력을 함께 했고, 그의 5·16 쿠데타를 반공을 위한 영웅적 거사로 칭송했으며, 군사독재와 유신정변을 절대 지지하는 사설로 국민을 협박하거나 실망시켜온 동아일보사와 조선일보사 경영주들은 이번에는 민주언론을 열망하는 자기 회사 종사자들까지 서슴없이 잘라내는 반민주 폭거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온 국민의 권익을 침해하고 억압하며 민주언론을 말살하고 있는 독재정권의 하수인이 되었다.

광고탄압과 자유언론 학살

동아일보사에서는 결국 백지광고 사태 석 달만에 ‘자유언론 학살’의 비극이 벌어졌다. 1975년 3월 6일 조선일보사로부터 기자 퇴출의 소식이 들려오더니, 동아일보사도 3월 8일 경영난과 기구개편을 구실로 18명의 사원들을 해직했다. 잘린 기자들 가운데는 자유언론 실천투쟁을 주도한 노조위원장과 고참 언론인들이 들어 있었다. 편집국과 출판국, 방송국 종사자들 대다수가 나서서 경영난은 봉급을 나누는 방법으로 해결해갈 수 있다고 호소했으나 회사측은 막무가내였다. 3월 10일에는 대량해직에 항의한 장윤환 선배기자(기자협회 동아일보사 분회장)와 나를 퇴출시켰다. 예상은 했지만 정신이 멍해졌다.

이튿날 저녁부터는 젊은 기자 20여 명이 조판실을 점거한 채 단식 농성을 시작했다. 편집국에서도 무기한 항의 농성과 토론집회가 이어졌다. 농성하는 동안 야당 국회의원들과 선배 언론인, 종교인, 재야인사들의 격려방문이 그치지 않았다.

3월 17일 새벽, 경찰병력이 둘러싸고 지켜보는 가운데 회사가 동원한 깡패집단이 쇠망치와 몽둥이로 무장하고 편집국 철제문을 두들겨 뜯고 침입했다. 그들은 단식농성으로 지친 기자들에게 사정없이 각목과 몽둥이를 휘두르며 납치하듯 잡아 끌어냈다. 그리고는 강제로 차에 실어 어디론가로 질주해 갔다. 나 역시 폭도 몇 사람에게 질질 끌려 차에 실렸다. 차 안에 마침 안면이 있는 경비원이 있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혜화동 병원으로 간다고 했다. 순간 중앙정보부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해직을 당한데다 단식농성으로 닷새를 굶은 나는 겁에 질려 있었다. 나는 최소한 정보기관행만은 피하고 싶었다.

진관외동 집으로 돌아가 밥부터 찾았다. 아내는 밥이 없다고 했다. 오래 굶으면 갑작스런 식사를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의 거절로 보고, 다시 재촉하여 한 끼 식사를 거뜬히 해치웠다. 새벽밥을 먹고나서 라디오를 틀으니 동료 일부가 폭행을 당한 뒤 입원했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달려나가 혜화동 병원에 이르니 모두가 기독교회관 (종로5가)에 모여 있다고 했다. 기독교회관에는 단식농성을 한 기자 20여 명이 홀쭉한 배를 움켜쥐고 맥없이 주저앉아 있었다. 이미 집에서 배를 채운 나는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어 마침 후배동료의 부인이 가지고 온 죽을 조금씩 나누어 주며 허기를 채우라고 권했다.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엔지니어 등 130여 명은 3월 18일 오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들은 공휴일과 비바람 치는 날 말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동아일보사 정문 앞에 도열해서 침묵시위를 한 뒤 프레스센터까지 행진을 했다. 그런 일과가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그동안 동아투위 위원 여러 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원래가 가난하기 짝이 없던 ‘감자바위’ 출신인 나는 서울에 올라온 뒤부터 계속 가정교사로 생계를 해결해온 터라 서울문리대에서 ‘획득장학금’으로 등록금을 해결하고 5년만에 대학을 가R스로 졸업했다.

동아일보사 기자로 취직했을 때 봉급은 6천원이었다. 앞에서 말한 민비연 사건으로 잡혀갈 때 나의 양복 주머니에는 월급 6천원 중 중국집 외상값을 갚고 남은 돈 2천원이 들어 있었다. 1975년에 해직당하던 때 월급은 7만원 정도였던 것 같다. 우리가 쫓겨난 후 다른 언론사들에서는 기자 월급을 대폭 올려주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은 우리에게는 채찍을 가하고, 순종하는 기자들에게는 당근을 던져 주면서 언론계 전체를 독재의 하수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실업자가 여섯 식구를 부양하다

실업자가 된 나는 부모님과 처자식까지 여섯 식구를 부양해야 했다. 나는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찾아나섰다. 시원치 않은 영어실력으로 번역을 하기도 하고 다가 학원강사 자리를 찾아보았다. 강사를 하려면 세련미가 있어야 하고 번역은 때 맞춰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데 둘 다 만만치가 않았다. 무역회사를 몇 군데 알아봤으나 모두가 퇴짜였다. 술을 잘 마시면서 일을 해야 하는 단추 외판사원 자리가 있을 정도이니 나의 재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생활능력이 별로 없는 선배와 동료 10여 명이 외신부 차장 출신 이인철 선배의 동생이 운영하는 종각 부근 치과병원 옆방에 작업실을 차리고 영어책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번역은 아무리 해도 온전한 밥벌이는 못되었다. 나는 출판사를 찾아 편집․교정직도 해보았으나 봉급이 너무 박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고등학생 집에 드나들며 가정교사도 했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시기에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피하면서 그런 식의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입에 풀칠을 했다. 강사와 번역을 겹치기로 해도 자식들 과외는커녕 기본 학습서도 제대로 갖추어줄 수 없었다.

어른이고 아이들이고 생활에 쪼들리다보니 가족은 언제나 침울했고 성격이 폐쇄적으로 되어갔다. 가장이 불안과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다보니 식구들 역시 초조와 긴장 속을 벗어나지 못했다.

나의 실업시대 중반부터는 다행스럽게도 선배와 동료의 덕분으로 영어시사잡지 <타임>) 번역과 <육상경기>라는 스포츠 잡지 편집을 맡는 바람에 고정수입이 가능해졌다. 거기에다 치과의사와 한의사들의 대학원 입시 영어를 가르치면서 강의 자료를 모아 만든 영어 해석책이 잘 팔리는 바람에 먹고 사는 문제는 그럭저럭 해결되었다.

나는 여유가 좀 생기자 무턱대고 대학원에 들어갔다. 열심히 후배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학점을 따고 논문을 써서 대학 강사 자리에 안착하게 되었다. 취직이 된 것이다. 실직당한지 14년만의 직장이었다. 그때 나이는 50이었다.

광주대학교에 취직하여 몇 달쯤 지나서였다. 연구실에 있는데 책 외판원이 찾아왔다. 이렇다 할 책도 없이 전단지 비슷한 어느 출판사 광고지 한 장을 들고 나타나 내게 건성으로 몇마디 묻고 돌아가는 모양새가 정보원 같았다. ‘문제인물’을 확인하려고 나온 것이었다.. 그 후 1년에 한두 차례는 그런 일을 당했다.

광주대 교수 시절 다시 ‘좌빨’로 구속

언젠가는 모르는 사람에게서 전화가 와서 받았더니, 한 번 만나자고 했다. “누구신데, 왜 만나자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안기부 직원’이라고 대답했다. 긴장이 되어 심장이 뛰면서도 나는 “무슨 말씀이신지 전화로 하시지요”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가 조르기에 “만나지 않고 싶다”고 했더니 “왜 안 만나려 하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겁이 나서 못 만나겠습니다”라고 솔직히 말했더니 그는 불쾌한 듯이 전화를 탁 끊어버렸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언제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후 1997년 여름,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6개월쯤 전 광주지역에는 김 후보를 빨갱이로 몰아 민심을 잃게 하려는 여론 조작사건이 벌어졌는데, 불행하게도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내가 그 ‘붉은 분위기 조성 공작’에 말려들었다. 사실 사건 당시에는 정치공작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남부경찰서와 도경찰청 및 검찰의 수사를 받고 광주구치소에 갇힌 다음에서야 “아, 대통령 선거에 이용될 색깔논쟁의 들러리로 잡혀들었구나”하고 눈치를 챘다. 경찰과 검찰에서 수사관들이 캐묻는 혐의의 내용은 아주 허무맹랑했다.

나에 대한 범죄 혐의는 애당초 알맹이가 없었다. 이를테면 광주대학신문에 실린 나의 ‘시사해설 및 논평기사’에 관한 복사철, 내가 쓴 <진실 인식과 공정한 논술>이라는 교재 속의 일제강점기 친일언론 항목 등을 제시하면서 “어째서 북에 이롭고 남에 해로운 이런 글을 실었느냐”는 트집이 전부였다. 그리고는 책방에 나가 있는 책을 몽땅 수거하여 회수 확인증을 받아오라고 호통을 쳤다. 나는 수사관들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국가 정의의 대변자’라는 검사는 식민지 침략세력에 의한 불의의 역사를 서술해놓은 책을 두고 그 역사 기록이 진실된 것인지 아닌지, 조국과 민족의 자주독립 투쟁을 다룬 것인지 아닌지를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동아일보사 사주였던 김성수나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의 반민족 행위를 사실대로 서술해 놓은 것을 국가보안법에 억지로 꿰맞추려고 들었다. 검사는 ‘악마인 북’에 유리하게 썼으니, 당연히 남을 비방하는 글이 되었으므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을러대며 나를 기어이 법정에 세우고 말았다.

나는 “학자들의 객관적 고찰을 바탕으로 원저자들의 이름을 모두 싣고, 있는 그대로 인용하였을 뿐”이라고 하면서 변호사의 말대로 원저자 이름과 함께 책을 그대로 복사하여 재판부에 제출했다. 수사관들도 지쳤는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니 법정에 가서 싸우라”고 했다.

검찰은 “북괴를 이롭게 함을 뻔히 알면서도 구태여 책으로 만들어서 국민을 오도하도록 했다”는 식으로 공소장을 작성했다.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광주에 온 나를 만나자고 했다가 거절당한 정보기관원의 구겨진 자존심이 15년 동안이나 노려오던 괘씸죄에 대한 음해적 보복임”을 깨닫게 되었다. 냉장고에 갈무리 해 두었던 안주거리를 적절히 써먹은 것이다.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나는 보석 신청으로 일단 풀려났다. 1심에서 무죄, 항소심에서 기각(무죄), 대법원의 기각(무죄) 판결까지 무려 10년이 걸렸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에 나와 가족은 사회를 위해 정의롭게 살려는 선의지(善意志)와는 정반대로 ‘불온분자’로 몰려 고통을 겪어야 했다.

색깔론을 만병통치약처럼 악용하고 남용하는 국가폭력 앞에서는 개인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면서 ‘명예훼손’이나 ‘인격 모독과 파괴’를 아무리 소리쳐 봤자 소용이 없었다. 내 생년월일은 1939년 3월 1일이니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74세가 되었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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