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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방 나그네로 떠돈 37년 세월[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하다(08)] 허육 전 동아방송 프로듀서
  • 관리자
  • 승인 2016.12.12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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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으로 살아가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역사의 길을 걷느냐 현실의 길로 가느냐. 역사의 길에는 고난과 핍박이 있고 현실의 길에는 안정된 생활이 보장된다면 어느 쪽 길을 택하겠는가?”

송건호 선생이 스스로에게 던졌다는 질문이다. 그는 19753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다. 그는 기자들의 대량해직에 항의하여 사표를 던지고 찬바람 부는 역사의 길을 걷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끝내 역사의 사람이 되었다.

총칼로 위협받은 동아방송

2년 반 전인 19721017, 박정희 영구집권을 목적으로 유신이 선포되었다. 그 날로 국회가 해산되고 비상계엄령이 떨어졌다. 군대가 지배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나는 그때 동아방송의 프로듀서였다. 동아일보사 정문 양쪽에 군인들이 보초를 섰다. 총검을 꽂은 소총을 시옷자로 맞물리게 비스듬히 들고 있었다. 우리는 매번 그 밑으로 허리를 굽히듯 지나가야 정문을 드나들 수 있었다. 혹시 보초가 실수로 총을 떨어뜨리면 칼에 찍힐까봐 겁이 났다. 4층 방송국 입구에서도 또 한 번 총칼 밑을 지나야 내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총칼로 위협하는 가운데서 방송을 하게 된 것이다.

바로 며칠 후. ‘유신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좌담 프로그램이 긴급 편성되었다. 프로그램에 출연할 인사들의 명단과 전화번호가 어디선가 내려왔다. 조선일보 논설위원 한 사람이 사회를 보고 대학교수 두서녀 명이 출연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학교수가 설마 이런 어용프로그램에 나오랴하면서 섭외전화를 하니 미리 어디서 연락을 받고 있었는지 . 알아요. 나가죠.” 했다. 정규방송 편성표에 없던 시간이 배정되고, 출연자를 외부의 누군가가 지정하고, 방송내용도 제작자의 의도와 관계없는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의 편성권과 제작권을 외부 권력이 침해한 것이다.

미리 짜놓고 방송에 나오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손, 그 손이 또한 박정희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회복을 주장하는 인사들의 방송출연을 막고 있었다. 김재준강원룡 목사, 윤보선함석헌 장준하 선생, 이우정김동길 교수 등등이 그 즈음 방송출연 금지 대상자 명단에 들어 있던 분들이다.

동아방송은 중부권을 가청구역으로 한 라디오 방송국이었다. 그러나 청취율은 언제나 선두였고, 특히 뉴스와 보도프로그램에선 국민들로부터 높은 신뢰를 얻고 있었다. 박 정권의 독재에 비판적인 프로그램을 내보냈다가 담당 프로듀서와 제작 간부들이 구속 기소되어 여러 해 동안 재판에 시달린 일도 있었다.

매일 저녁 방송되던 <앵무새>라는 5분짜리 시사비평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방송국 제작부장이 퇴근길에 괴한들에게 납치돼 심하게 폭행당한 일도 있었다. 범인으로 군 특수부대원들을 지목하자 그들이 군복차림으로 여러 날 동안 교대로 방송국에 몰려와 피해자를 협박했다. 방송이 권력과 폭력에 유린당한 것이다.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방송국도 동참

유신독재가 국민을 옥죄고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던 때인 19741024일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고, 방송국 프로듀서들도 금기의 벽을 깨나가기 시작했다. 방송 출연 금지 대상이 된 인사들을 인터뷰해서 프로그램에 내보내기도 하고 명동성당에서 인혁당 가족들의 호소를 녹음해서 방송하기도 했다.

김기팔 극본, 이병주 연출의 정치 연속드라마 <정계야화>에서는 자유당 독재정권 시절을 그리면서 당시의 유신독재를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비판했다. 그러자 그 드라마에서 데모 소음은 빼라” “군중의 박수소리는 빼라는 등 온갖 압력이 내려왔다. 청취자를 자극하고 선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보도 프로그램에서 연속극까지 간섭의 손길이 뻗친 것이다.

동아일보사의 편집국, 출판국, 방송국이 함께 보도할 것은 보도하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고 저항할 것은 저항하면서 자유언론을 실천해 나갔다. 이런 가운데 1974년 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 동아일보에서 광고가 갑자기 사라지더니 곧 이어 방송프로그램에서도 스폰서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해 며칠 만에 광고 없는 방송이 되었다. 동아방송은 청취율이 제일 높고 광고효과도 가장 좋은 매체라 광고가 다른 방송에 비해 월등히 많았는데, 계속 광고를 해오던 기업들이 분명한 이유도 대지 못하고 일제히 광고를 중단한 것이었다. 두말 할 필요 없이 보이지 않는 손이 각 기업체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상업방송의 광고를 끊어버리는 것은 방송을 그만하라는 얘기와 다를 게 없다. 신문의 경우는 구독료나 격려광고로 얼마간 버틸 수 있지만, 방송은 광고료 이외의 수입이 없기 때문에 광고가 모두 끊기면 정말 어려운 상황이 된다.

새해에 들어서서도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없자 방송국 전체 사원들이 모였다. 197517일 동아일보사 광화문 사옥 4층 방송국 제작1부 사무실. 워낙 많은 인원이어서 거의 대부분이 책상 위에 걸터앉거나 선 채로 회의를 진행했다. 격렬한 성토와 비장한 각오, 열띤 토론 끝에 동아방송자유언론실행총회(위원장 이규만 프로듀서)’가 구성되었다.

방송에 민주와 인권의 가치를 반영하다

관행처럼 이어온 독재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모든 프로그램에서 인권과 민주의 가치를 적극 반영하기로 결의했다. 등사판으로 방송실행총회 소식도 발행하기 시작했다. 방송제작에 부당한 간섭이나 압력이 있으면 소식지에 폭로하고 자유언론 실천의지를 함께 다져나갔다.

동아일보사의 모든 매체에서 기업광고가 사라지자 국민들의 격려광고가 쏟아져 들어왔다. 광화문 사옥 1층 광고국에는 격려광고를 낼려고 몰려온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자유언론을 지지하고 민주회복을 바라는 열망을 담은 짧은 문장들이 광고면 곳곳에서 그믐밤의 별처럼 반짝였다. 자유언론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자발적인 모금운동에 나섰다. 기념 펜던트를 제작해서 파는 사람도 있었고 손수건을 만들어 파는 여대생들도 있었다. 그 판매대금을 들고 와서 격려광고에 보탰다.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 속에 자유언론을 실천해 가던 197538일 동아일보사 게시판엔 경영이 어려워서 기구를 줄인다는 구실로 기자 18명을 해임한다는 공고가 나붙었다. 그 이틀 후 부당해임에 항의한다고 또 두 명을 해임했다. 그 속엔 자유언론 실천에 앞장섰던 핵심적인 기자들 여럿이 포함돼 있었다. 기자들이 해임철회를 요구하면서 신문제작 거부를 결의하자 같은 날 또다시 17명을 추가 해임했다.

312일 오전 11, 4층 방송국 주조정실. 신문과 함께 제작거부에 들어간 방송뉴스부 기자들이 11시 뉴스 진행을 막았다. 그러자 회사 측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정오뉴스부터 방송 송출기능을 오류동 송신소로 옮겨버렸다. 정시 뉴스는 통신이나 다른 신문 기사로 메우고 나머지 시간은 계속 음악만 내보냈다. 매일 새벽 5시부터 자정 지나 1시까지 활기차게 방송을 내보내던 주조정실은 썰렁한 빈공간이 되었다. 광화문 사옥에 있던 우리들은 방송프로그램을 제작해봐야 방송할 방법이 없고 생방송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방송권, 제작권 모두를 빼앗긴 것이다.

할 일을 잃은 50여명의 프로듀서와 아나운서들은 그날부터 4층 방송국에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3층 편집국에서는 기자 100여명이 농성 중이고2층 공무국에서는 기자 23명이 단식 중이었다. 한국 최대 발행부수의 신문사, 최고 청취율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자유언론을 위한 농성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이 사태를 보도하는 곳은 국내에 한 곳도 없었다.

농성장에는 민주인사들과 야당 정치인의 격려방문이 이어졌고 사정을 아는 시민들도 먹을 것을 공급해 주기도 했다. 그 중에 잊지 못할 일은 인혁당 가족들이 한 광주리 가득씩 담아오던 주먹밥이다. 고기를 잘게 다져 넣은 밥을 주먹만 하게 둥글게 뭉쳐, 하나로 한 끼 식사가 충분히 될 만하게 만든 커다란 김 주먹밥이었다. 그 눈물 어린 주먹밥을 동료들과 나누어 먹으면서 끼니를 때웠다.

농성 다섯째 날. 농성하던 사무실의 모든 전화가 끊어지고 엘리베이터가 멈춘 가운데 자정이 되었다. 신문사 밖에서 격려의 외침과 손짓을 보내주던 사람들도 통금시간 때문에 다 돌아가고 광화문 네거리엔 적막이 내려앉았다. 우리는 각자 한 장씩 양심선언을 써서 농성장에서 함께 밤을 지키던 시노트 신부에게 맡겼다. 만일 어디론가 잡혀가서 본의 아니게 거짓 진술서를 쓰더라도 그것은 무효라는 양심선언이었다.

폭도들에 맞서 마지막까지 저항한 동아방송 동지들

317일 새벽 3시경. 3층 편집국 쪽 창문이 뜯기는 소리에 이어 고함과 우당탕 소리가 한참동안 들렸다. 4층 방송국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농성하던 기자들이 정문 밖 어둠 속으로 줄지어 쫓겨나는 모습이 보였다.

다음은 4층 방송국 차례. 4층 입구의 셔터가 해머에 찢어지고 그 틈으로 수십 명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폭력을 휘두르며 우리를 구석으로 밀어붙인 괴한들은 한 사람씩 잡아끌어 계단으로 내몰았다. 계단 좌우에 늘어서 있던 괴한들은 욕설을 퍼붓고 행패를 부리고 심지어 여자 아나운서들의 머리채를 잡아채기까지 했다. 괴한들이 방송국으로 쳐들어 올 때 맨 앞에서 버티던 김학천 프로듀서는 몽둥이에 머리를 맞고 심하게 다쳐서 여러 날 입원치료를 받았다.

사옥 밖으로 쫓겨나 정문 앞에 모여 있던 우리를 이번에는 경찰이 길 건너편으로 밀어붙여 해산시켰다. 이때 경찰에 밀린 한현수 아나운서는 길바닥에 넘어져 손바닥이 찢기고 무릎이 까졌다.

자유언론 투쟁을 하다 1백 수십 명의 언론인이 직장에서 쫓겨난 것은 우리 언론사에서뿐 아니라 세계 언론사에서도 처음 있는 대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그날 아침 기독교방송에서 한 번 짤막하게 보도했을 뿐 국내의 주요 신문과 방송 모두 이 사건을 철저히 외면했다.

그날부터 우리는 거리의 언론인이 되었다. 우리는 회사에서 쫓겨난 그날 동아투위를 결성하고 광화문 근처 골목 안 여관방 하나를 빌려 임시사무실로 삼았다. 농성 중 우리를 후원하던 민주인사들의 방문이 잇따르고, 많은 이들의 성금이 답지했다. 문인들은 자유언론에 등을 돌린 동아일보에 글을 쓰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성우들은 방송 출연을 거부했으며, 방송작가들도 집필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우리는 쫓겨난 다음날 아침부터 동아일보사 정문 좌우에 늘어서서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도열 시위가 끝나면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신문회관까지 도보 시위를 벌인 뒤 신문회관 2층 복도에 선 채로 구호를 제창하고 해산했다. 등사판으로 인쇄한 동아투위소식이 나오면 각기 수십 장씩 나눠 가지고 자기가 맡은 배부처에 돌리느라 날마다 바쁘게 뛰어다녔다.

가족을 돌보지 않고 매일 동아투위 일로 나다니는 동안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당시 여덟 식구 중에 버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는데 내가 실직을 당했으니 생계가 막연해졌다. 우선 급한 대로 아이들 돌반지부터 팔았다. 내 담배도 제일 싼 걸로 바꿨다. 그랬더니 처음엔 사정을 모르는 단골가게 아저씨가 선생님 같은 분은 이런 담배 못 피워요하면서 싼 담배를 주지 않으려 했다.

날마다 시위와 투쟁을 계속한 지 6개월, 빚을 얻어 생활하고 가게 외상도 쌓여갔다. 나처럼 사정이 어려운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더 이상 아침 도열 시위를 하기가 어렵게 되자 각기 일자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그 때 마침 투위의 이의직 선배가 출판사 일을 함께 해보지 않겠냐고 했다. 워낙 어려운 처지라 무슨 일이든 하긴 해야 했지만 출판 쪽은 전혀 몰라서 난감했다. 이 선배는 몰라도 괜찮다면서 다른 사람에겐 절대로 모른다는 소리를 하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다.

서툰 출판 일을 생업으로

나오라는 날 출판사라는 데를 찾아 갔다. 관수동 근처 종로 뒷골목의 허름한 사무실에 책상 여남은 개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잠깐 심드렁한 인사가 끝나자 각자 고개를 숙인 채 자기 일들을 계속했다. 그리고 오전 내내 말 한마디 없이 일만 하다가 누군가가 밥 먹으러 갑시다하면 함께 자장면집으로 갔다. 다방 들러 커피 한 잔 마시고 들어와 책상에 앉으면 퇴근시간까지 또 꼼짝 않고 앉아서 일만 했다. 한 달 두 달,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아침부터 저녁까지 똑같은 일과가 되풀이 되었다. 자유분방하고 변화무쌍한 프로듀서 생활을 10년 넘게 해오던 나에게는 정말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한두 달 전, 나는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방송 책임자가 만나자고 해서 나간 적이 있다. 한양대 교수 신극범 씨였는데 교육방송에 와서 같이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신분 문제가 좀 찜찜했지만 두말 할 것 없이 하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동아투위 사람은 언론계나 교육계에 취업이 막혀 있다더니 역시 그랬구나 하고 말았다.

방송국을 쫓겨나기 전 나는 <동아스코프>라는 시사 생방송 프로그램을 2년 넘게 맡고 있었다. 출근하면 함께 일하는 프로듀서들과 회사 인근 다방으로 간다.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그날 프로그램에 담을 내용을 의논한다. 미리 취재할 꼭지를 맡은 사람은 녹음기를 메고 취재에 나선다. 현장 생방송을 위해 중계차를 탈 사람은 동행할 아나운서와 함께 방송할 내용을 파악하고 점검한다.

생방송은 매일 오후 2시 10분부터 3시까지 50분간이다. 정오 가까이 되면 신문사 2층 공무국으로 내려가서 방금 조판이 끝난 그 날 석간신문의 시쇄(편집대장)를 들고 올라온다. 물기에 젖어 있는 그 편집대장에서 또 생생한 방송 대상을 건져 올려 현장으로 바로 중계차를 내 보내기도 한다. 그 다음 생방송 순서를 항목 별로 간단히 나열하는 큐시트를 작성한다. 진행할 남녀 아나운서가 읽을 아나운스멘트 원고를 빠르게 써 내려간다. 얇은 종이 사이에 먹지를 끼워서 볼펜으로 꾹꾹 눌러 써야 한다. 남녀 아나운서 각 한 부, 내가 생방송을 진행하면서 송출 엔지니어와 함께 보는 또 한 부, 그렇게 3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방송은 ‘프로듀서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일단 프로그램 제작 담당자가 결정되면 그 내용은 완전히 자율에 맡겨졌다. 취재 대상이나 방송 내용 구성은 전적으로 담당 프로듀서가 결정하고, 원고도 생방송 직전에 쓰기 때문에 더 빠르고 생생한 현장감을 살릴 수 있었다. 생방송 <동아스코프>팀의 김정일 프로듀서는 그 때부터 환경문제에 눈을 돌려 연세대 권숙표 교수와 함께 환경보전관계를 자주 다루었고 신영관 프로듀서는 인권문제에 관심이 많은 고준환 기자와 함께 인혁당 가족들과 인터뷰해 그들의 생생한 육성을 내보내기도 했다.

오후 3시에 생방송이 끝나면 그날 일은 끝. 동아일보사 전체의 제도에 따라 출근카드는 찍어야 하지만 퇴근은 자유였다. 내 필요에 따라 휴일에도 나와서 일하고 때로는 밤샘일도 하지만 자기 프로그램 다 끝내고 나간다는데 누가 뭐랄 사람은 없었다.

방송에서 쫓겨나 답답한 근무환경의 출판사 생활을 이어가던 그해 초겨울, 신문에 한 제약회사의 사원모집 광고가 났다. 영업부문, 연구부문, 업무부문, 광고부문인데 광고 책임자 자리도 있었다. 광고부문의 시험 과목을 보니 영어와 상식이엇다. 논문만 빠진 언론사 입사시험 과목들이었다. 시험성적으로 뽑는다면 한 번 해볼 만하지 않은가 싶었다. 시험 볼 장소는 제약회사 인근의 선린상고 교실이었다.

11년 전 그맘때 나는 중앙고등학교 교실에서 동아방송 입사시험을 쳤다. 동아방송 개국 후 처음 뽑는 프로듀서 시험이었다. 100대 1의 경쟁률. 영어, 상식, 논문 세 과목 시험을 끝내고 중앙학교 정문을 나서면서 내려다보니 지원자들의 뒷머리가 재동 골목을 꽉 메운 채 끝도 없이 흘러나갔다.

그 시험을 통과해서 프로듀서 1기생 중 한사람으로 입사한 나는 수습교육이 끝나자 바로 사회교양 부문에 배치됐다. 녹음기를 어깨에 메고 현장을 뛰어 다니면서 취재하는 일, 취재 테이프를 편집하는 일, 아나운서나 성우들이 읽을 방송 원고를 쓰는 일, 스튜디오에서 프로그램을 녹음해서 완성하는 일, 생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준비하고 진행하는 일 등등 외곬 사회교양 프로듀서 일에 빠져 나는 10년을 보냈다.

그 동안 대학원에서 신문학 석사학위도 받았고 동아방송에서 처음으로 네덜란드에 가서 방송연수과정도 밟았다. 방송 일이 좋았고 그 일을 계속해서 하고 싶었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입사시험이 없을 줄 알았다.

제약회사 광고과장이 되다

제약회사 광고책임자를 뽑는 필기시험에 합격하여 사장 면접을 보던 날이었다. 광고업무에 대해서는 한 가지도 묻지 않고 딱 한 가지 질문을 했다. “동아일보사에서 경영진의 방침에 반기를 들다가 쫓겨났는데 여기 와서도 또 그럴 거냐?”는 것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언론사에선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사기업에선 회사의 이익을 위해 함께 노력해야죠” 라고.

1976년 새해부터 제약회사 광고과장 일이 시작됐다. 광고 일도 아는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업체 근무 경험이 없기 때문에 지출전표 한 장 쓸 줄도 몰랐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 물어가면서 광고 업무를 하나하나 익혀 나갔다. 광고 제작에는 창의적인 면도 있어서 출판사 일보다는 그런대로 할 만 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은 늘 비어 있었다. 이건 내가 계속 할 일은 아닌데, 나는 방송 현장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광고 업무를 하는 동안 광고계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기자 출신으로 광고학 교수로 있던 신인섭 씨, 방송 프로듀서 출신으로 광고대행사 간부로 있던 이낙운 씨 등, 이 분들이 나를 아껴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이분들과 함께 한국 카피라이터 협회를 발족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광고 기획자 단체였다.

광고계에서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이 다리를 놓아 업종이 다른 큰 회사로 옮겨가면서 광고와 마케팅 업무를 해서 밥은 굶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가는 곳마다 나는 그 회사의 본 식구가 아니라 문간방 나그네 신세라고 생각했다. ‘지금 하는 일은 생계를 위해 임시로 하는 일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따로 있다. 그 때가 언제 올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내 본래 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생각이 언제나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회사 동료들과는 업무 이야기나 가벼운 일상사 얘기만 나눌 뿐 대화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가 매월 17일마다 열리는 동아투위 모임에 나가면 종횡무진 백화제방 비분강개, 후련한 대화가 봇물처럼 넘쳐났다.

동아투위 연말 모임에는 해마다 많은 재야 민주인사들이 함께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박형규ㆍ이해동 목사, 함세웅 신부, 이돈명ㆍ홍남순ㆍ한승헌 변호사, 이우정ㆍ성내운ㆍ백낙청 교수, 고은ㆍ신경림 씨 등 문인, 송건호ㆍ리영희ㆍ백기완 씨 등이 번갈아 가면서 격려사를 했다. 유신독재 치하에서 동아투위가 여러 갈래의 민주화 세력을 연결하고 함께 엮어내는 구심점 역할을 해 온 까닭이다. 성내운 교수가 양성우 시인의 시 ‘겨울공화국’을 비장하고 낭랑하게 암송하던 광경도 잊히지 않는다.

명동성당에서 열리는 민주화를 위한 특별미사에도 자주 참석했는데, 특히 1975년 5월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주관한 ‘동아투위를 위한 미사’가 끝난 직후 김수환 추기경께서 우리들 곁으로 와서 동아투위 위원들을 ‘작은 예수’라고 하시던 일도 기억에 새롭다. 유신독재 아래서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해 애쓰다가 직장에서 쫓겨나 핍박을 받는다고 해서 하신 말씀이겠지만 천만 과분한 찬사가 아니었나 한다.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목요기도회에도 자주 나갔다. 기도회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규탄하고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는 열기로 늘 뜨거웠다. 때로는 경찰이 기독교회관 주변을 둘러싸서 출입을 막기도 했지만 기도회가 열리는 강당 안은 항상 만원이었다.

1978년 봄 동일방직 노조원들을 위한 기도회가 있었다. 노조에 대한 탄압과 모욕에 분노한 여성 노동자들의 절규와 노래로 기도회장이 들썩였다. 구속당한 종교인이나 지식인, 학생들을 위한 기도회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치열해서 도저히 그냥 기도로만 끝낼 수가 없었다. 동아투위는 그들과 아픔을 함께하기 위해서 동조단식을 하기로 했다. 나는 그때 마침 실직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단식에 합류했다. 단식 장소는 불광동 천관우 선생님 댁. 스무남은 명 동아투위원이 함께 단식을 했다. 낮에는 민주인사들의 격려 방문이 줄을 이었다. 커다란 물주전자와 소금을 수북이 담은 사발을 한가운데 놓고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그 때 방문 온 고은 시인의 이야기 한 토막. 자기가 절에 있을 때 단식 끝에 죽은 스님을 봤단다. 산 위 암자에서 단식수행을 마치고 내려온 젊은 스님이 마침 그 날 아래쪽 절의 재에 올렸던 떡을 너무 많이 먹더니 그만 급사하고 말았단다. 그러니 단식 끝나거든 묽은 죽부터 천천히 회복식을 시작하라고 거듭 충고하는 것이었다. 단식하는 일주일 내내 기관원들은 이웃집 담 너머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허망하게 사라진 ‘서울의 봄’

박정희가 죽은 이듬해 소위 ‘서울의 봄’이 어수선하던 1980년 5월 17일. 동아투위는 결성5주년을 맞아 서울 북한산 골짜기 ‘명상의 집’에 모여서 1박2일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밤 11시 쯤 됐을까. 그 날 이화여대에 모여 있던 전국 대학생회 간부들이 일부는 경찰에 잡혀가고 일부는 가까스로 도주했다는 연락이 왔다. 12ㆍ12 군부쿠데타세력의 움직임이 심상찮은 것 같다는 판단에 따라 이튿날 일정을 취소하고 모두 아침 일찍 서둘러 해산했다. 투위 위원장을 비롯해서 독재반대에 앞장서다 감옥에 갔다 온 위원들은 집에도 못 들리고 바로 도피생활로 들어갔다. 민주인사 검거 선풍이 휘몰아치고 광주에서는 피의 살육이 일어났다.

평범한 투위원에 불과한 나에게도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시도 때도 없이 내 직장으로 찾아와서 눈을 부라리며 겁을 주고 때로는 나를 끌고 다니면서 괴롭혔다. 의주로 전매청 자리 빈 건물로 데려가서 완력도 행사했다. 지금 치안본부가 서있는 곳이다. 나도 모르는 것을 대라고 윽박지르는 것이었다. 그 때는 자기들이 겨냥하는 사람이 잡히지 않으면 그 대신에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잡아다 고문하고 사건을 조작하던 시절이었다.

견디다 못해 나는 직장도 팽개치고 도망 길에 나섰다. 멀리 부산 절영도 끝에 가서 종일 어슬렁거리기도 하고 서울의 친구네 집을 찾아다니면서 동가식서가숙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짓도 오래 할 수 없어 나중에는 직장 후배 집에 달포 정도 숨어서 지내기도 했다.

서른다섯 나이에 방송국을 쫓겨나서 이리 저리 떠돈 지 37년. 어느 직장을 가도 스스로 ‘문간방 나그네’로 생각하고 지냈으니 이룬 업적도 없고 가진 재물도 없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현실의 길을 버리고 역사의 길을 선택한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나마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시대를 함께 살아온 나의 보람으로 충분하다.

끝으로 재삼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37년 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제작 일선에 있던 인력 절반 이상을 쫓아낸 것이 과연 신문사 경영진의 독자적 결정에 의한 것이었을까?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이미 그건 아니라고 하지 않았는가.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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