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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번역실과 나[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09)] 황의방 전 동아일보사 여성동아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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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2.19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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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각번역실이 문을 연 것은 1975년 연말에서 이듬해 상반기의 어느 시점일 것이다. 나는 번역실의 창실 멤버는 아니었다. 당시 나는 주부생활사에 취직해서 <엘레강스>라는 여성지 창간에 참여하고 있었다.

중앙정보부가 취업 방해

1975312일 동아일보사 밖으로 내몰리고 난 후 약 4개월 동안은 매일 동아일보사 정문 앞에 도열해서 시위도 하고 만든 등사 팸플릿을 여기저기 돌리고(나는 당시 몇 군데 변호사 사무실을 담당했었다) 생활비는 기독교단체 등에서 보조해주는 얼마간의 돈으로 충당했다. 하지만 그렇게 무작정 버틸 수는 없었으므로 제각기 먹고 살 방도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러나 직장을 구한다는 게 쉬운 일일 리 없었다. 더욱이 우리는 중앙정보부의 방해까지 받고 있었다. 언론기관이나 교사로의 취직은 신원조회를 통해 차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3년쯤 후에 그런 일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창간되어 아는 분의 소개로 그 편집부원으로의 취직이 거의 확정적이었는데 일이 틀어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당시(1978)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합동통신사에서 창간하였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통신사는 언론기관이기 때문에 나의 취직이 어느 기관에 의해서 차단되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197510월에 주부생활사에 취직이 되었다. 동아일보사에서 함께 나온 권도홍 부장이 주부생활에 국장으로 들어가서 그분의 도움으로 내가 비교적 빨리 직장을 잡게 된 것이었다. <엘레강스>가 창간된 뒤 나는 <현대인다이제스트> 부서로 옮겼고(여성동아부에서 근무하다가 동아일보사를 나왔지만 사실 나는 여성지가 적성에 맞지는 않았다) 거기 있으면서 문을 연 번역실을 몇 차례 드나들다가 번역거리를 좀 맡겼던 것 같다.

번역실은 종로사거리에 자리잡고 있어 종각번역실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그런 요지에 허름하나마 방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실장인 이인철 차장의 동생되는 분인 치과의사의 배려 덕분이었다. 당시 번역실에는 이인철, 장윤환, 이계익, 박지동, 이종대, 박순철, 김종철 등 쟁쟁한 멤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주부생활에서 1년쯤 근무했을 무렵, 나는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졌고 자유롭고 분위기 좋은 번역실로 자리를 옮기고 싶은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1976년 말쯤에 주부생활사를 그만두고 번역실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날품팔이번역으로 연명

자유롭기는 하지만 사실 번역을 해서 수입을 올린다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날품팔이처럼 노동의 양이 정확하게 수입과 직결되어 있는데다가 번역료라는 것이 쥐꼬리만해서 직장 월급 정도의 수입을 올리려면 일감이 밀려 있다고 해도 그야말로 한 달 내내 하루 10시간 정도는 꼬박 노동을 해야 했다. 내가 번역실에 들어갔을 무렵 번역료는 200자 원고지 한 장에 25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나마 50원은 공동경비로 총무가 공제했다. 게다가 일감을 확보한다는 것도 그리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시일이 지나면서 한 사람씩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게 되었다.

이계익, 이종대, 박순철 씨가 무슨 경제연구소로 자리를 옮겼고 장윤환 씨는 FAO, 그리고 몇 년 후에는 실장이던 이인철 씨마저 농촌경제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몇 사람이 나가면 또 다른 사람이 들어오고(이부영, 조영호, 송재원 씨가 뒤에 번역실로 들어왔다) 해서 번역실은 명맥을 유지해 갔다. 그러는 동안 종각 근처의 사무실을 떠나 몇 차례 개인주택의 큰 방 같은 곳으로 자리를 전전했다. 나는 직장이라고 구해서 나갔다가 그곳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번역실로 돌아오곤 하면서 비교적 가장 오래 번역실을 지키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고 감옥에 갔던 동아투위 멤버들이 석방되던 1979년 연말을 맞았다. 당시 번역실은 비교적 터가 넓은 개인주택(테니스장까지 있었다) 구내의 가건물 같은 곳에 세들어 있었다. 당시는 입시생들을 지도하는 소규모 사설학원이 번창하던 시절이라 그곳에 임시로 지은 단층짜리 가건물들 여러 채가 있었고 거기서 어떤 사람이 사설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건물을 번역실이 세를 얻어 들어간 것이었다.

유신시대가 끝나고 1980년 봄에는 민주화의 희망이 감돌았다. 우리도 동아일보사로 복귀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해 517일 투위 멤버들이 우이동 어느 건물을 얻어 밤새도록 앞으로 나아갈 진로를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밖에서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연락이 왔고 새벽에는 우리가 묵고 있던 곳까지 사복형사들이 찾아왔다. 우리는 서둘러 모임을 종결하고 산에서 내려왔다. 그동안 대학가를 드나들며 활발하게 활동을 해온 일부 투위 멤버들은 자기네 신변이 위험하다는 걸 감지하고 반대쪽으로 산을 넘어 피신하기도 했다. 내려와서 버스를 타고 고대 앞을 지나면서 보니 군인들이 대학을 점거하고 경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도 이튿날 나는 번역실로 나갔다. 사태에 따라 재빠르게 적응하는 감각이 둔해져 있었던 탓일까. 하여간 당시 번역실 책임자 비슷한 역할을 하던 나는(사실 당시 번역실 멤버는 몇 명 되지도 않았다. 4~5명 정도였고 그나마 뜨내기로 드나들던 사람이 대다수였다) 번역실에 나온 사람도 없고 마음도 뒤숭숭해서 종로 피맛골 근처에 있던 조학래 씨의 출판사로 놀러 갔었다. 몇 시간 놀다가 번역실에 돌아와 보니 박지동 씨가 와서 자리에 앉아 쉬고 있었다. 박지동 씨는 당시 번역실 멤버가 아니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비는 시간에 번역실에 들러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박지동 씨가 나를 보고 하는 말이 내가 없는 사이에 수사기관에서 몇 사람이 찾아왔었다고 했다. 이곳 책임자가 누구냐고 물어서 내 이름을 댔다고 했다. 나야 잡혀갈 만한 활동을 한 적은 없지만, 당시는 여러 사람이 수배되어 TV 화면에 그 이름이 나열되어 움직이던 살벌한 시절이었다. 번역실에 드나들던 사람 가운데 그 수배자 명단에 들어 있는 사람이 한두 사람 있었던 것 같다.

517 쿠데타로 문 닫은 종각번역실

나는 겁이 더럭 났다. 그 사람들이 다시 찾아와서 조사할 것이 있다고 나를 데려갈 수도 있지 않을까. 일단 데려가면 몇 대 때리고 볼 것 같았다. 이럴 때는 튀는 것이 상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튿날부터 나는 번역실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번역실은 자연히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그날 밤 집에 3명의 수사요원들이 찾아왔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행히 그들은 나를 찾아온 사람들이 아니었다. 서강대에 다니다가 학생회 간부로 제적되었던 동생이 당시 복학해서 학교에 다녔었는데 5·18 이후 그런 복학생들이 위험인물로 조사대상이 되어 그들을 검거하러 다니는 모양이었다. 동생은 눈치 빠르게 이미 어디로 피신했는지 그날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3명의 수사요원들이 가고난 후 나는 심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나를 잡으러 또 다른 팀이 곧 올 것 같은 불안감이었다. 그때 우리가 살던 아파트는 성북동 언덕 위에 자리잡은 6층 짜리 아파트였는데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우리 집은 6층에 있었는데 자리에 누워 있으려니 계단을 올라오는 발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소리가 들릴 때마다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 수사요원들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잠을 못 이루고 뜬 눈으로 새운 나는 날이 밝자 동네 목욕탕으로 갔다. 잠도 안 오는데 자리에 누워 불안해 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고 집으로 가려니 또 불안했다. 그동안에 그들이 아파트로 찾아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슴을 두근거리며 아파트로 올라갔다. 다행히 아직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서 부랴부랴 대충 짐을 싼 나는 서둘러 집에서 나왔다.

그로부터 10여 일 동안 피신생활이 시작되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한영탁 부장(취직은 안 되고 나는 번역요원으로 번역을 해주고 있었다) 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나는 난곡의 안장환 작가 집에서 다음날을 보내고 다음에는 부산의 친구 남기탁을 찾아갔다. 부산에서 한 사흘 보냈던가. 당시 광주사태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시민을 향한 담화가 발표되고 부산 태화백화점 앞에서 부산시민들의 동조데모도 있었다. 나는 다음에는 양평 산골에 사는 누님 집으로 찾아갔다. 그때 마침 누에가 네 잠을 자서 누님은 누에에게 뽕잎을 먹이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나도 허리가 아플 정도로 그 일을 도왔다. 그렇게 10여일을 지내고 나니 지칠 대로 지쳐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에 와서 어머님에게 들어보니 그동안에 3명의 수사요원이 나를 찾아 왔었다고 했다.

그렇게 종각번역실은 생명을 다했다. 한 달 이상 문을 닫은 채로 둔 번역실을 찾아갔다. 주인에게 방을 비워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책상과 집기들을 종로에 있던 고우회관 지하실로 옮겼다. 그런 다음 그 책상은 거기서 아마 고물로 처분되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번역실은 대략 1976년 초에 시작해서 19805월까지 4년 몇 개월 동안 존속되었다.

내가 그런대로 직장에 정착한 것은 1982년에 <리더스 다이제스트> 단행본 편집자로 취직하면서부터였다. 그때는 정권이 바뀐 탓인지 신원조회 건이 해결되어 나는 다이제스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때는 다이제스트도 소속이 통신사에서 연강문화재단으로 바뀌어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통신사를 통합할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합동통신을 따라가지 않고 두산그룹에 그대로 남아 연강학술재단 소속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10여 넌 동안 나는 <리더스 다이제스트> 편집부원으로 비교적 안정된 직장생활을 했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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