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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언론투쟁 기록 연재를 마무리하며] 한국 언론사 속의 80년 언론 투쟁(1)〈고승우 합동통신 기자,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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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6.12.05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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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력과 언론

한국 신문은 19세기 후반 개화운동 속에 탄생했으나 사회적 영향력 확산 이전에 일본의 한반도 강점으로 민간지가 급격히 쇠퇴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일제의 통치수단의 하나로 민간지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동아, 조선의 보도 영역에서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보도, 논평이 원천적으로 제외되었다. 이 점에서 외세에 부역한 반민족적 언론행위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해방 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 일제 잔재를 청산치 못한 언론은 정치권력의 통제를 받는 등 일부 언론은 여전히 국민에게 봉사하는 언론과는 거리가 멀었다. 4·19 뒤 언론은 사회목탁으로 등장할 기회가 있었으나 5·16쿠데타로 그 기가 꺾이고 만다. 군부통치 속에서 반민중적 언론 활동을 강요받는 순치된 언론의 모습으로 변했다. 박정희 정권 18년과 80년의 ‘언론학살’에 이어 5공화국 기간 동안 언론은 혹독한 시련기를 거쳤다. 25년간 군화에 짓밟힌 언론의 모습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즉 언론 통폐합이 61년, 72년, 80년 등 3차례에 걸쳐 일어났고, 기자대량 해직 또한 72년, 75년, 80년 등 3회에 달한다. 언론에 제약을 가한 법률은 20여개나 되고 불법적 보도지침 시달과 이행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뤄졌다. 그 밖에 긴급조치. 계엄선포에 따른 한시적 언론기능 억제도 수회에 달한다.

박정희 정권은 집권 초부터 언론에 대한 집요한 공세를 폈다. 그 결과 언론계는 점차 위축되어 67년 이후 기자의 구속ㆍ폭행 등의 사건이 발생해도 보도조차 않게 되었다. 이 같은 언론의 무기력증에 대해 67년 선거를 고비로 대학생과 독자들의 비판 및 언론계 내부의 자성이 고개를 든다. 즉 71년 4월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언론자유 수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그해 10월 제2의 언론자유 수호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군부는 71년 12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켜 언론탄압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리고 72년 7·4 남북공동성명 발표에 이어 10월 유신헌법이 등장하자 언론은 유신체제의 홍보기구로 전락했다. 박 정권은 기자 신분증 발급제도를 통해 행정적인 언론 통제를 강화했다. 즉 기자 신분증을 발급하는 과정에서 권력이 언론인 자격 유무를 사전 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 정권은 이어 ‘언론 자율정화’라는 이름으로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언론인을 내쫓았다. 즉 8개 지방지가 3개로 줄어들고 전국 기자 수는 6천3백여 명에서 3천 4백여 명으로 감소했다. 73년 방송법이 개정되어 방송윤리위원회가 자율기구에서 법적 기구로 바뀌어 검열기능이 커졌다.

대학가와 시민사회의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이 커지자 박 정권은 74년 1월 긴급조치 1호 선포에 이어, 다음해 5월까지 9회에 걸쳐 긴급조치를 양산했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75년 5월은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되고 국내에서 개헌논의가 고개를 드는 상황이었다. 긴급조치 9호는 개헌논의 금지, 집회·시위금지와 함께 언론의 그에 대해 보도하는 행위도 금했다. 언론을 극도로 위축시킨 긴급조치 9호는 4년7개월이 79년 12월에야 해제되었다. 9호 해제는 10·26으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상태에서 더 이상 존속시킬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 정권의 거듭된 긴급조치 아래에서 언론탄압이 더욱 노골화되자 기자들의 자유언론 수호운동이 다시 시작되었다. 동아일보. 한국일보에서 노조 결성이 시도되었으나 좌절되었다. 그리고 74년 12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동아일보 광고탄압이 일어났다. 75년 언론자유 운동에 앞장섰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들이 무더기로 해직되었고 이 운동을 지원하던 기자협회보가 폐간되었다. 이후 10·26까지 4년여 동안 언론은 철저하게 권력에 유린당했다. 정보기관원은 언론사에 전화 한 통화로 가시를 줄이고, 뺄 수도 있었다. 물론 권력에 편입되기를 바라던 어용 언론인의 자발적 협조도 국민의 알권리를 크게 훼손했다.

10·26 이후 선포된 계엄령에 따라 언론은 사전검열을 받게 되고 군부는 유신체제 아래에서 억눌린 민주화 주장이 분출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언론검열을 악용했다. 당시 언론계의 젊은 기자들은 4년 동안 언론을 짓누르던 비상조치 9호가 해제된 79년 12월을 전후해 유신시대 언론을 반성하고 언론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움직임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러나 이런 언론자유운동은 계엄사 검열단에서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하는 현실, 특히 민주화 추진운동을 부정적으로 보도하도록 유도하는 상황에서 그 한계가 명백했다.

이 때문에 검열철폐 주장이 제기되어 기자협회는 80년 5월 20일을 기해 전국 언론사가 검열을 거부토록 의결했다. 신군부는 언론을 비롯한 대학가, 재야 등에서 불어오는 민주화 열풍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80년 5월 17일을 기해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와 함께 군정 연장을 위한 탄압책을 썼다. 이는 결국 광주항쟁을 유발했고 민간인 대량 살상으로 이어졌다. 언론은 현지에 특파된 기자들이 보낸 기사와 외신보도에 담긴 군의 파괴적 행위에 반발해 그해 5월 20일 경부터 전국 언론사가 부분적인 검열 및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그것은 광주항쟁 기간 동안 강행되었다. 신군부는 내란을 자행하는 과정에서 ‘광주’진압과 더불어 최우선적으로 언론 장악을 시도, 1천여 명의 언론인을 강제해직하고 40여개의 언론사를 통폐합했다. 이어 행정명령으로 언론사 등록을 취소할 수 있는 독소조항이 담긴 언론기본법을 만들었고 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매일 보도지침을 언론사에 보내 국민의 알권리를 짓밟았다.

2. 74~80년의 언론탄압과 언론 저항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언론사 통폐합 조치와 합법ㆍ불법적 조치 등으로 언론을 탄압했다. 쿠데타 세력은 거사 이전부터 언론의 중요성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쿠데타 성공 이후 계엄령을 선포하고 포고 제1호로 언론의 사전 검열을 강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일주일만인 5월 23일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 정화’를 앞세워 언론통폐합을 실시했다. 그 결과 76개 일간지를 37개로, 375개의 통신사를 11개로 줄였다. 폐쇄된 언론사는 월ㆍ계간까지 합쳐 1,170개사에 달했다.

쿠데타 세력은 통일과 혁신을 기치로 내걸고 언론활동을 하던 『민족일보』를 강제폐간하고, 이 신문사 사장인 조용수씨를 사형시켰다. 이 신문은 당시 혁신계의 주장인 남북협상·남북교류·중립화통일·민족자주통일 등을 내세워 1961년 2월 창간되었다. 쿠데타 세력은 ‘반공이 국시’임을 내세워 급조한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소급적용해, 조용수 사장 등에게 “조총련계의 자금을 끌어들여 창간해 이북괴뢰집단의 주장에 동조하는 논조를 폈다”는 혐의를 씌워 재판에 회부했다. 조용수 사장은 5·16쿠데타가 발생한지 5개월만인 그해 12월, 만 31세의 나이로 사형에 처해졌다.

『민족일보』 탄압의 구실을 보면 어처구니없다. 간첩 이영근으로부터 조총련계 자금을 받아 신문을 만들면서 북한 괴뢰집단이 주창하는 평화통일을 선전했다는 것이 당시 혁명재판소가 내걸었던 조 사장의 죄목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용수 씨에게 공작금을 건넨 것으로 알려진 이영근은 1990년 정부에 의해 국민훈장을 받는 등 간첩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쿠데타 세력에 의해 조작된 ‘사법살인’으로 드러난 것이다(한겨레 2001년 2월16일, 경향신문 2001년12월12일).

박정희는 1962년 언론 장악을 시도하면서 중앙정보부를 앞세워 정수장학회의 전신인 부일장학회 헌납을 강요했다. 정수장학회의 ‘정수’는 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에서 연유한다. 정수장학회는 장학 사업이 목적인 공익재단이지만, 1962년 설립 이래 문화방송, 부산일보 등 두 언론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 장학회는 부산일보 주식 100%를 소유하고 있고, 문화방송의 주식도 68년 이전에는 주식의 100%, 68년 이후에는 주식의 30%를 가지고 있다.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이하 진실위. 위원장 오충일)는 2005년 7월 국정원에서 부일장학회 헌납 및 경향신문 매각에 따른 의혹 조사결과를 밝혔다(연합뉴스 2005년7월22일). 진실위가 밝힌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부일장학회 및 부산일보, 부산문화방송은 중앙정보부의 강압에 의해 헌납 또는 매각됐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부일장학회 헌납과정에 박정희의 개입사실이 드러난다. 당시 중정 부산지부장이 한때 박정희의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한 바 있고, 이 지부장이 박정희로부터 지시받기 직전에 작성된 부산지부의 실태보고서에는 김지태 부산문화방송 사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 박정희에 의해 수사대상이 되어 구속됐다고 판단된다.

중정 부산지부는 1962년 4월 20일께 귀국한 김 사장을 부정축재처리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했으며, 김 사장은 구속된 상태에서 5월 25일 최고회의 법률고문이던 신직수 씨에게 재산 포기각서를 제출한데 이어, 6월 20일에는 고원증 전 법메카니즘 기부 승낙서에 서명 날인했다. 특히 구속 상태에서 작성한 기부 승낙서 등 문건 7건에 대한 문서감정 결과, 기부 승낙서의 서명이 김 사장 본인을 포함해 3명이 서명을 했고 기부 승낙서 날짜도 ‘六月 二十日’에 한 획을 가필해 ‘三十日’로 변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지태 사장의 재산헌납은 구속수감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중정은 수사권을 남용해 재산헌납 과정에 개입했고 신직수와 고원증 등 국가재건최고회의 관련자들은 박정희 의장 지시로 헌납받은 재산을 5·16장학회로 이전했다.

한편 경향신문의 강제매각에 대해서도 그 부당성이 뒤늦게 공개되었다. 이 신문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군사정권을 비판하다 탄압을 받아 1964년 강제로 매각되었다. 진실위는 경향신문 매각에 따른 의혹 조사결과 중앙정보부가 개입하는 등 불법적인 것이었다고 밝혔다(연합뉴스 2005년 7월 22일). 진실위의 조사결과는 다음과 같다.

경향신문의 대정부 비판 기사가 계속되자 박 정권은 1964년 경향신문 관계자 10명에 이어 이준구 사장도 구속했다. 박 정권은 이 사장이 풀려난 뒤에도 논조 변화가 없자 탄압을 강화한다. 즉 박정희는 김형욱 중정부장에게 “경향신문에서 이준구가 손을 떼게 하라”고 지시한 뒤 강제매각이 추진되었다. 경향신문은 결국 1966년 1월 경매에 부쳐졌고 단독 입찰한 김철호 기아산업 사장에게 낙찰됐다. 김 사장은 박정희와 동향이었다. 입찰과정에 김형욱 중정부장의 지시에 따라 중정의 대공 활동국, 서울분실, 감찰실 등 부서들이 경쟁적으로 이 사장 부부를 압박하는 등 매각에 개입했다. 김형욱 중정 부장의 지시에 따라 부당한 압력이 행사된 것은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추진, 실행된 것으로 판단된다.

진실위는 군사정권을 비판하다 정권 탄압을 받아 매각당한 경향신문의 활동을 재평가하는 한편 “피해 언론인의 명예회복 조치가 필요하다”면서 “경향신문이 사옥의 토지 임대료 지불해야 하는 등 큰 손실을 입어 온 만큼 손실보전 방안을 강구할 사회적 공론화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박 정권의 언론통제 가운데 법률적 통제로는 헌법, 신문 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 계엄법, 반공법,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법, 집시법 등이었고 행정적 통제로는 기자 신분증제 실시, 정부 각 부처 대변인제 도입 등이 손꼽힌다. 불법적 탄압은 보도지침을 통한 규제,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 임의 동행 형식의 언론인 불법 연행조사, 기자에 대한 폭력행사 등이 포함된다. 언론사를 드나들던 기관원은 ‘관선기자’ 또는 ‘언론계 출입기자’로 불렸다. 이상과 같은 언론 통제를 통해 정부에 유리한 기사와 대통령 기사는 크게 다루어지고 정권에 불리한 기사는 축소, 왜곡, 삭제되었다. 또한 재벌위주의 경제구조로 고속성장정책을 펴면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짓밟는 경제현장의 보도는 철저히 억제되었다. 군사정부는 이 시기에 언론에 대한 탄압과 함께 언론의 상업주의적 속성을 이용한 행정적, 재정적 지원과 특혜로 언론을 권력에 편입시켰다.

박 정권의 집요한 공세 속에 언론계는 점차 위축되어 1967년 이후 기자의 구속, 폭행 등의 사건이 발생해도 보도조차 않게 되었다. 이 같은 언론의 무기력증에 대해 67년 선거를 고비로 대학생과 독자들의 비판 및 언론계 내부의 자성이 잇따랐다. 즉 71년 4월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언론자유 수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그해 10월 제2의 언론자유 수호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군부는 71년 12월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켜 언론탄압을 더욱 강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72년 7·4남북공동성명 발표에 이어 10월 유신헌법이 등장하자 언론은 유신체제의 홍보기구로 전락했다. 박 정권은 기자 신분증 발급제도를 통해 행정적인 언론 통제를 강화했다. 즉 기자 신분증을 발급하는 과정에서 권력이 언론인 자격 유무를 사전 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박 정권은 이어 ‘언론 자율정화’라는 이름으로 언론사를 통폐합하고 언론인을 내쫓았다. 즉 8개 지방지가 3개로 줄어들고 전국 기자 수는 6천3백여 명에서 3천4백여 명으로 감소했다. 73년 방송법이 개정되어 방송윤리위원회가 자율기구에서 법적기구로 바뀌어 검열기능이 커졌다.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이 커지자 박 정권은 74년 1월 긴급조치 1호 선포에 이어, 다음해 5월까지 9회에 걸쳐 긴급조치를 양산했다.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된 75년 5월은 인도지나 반도가 공산화되고 국내에서 개헌논의가 고개를 드는 상황이었다. 군부는 긴급조치 9호로 개헌논의 금지, 집회·시위금지와 함께 언론이 이를 보도하는 행위도 금했다.

긴급조치아래에서 정부의 언론탄압이 더욱 노골화되자 기자들의 자유언론 수호운동이 다시 시작되어 동아일보. 한국일보에서 노조결성이 시도되었으나 좌절되었다. 그리고 74년 12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동아일보 광고탄압이 일어났다. 75년 언론자유운동에 앞장섰던 동아일보, 조선일보 기자들이 무더기로 해직되었고 이 운동을 지원하던 기자협회보가 폐간되었다.

74년 10월24일 동아일보, 동아방송의 젊은 기자 180여 명이 편집국에 모여, 유신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자유언론실천선언문’을 발표했다. 박정희 유신정권은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분쇄하기 위해 74년 12월 16일부터 동아일보에 대해 광고탄압을 자행했다. 이에 따라 20일부터는 광고 무더기 해약사태가 시작돼 다음해인 75년까지 계속됐다. 그러나 75년 1월부터 5월 중순까지 격려광고 게재건수가 1만 건 가량이나 되는 등 동아일보는 국민들에게 큰 지지를 받았다. 광고탄압의 장기화는 결국 경영진의 굴복으로 종결됐다.

동아일보 경영진은 75년 3월 8일 경영합리화에 따른 기구축소라는 명분으로 기자 등 18명의 사원을 해고했고 10일에 추가로 2명의 기자를 해고했다. 회사 측은 12일 기자들이 제작거부를 실시하자 17명의 기자들을 해고했다. 기자들은 연이은 해고조치가 자유언론실천운동과 언론노조운동을 모두 말살하려는 것이라면서 12일에 농성을 시작했다. 회사 측은 17일 폭력배들을 동원해 폭력적으로 농성을 해산시켰다.

조선일보에서는 유신체제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외부기고문의 게재에 대해 두 기자가 항의하자 이들을 해고해 버렸다. 조선일보 기자들은 해고된 두 기자의 복직을 요구하고, 외부권력의 언론탄압과 언론내부의 패배주의와의 투쟁을 선언하며 75년 3월 6일부터 제작거부농성을 시작했다. 회사 측은 이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추가로 10명을 해고하는 것으로 맞섰고, 나아가 3월 11일에는 강제로 농성을 해산했다.

이렇듯 자유언론실천운동이 권력에 야합한 경영진에 의해 좌절되면서,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 1백34명이, 조선일보에서 33명이 해임 또는 무기정직의 조치를 당해 신문사를 떠나게 됐다. 이들은 3월 18일과 21일에 각각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와 조선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조선투위)를 결성했다. 동아·조선투위는 이후 복직을 요구하면서 ‘제도언론’에 대해 전면적인 비판을 가한다.

동아투위는 2004년 8월 국가정보원측에 대해 ‘동아사태’를 진상규명작업의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면서, 다음의 자료들을 공개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1. 백지광고 사태를 최초로 지시하고 행동에 옮긴 관련자의 명단과 그 이행방법
2. 74년 12월부터 75년 3월에 걸쳐 자행된 130여명의 언론인에 대한 대량해직사태의 진상
3. 동아투위원에 대한 취업방해 사례
4. 동아투위원에 대한 해외출국 방해 사례
5. 동아투위원에 대한 각종 시국사건의 조작 및 투옥사례

3. 신군부의 언론학살

동아 조선 사태이후 10·26까지 4년여 동안 언론은 철저하게 권력에 유린당했다. 10·26이후 선포된 계엄령에 따라 언론은 사전검열을 받게 되고 군부는 유신체제 아래에서 억눌린 민주화 주장이 분출하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언론검열을 이용했다. 당시 계엄사 검열 단은 자의적 판단에 의해 특정 사실의 보도 여부는 물론 기사내용까지 수정 또는 삭제했다. 군부는 공적 언론을 통제하면서 민주화운동 확산을 막기 위해 그와 관련된 정보를 차단, 축소, 왜곡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군정을 연장하려는 술책이었다.

언론계의 젊은 기자들은 79년 12월을 전후해 유신시대 언론을 반성하고 언론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움직임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러나 이런 언론자유운동은 계엄사 검열 단에서 사전 검열을 받아야 하는 현실, 특히 민주화 추진운동을 부정적으로 보도하도록 강제 당하는 상황에서 그 한계가 명백했다. 이 때문에 검열철폐 주장이 제기되어 기자협회는 80년 5월20일을 기해 전국 언론사가 검열을 거부토록 의결했다. 군부는 언론을 비롯한 대학가, 재야 등에서 불어오는 민주화 열풍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5월17일을 기해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와 함께 군정연장을 위한 탄압책을 썼다. 이는 결국 광주항쟁을 유발했고 민간인 대량 살상으로 이어졌다.

언론은 현지에 특파된 기자들로 부터의 송고와 외신보도에 담긴 군의 파괴적 행위에 반발해 5월20일 경부터 전국 언론사가 부분적인 검열거부,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신문, 방송, 통신의 제작은 중단되지 않아 국민들에게 언론인의 군부에 대한 항거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광주항쟁기간 동안 광주 일원을 제외하고 군부에 저항한 세력은 언론계가 유일했고 그 때문에 광주를 점령한 신군부의 언론탄압도 자심했다.

80년 5월 광주에 행해진 신군부의 만행은 2차 대전 종전 이후 그 유례가 없을 만큼 참혹하고 비참했다. 그것은 국제적으로 한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하는 것이었다. 외신에서는 광주 학살을 전하는데 국내에서는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는 것에 전국 대부분 언론사의 기자들은 분노했다. 광주 현지에 파견된 기자들의 송고 내용으로 많은 언론사에서는 광주의 참극을 대부분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자들은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서 군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세금을 내는 민간인을 백주에 총칼로 살육하는 것에 분노했다.

그래서 많은 기자들이 언론검열과 제작 거부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당시 언론검열은 계엄법에 의해 사전에 취해지는 것이어서 기자들의 저항은 신군부를 직접 겨냥한 것이었다. 당시 신군부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12·12 사태 등을 통해 정치적 야심을 달성키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만적인 폭력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서울의 봄’에서 분출된 민주화 열기에 놀란 정치군인들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군부에게 도전한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을 각오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80년 봄, 신군부는 부당한 언론검열 등을 통해 민주세력을 탄압하면서 집권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자협회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5월 20일부터 검열거부를 하기로 결정해 전국 언론사에 통보했다.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은 광주항쟁이 발생하기 며칠 전인 5월 16일이다. 기자협회의 그 같은 노력이 전국적인 언론 저항투쟁의 결정적인 힘이 되었다. 신군부가 광주폭거를 저지른 것도 기자협회의 저항에 크게 당황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당시 신군부는 군부집권 연장을 획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군인들의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고 그런 상황이 점차 악화되면서 기자들은 각 사별로 기자 총회를 열어 향후 대책을 논의했고 5월 20일을 전후해 검열 및 제작 거부 투쟁에 돌입했다.

계엄 확대 조치로 언론사 앞에 장갑차와 무장군인이 진주하는 등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어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듯 긴박한 분위기였다. 기자들은 대부분 편집국이나 보도국에서 철야하면서 투쟁했다. 언론사 간부들은 계엄사의 협박과 경고를 전하면서 신문, 방송, 통신을 제작했다. 당시 언론법이 3일간 언론사의 발행, 방송 업무가 중단되면 회사 문을 닫게 되어 있는 악법이었기 때문에 검열거부 등의 투쟁을 하던 기자들도 언론사 간부들의 언론 제작 행위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언론인들의 신군부에 대한 저항은 광주지역에서의 민중 항거를 제외하고는 전국적으로 유일한 것이었다. 광주에서 엄청난 유혈 참극과 저항이 벌어지는데 기자들이 맨손으로 신군부에게 저항하는 동안 전두환 등의 언론사에 대한 협박 공갈도 대단했다. 계엄 확대 조치로 언론사 앞에 장갑차와 무장군인이 진주하는 등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어 당장 무슨 일이 벌어질듯 긴박한 분위기였다. 기자들은 대부분 편집국이나 보도국에서 철야하면서 투쟁했다. 언론사 간부들은 계엄사의 협박과 경고를 전하면서 신문, 방송, 통신을 제작했다. 당시 언론법이 3일간 언론사의 발행, 방송 업무가 중단되면 회사 문을 닫게 되어 있는 악법이었기 때문에 검열거부 등의 투쟁을 하던 기자들도 언론사 간부들의 언론 제작 행위를 저지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밖에서 보기에 기자들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신군부의 입맛에 맞게 요리되는 모습으로 비춰졌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신문, 방송, 통신의 제작은 중단되지 않아 국민들에게 언론의 군부에 대한 항거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광주 일원을 제외하고 신군부에 저항한 세력은 언론계가 유일했다. 광주 민주시민이 온몸으로 신군부의 폭거에 맞설 때 기자들은 펜을 놓고 광주시민과 뜻을 같이 했다. 그 때문에 광주를 점령한 신군부의 언론탄압도 자심했다.

군부는 ‘광주 학살’ 이후 언론 장악을 시도, 80년 여름 수백 명의 언론인을 강제해직한 뒤 40여개의 언론사를 통폐합조치 했다. 80년 신군부의 ‘언론 학살’은 1997년 4월 17일 전두환, 노태우와 관련한 12·12와 5·18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을 통해 역사적 범죄로 확정되었다. 12·12와 5·18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전두환은 국군 보안사령관으로서, 1980년 허문도 국보위 문교공보분과위원 등이 언론사 강제해직, 언론사 통폐합 등을 내용으로 작성한 ‘언론계의 정화, 정비계획’을 보고 받는다.

전두환은 이어 국보위 문교공보분과위를 통해 ‘언론계 자율정화계획’을 수립케 해 같은 해 7월 이광표 당시 문화공보부 장관에게 전달되도록 했다. 이어 같은 해 7월 30일 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언론자율 정화 및 언론인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발표케 하여 자율정화 형식을 취한다. 그 뒤 이상재 당시 보안사 언론대책반장이 작성한 보도검열 비협조자 등 언론계 해직대상자 336명의 명단을 이광표 장관을 통해 해당 언론사에 통보, 각 언론사에서 해직대상 언론인들의 사직을 종용해 이들을 포함한 933명이 10월까지 소속 언론사로부터 해직되게 했다. 보안사가 주도한 이 같은 언론인 강제해직에 대해 서 아직 구체적으로 그 진상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언론인 강제해직 과정에서 신군부가 작성한 해직 대상보다 각 언론사가 작성해 포함시킨 언론인이 두 배나 많은 것에 대해 4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논란이 빚어진다. 신군부의 정치군인들은 발뺌하거나 책임전가에 급급하고 이들에 동조했던 문화공보부, 언론사 경영진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신군부의 언론 학살 하수인이었던 이상재는 당시 언론사 경영진이 자사 언론인 해직에 앞장섰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신군부가 강제해직의 책임 상당 부분을 언론계 내부로 전가한 것이다. 그러나 저항 언론인 강제해직은 정치군인들과 언론행정부처 관리, 언론계 내의 신군부에 부역한 언론인들의 합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권언 유착이 빚어낸 공동범죄인 것이다. 언론인 강제해직 과정에서 이뤄진 언론계 내부의 동료 배신행위도 규명되어야 할 부분이다. 즉 10·26이후 언론계안팎에서 유신언론인 청산요구가 드셌다. 또 광주항쟁기간 동안 검열 및 제작거부를 놓고 언론사내에서 격렬한 의견대립이 벌어지는 등 언론계 내부의 갈등이 매우 심각했다. 신군부 쪽에 동조하는 언론계 내부의 부역세력에게 검열거부에 앞장선 기자들은 눈 속의 가시였다.

이 같은 언론계 내부의 갈등을 파악하고 있던 신군부가 언론 경영진 쪽에 잘라내야 할 언론인 선정 작업을 권장하고 위임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신군부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언론을 잠재우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정치공작 차원에서 보면, 언론 경영진이 저항언론인 일부를 잘라내도록 함으로써 언론 경영진의 신군부에 대한 충성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다.

80년 5월 광주가 신군부에게 강점된 뒤 검열거부 투쟁도 막을 내리게 된다. 많은 기자들이 피눈물을 흘리면서 투쟁을 접었다. 신군부는 광주 강점이후 제일 먼저 언론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광주항쟁 기간 동안 유일하게 항거한 집단이라는 점에서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보안사는 문화공보부의 합작으로 언론사별로 검열거부, 제작거부에 앞장선 기자들을 가려내는 작업이 진행했다. 수많은 언론인이 거리로 내쫓겼고, 언론사 강제 통폐합이 이뤄지는 ‘언론학살’이 자행된다.

그 과정에서 언론사 사주를 중심으로 한 간부들이 신군부에 협력해 동료 언론인들을 해직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이런 이유가 오늘날까지 해직언론인을 기존 언론사에서 백안시 하는 뿌리 깊은 원인이 되고 있다. 80년 7월부터 전국 언론사에 대한 해직 칼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그해 9월까지 1천여 명에 가까운 기자들이 거리로 쫓겨났다. 신군부는 해직언론인들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어 전국에 배포해 취업을 방해했다. 생존권에 대한 위협이었다. 일부 해직언론인들은 해직이후 충격을 이기지 못해 병들어 사망하기도 했다.

신군부는 언론인 강제해직 작업이 끝난 뒤 3개월여 만에 언론사 죽이기에 나선다. 이번에도 역시 신문협회와 방송협회를 꼭두각시로 앞세운다. 두 협회는 80년 11월 14일 임시총회를 열고 언론사 통폐합을 주 내용으로 하는 ‘건전언론육성과 창달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한다. 이 결의에 따라 전국 64개 언론사(신문 28개사, 방송 29개사, 통신 7개사) 가운데 신문 14개사(중앙지 1개사, 지방지 11개사, 경제지 2개사)와 방송 27개사(중앙과 지방 각 3개사, MBC계열사 21개사), 통신 7개사가 통폐합된다. 이 과정에서 언론인 3백여 명이 해직된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언론사가 통폐합되는 과정에 피해를 당했지만 오늘날 민주화보상법 등 어느 법에 의해서도 구제받지 못하고 있다.

신군부는 언론사 통폐합이 진행되던 80년 11월 언론을 완벽하게 권력의 손아귀에 집어넣을 제도적 장치인 언론기본법을 만든다. 문공부 장관이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 또는 정지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많은 독소조항을 담고 있는 이 법이 12월 31일 공포와 함께 시행됨으로써 언론은 권력의 하부 기구로 편입된다.

80년 해직언론인들은 전두환 군사정권 이래 최근까지 언론민주화, 언론개혁, 해직언론인 명예회복과 등을 위해 노력해왔다. 해직언론인들은 5공화국이후 지난 30여 년간 명예회복, 원상회복을 위해 싸웠는데 그 투쟁과정은 몇 단계로 나눠진다. 먼저, 5공화국 기간 동안 언론운동에 동참해 군사정권의 언론탄압과 언론조작을 폭로하면서 민주화 투쟁을 벌인 것이다. 해직언론인들은 1984년 3월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를 결성했고 이어 민주언론운동협의회 결성에 동참, 『말』지 제작에 참여해 제도언론이 침묵하던 광주의 진실 등과 전두환 정권의 비리를 국민에 알리는데 앞장섰다. 이 같은 언론운동은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의 하나가 되었고 한겨레신문 창간에 다수의 해직언론인들의 동참 등으로 이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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