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3월 17일 미명, 유언론 사수를 외치며 닷새 동안 농성을 벌이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들과 함께 나는 폭도들에게 떠밀려 동아일보사 문을 나섰다. 그리고 등 뒤로 ‘꽝’ 하고 정문 빗장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금세 철제 셔터가 내려졌다. 그것이 내가 그토록 사랑했고 열정을 바쳐 일해 온 동아방송과 나의 영원한 작별의 순간이었다. 이른 봄 새벽 거리는 유난히도 쌀쌀했다.

젊은 바친 동아방송과 영원한 작별

‘10.24 자유언론 실천선언’ 이후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동아방송의 경우 간부들과 일선 프로듀서 사이엔 건너기 어려울 만큼 현격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 간부들은 간부들대로 자기 설 자리를 선택하느라고 더 복잡 미묘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부하 직원들을 설득할 말이 없어 고민하며 자기혐오에 빠지는 간부들도 없지 않았다.

답답해서 하는 말이었겠지만, 더러는 “일제 강점기에 동아일보가 살아남은 과정을 생각해 봐라. 움츠려야할 땐 움츠리고, 기회가 오면 다시 기를 살리고, 그렇게 생존해 온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방송이 어떻게 언론이냐"며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등을 돌리라고 억지소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도 자유언론에 대한 뚜렷한 소신이 있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후배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만은 분명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의와 불의가 맞설 때 정의의 편에 서야 한다는 것만큼은 소신으로 갖고 있었다. 그것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던 선친의 가르침이기도 했다.

나는 초급간부(차장)라는 위치 때문에 많은 갈등을 겪으며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백 번을 생각해도 옳은 건 옳은 것이고, 후배들이 가는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판단에는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젊은 후배들처럼 앞장서서 불의와 싸우지는 못하지만 뒤에서 응원이라도 열심히 하자.’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다짐했다.

12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신문과 방송의 광고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하더니 며칠 사이에 광고란이 백지가 되어 버렸다. 천인공노할 권력의 만행이었다. 젖줄을 끊어 굶겨 죽이겠다니! 그런데 곧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무언의 다중이 떨쳐 일어난 것이다. 백지가 된 광고란을 메워 동아일보를 살려보겠다고 수많은 선량한 시민들이 쌈짓돈을 꺼내들고 몰려왔다.

나는 분명히 내 눈으로 보고 확인했다. 격려광고를 내기 위해 광고국 앞에 줄서 있던 사람들의 형형한 눈빛에서 불의에 항거하는 분노를 읽었다. 격려광고의 대열에 동참한 많은 지성인들의 글에서 진한 동지애를 느꼈다. 종교인들의 동참과 지원에서 두려움을 뿌리치는 담대함을 보았다. 나는 그 민의의 광장 한복판에서,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닥칠지 모르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결단했다.

회사를 쫓겨나온 지 2주도 채 안 되는 3월 29일, 나는 마침내 해임통지서를 받았다. 회사를 쫓겨나오면서도 영원히 동아방송을 떠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막상 해임통보를 받고 보니 ‘이젠 정말 동아방송과 영원한 이별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가슴 속에 통증처럼 밀려오면서 지난 11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경인지역 청취율 50% 넘어선 동아방송

내가 동아방송에 입사한 것은 1964년이었다. DBS(동아방송)가 첫 전파를 쏘아올린 것이 1963년 4월25일이었으니, 내가 입사한 것은 개국 후 1년 남짓 되던 때였다. 그러나 DBS는 다른 방송들을 압도하는 새로운 프로그램들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특히 한국 근대사 80년을 다큐멘타리로 정리한 〈여명 80년〉이나 외국의 유명 음악을 소개하는 최동욱 DJ의 〈탑튠 쇼〉 같은 프로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뉴스도 다른 방송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비록 출력 10kw의 지역방송이었지만, 관영방송인 KBS나 종교방송인 CBS는 물론 본격적인 상업방송으로 지방망까지 갖추고 있던 MBC와 비교해도 발군의 청취율을 보였다. 특히 가청 지역인 경인지역에서의 DBS 청취율은 놀랍게도 50%를 넘어설 정도였다. KBS 같은 기존 방송과는 전혀 다른, 뉴스 보도의 신속성, 다양한 포맷의 변화가 젊은 세대를 열광케 한 것이다.

DBS는 처음부터 새로운 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 모든 프로그램을 프로듀서 개개인의 책임에 맡기고 가능한 한 간섭을 배제함으로써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일할 수 있게 했다. 자연히 우수한 인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박정희 정권은 그러한 DBS를 개국 초부터 예의주시하면서 조금만 비위에 걸리는 일이 있어도 탄압하려 들었다. 박 정권의 탄압은 개국한 지 불과 1년밖에 안 되는 시점부터 시작됐다. 이른바 ‘앵무새 사건’이 첫 번째이자 대표적인 탄압사례로 꼽히는데, 한일회담을 주제로 다룬 5분짜리 시사만평 프로그램 하나 때문에 편성간부 6명이 군법회의에 넘겨진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69년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나기까지 무려 5년 6개월이나 걸렸다.

‘10월 유신’ 이후엔 프로그램에 대한 중앙정보부와 문공부 등의 간섭과 통제가 한층 노골화했다. 정보부원들이 방송국을 제집 드나들 듯하며 뉴스나 논평은 말할 것도 없고 오락프로그램까지 일일이 간섭했다. 금기 출연자 명단을 제시하고 그에 따르도록 강요하는가 하면 심지어 역사풍자극 속의 코미디나 뉴스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군중의 박수소리까지 통제했다.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방송제작 사원들의 울분이 폭발 직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럴 즈음 동아일보 편집국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이 전개됐다. 이 소식을 접한 DBS 프로듀서, 아나운서들도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 결과 방송사원들의 프로그램 제작 태도가 크게 바뀌었다. 그 때까지 금기시되던 취재원을 과감히 찾아 나서는가 하면 문제 현장을 직접 발로 뛰어 하나의 진실이라도 더 전하려고 노력했다.

동아일보에 대한 대량 광고해약 사태에 이어 마침내 동아방송에서도 1975년 1월 7일부터 무더기 광고해약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자 프로듀서와 아나운서는 물론 엔지니어와 업무사원들까지 함께 모여 ‘동아방송자유언론실행총회’를 결성하고, 어떠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투쟁하기로 결의했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후배들의 투쟁에 박수를 보내는 일 말고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차장이라는 직책이 내 행동의 자유를 제한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후배들의 투쟁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그들의 편에 서서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리라 마음속으로 굳게굳게 다짐했다.

결혼 20주년 기념일에 해임당하다

해임통보를 받은 날은 공교롭게도 결혼 2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실직이라니! 앞으로 살아갈 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그렇다고 후배들이나 가족에게 풀죽은 모습을 보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럴 땐 오히려 호기를 부리는 게 더 났다는 생각도 들었다. 후배들이 집으로 몰려왔다. 술상이 차려지고 무슨 잔치라도 벌어진 듯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요란했다. 집사람의 근심은 태산이었겠지만, 나는 실직의 아픔보다 후배들의 동지애가 더 크게 느껴져 모든 근심을 떨쳐낼 수 있었다. 아니 무거웠던 마음이 후련하고 즐거워지기까지 했다.

회사에서 쫓겨난 다음날 우리는 ‘동아자유언론 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매일 아침 동아일보사 앞으로 나가 정문 옆에 도열, 침묵시위를 벌인 뒤 언론회관으로 자리를 옮겨 결의를 다졌다. 그러고는 모두 임시사무실로 쓰는 여관방으로 가서 홍보팀이 만들어 놓은 ‘동아투위소식’을 들고 나와 배포했다.

회사에서 쫓겨난 직후엔 하루 일과가 끝나면 으레 서로 추렴하여 대폿잔을 기울이곤 했는데, 날이 갈수록 주머니가 가벼워져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점심 밥상도 밥에서 자장면으로 내려가고, 담배의 질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종교계 등에선 우리 동아투위 위원들의 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애썼지만 그러한 지원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쫓겨난 지 6개월 만에 우리는 출근투쟁을 중단하고 각자 일자리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공황증이 올 법도 한데 모두가 함께해서인지 마음은 덤덤했다.

나는 동아방송에 입사하기 직전 춘천교육대학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학교 선생이 아니면 방송 프로듀서밖에 없는데, 그 두 직종의 취업은 불가능한 상태였다. 박 정권의 취업방해 공작이 워낙 지독한 데다 내 경우는 나이도 40대 중반이나되었으니 그런 분야의 취업은 엄두도 낼 수 없는 형편이었다.

무엇보다 큰 고민은 초·중·고에 다니는 네 아이의 교육문제였다. 당장 무슨 일이든 하지 않으면 아이들 교육을 중단시킬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었다.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당시 제강회사에 다니던 동생이었다. 동생은 나에게 “자본이 없으니 당장 대리점을 딸 수는 없겠지만 내가 재직하고 있으니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것”이라며 배관 가게를 내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자신도 합류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길게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다. 점포를 물색하고 적당한 날을 잡아 개업을 했다. 그러나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가 생소하여 겁이 났다. 배관부품 가짓수만 해도 수백 수천이라 하니 도무지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온 몸을 던져 최선을 다했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신용을 최우선으로 삼고, 허풍 떨지 않고 정당한 값을 받도록 노력했다.

1년이 지나자 두려움이 다소 줄어들었다. 외상거래 길도 터졌다. 그런데 문제는 늘 어음결제 때문에 발생했다. 특히 개인사업자와의 거래가 문제였다. 나는 교과서적으로 영업을 하려고 하는데 상대방은 그것을 역이용하려 하곤 했다. 결제를 질질 끄는 바람에 자금회전이 안되고, 그래서 급전을 빌려대야 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 역할은 언제나 집사람이 맡았다.

서른네 살 조민기 동지의 죽음

해가 바뀌어 1977년이 되었다. 믿고 싶지 않은 비보가 날아왔다. 신장병으로 투병 중이던 조민기 동지가 서른넷 새파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회사에서 쫓겨난 뒤 아내와 함께 새벽시장에 나가 옷가지를 떼다 팔며 살아온 그였다. 박 정권이 한사코 취업을 방해하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그런 일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우리에게 아픈 상처를 남기고 그는 갔다. 우리는 오열했다. 나는 그렇게 비통하고 엄숙한 장례를 본 적도, 그토록 아픈 울음을 울어본 적도 없었다.

민기는 세상을 뜨기 얼마 전 나에게 “윤 차장님, 한국의 방송문화를 하루 속히 정립해야 합니다. 외국 방송이나 베껴대는 한국 방송의 현실이 부끄럽습니다. 그러려면 우리가 빨리 방송 현장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그게 까마득한 일 같아서 가슴이 탑니다” 하며 정말 간절한 소망을 털어놨다. 그는 그 소원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한을 남긴 채 세상을 뜨고 말았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1월 25일 ‘민주회복 세력 거의 조문-동아투위 굳게 뭉쳐 있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었다.

“한국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한 장례가 올려졌다. 조민기 전 동아방송 프로듀서. 1974년 한국을 뒤흔든 자유언론투쟁에 참가함으로써 해고되어 어려운 실업생활 가운데 신장을 앓다 19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4세. 조 씨와 함께 직장을 쫓겨난 134명 가운데 114명이 지금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에 뭉쳐 있다. 그러나 권력의 감시 밑에 재취업의 길은 좁고, 지독한 겨울 속에 살고 있다. 우선 그들에게 언론계가 문을 걸어 닫았다. 공개시험을 치거나 개인적 연줄로 어떻게 잘 되어갈 듯하다가도 결국 상층부의 최종심사에서 하나같이 밀려나곤 한다. 사립대학 시간강사도 거의 해고되었다. 그나마 겨우 고정적인 취직자리를 얻은 사람은 반수 이하. 나머지는 취직-실업을 되풀이하는 ‘상습적 실업자’. ‘사장 아들의 아버지’라고 고소(苦笑)하는 멤버도 많다. 부인이 조그만 가게를 내서 겨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일자리가 없는 동지끼리 모여 번역도 하고 있다. 반(反) 나치 활동으로 알려진 본회퍼 목사에 관한 책도 최근 출판되었다. 부자유스러운 건 비단 취직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이민은 희망해도 여권이 나오지 않는다. 전 여자 아나운서의 경우 재미 한국인과 결혼했으나 여권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별 수 없이 별거를 하고 있다. 21일 서울에서는 한국의 민주회복세력 거의가 조문을 하러 모여들었다. 민주구국선언사건의 피고로 최근 출옥한 이해동 목사가 사회를 맡았고, 영전에는 옥중에 있는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의 조화도 놓여 있었다. 서로 몸을 맞대고 모여앉아 자유를 간절히 기구하는 영안실 밖에는 살을 에는 겨울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내 장사는 2년이 지나면서 자금 사정도 조금 나아지고 자신감도 생겼다. 그런데 그 자신감이 문제였다. 하루는 정장을 한 낯선 사람이 점포로 들어섰다. 병원을 새로 짓고 있는데 배관공사 견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현장답사도 하고 모든 절차를 순조롭게 밟았다. 낙찰이었다. 자재며 노무관리 일체를 우리가 주관하여 직접 해보고 싶었다. 처음으로 시도해보는 일이라 설레기도 했다. 내가 제일 신임하는 배관기사에게 인부 인선을 맡기고 공사에 착수했다. 그런데 마무리 단계에서 사단이 터지고 말았다. 현장감독이 노임을 가로채고 차일피일 미루는 바람에 작업이 지연되고, 그 때문에 수업료를 톡톡히 치렀다.

사업을 시작한 지 3년쯤 지나서야 조금씩 기반이 다져지는 것 같았다. 대충 재고조사를 해보니 밥은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무언가 이루어냈다는 자부심, 가장으로서 어느 정도 책무를 할 수 있게 됐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이 뿌듯해졌다.

46세에 겪은 첫 옥살이

동아투위는 1978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을 맞아 명동 한일관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그 날 배포된 ‘동아투위소식’엔 평소와 달리 지난 1년 동안 제도언론이 철저히 외면하고 보도하지 않은 민주·인권 관련사건 120여건이 특집 형태로 실려 있었다.

기념식이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던 홍종민 총무가 종로경찰서에 연행되고, 뒤이어 안종필 위원장과 안성열·장윤환·박종만·김종철·정연주 위원 등이 연행되어 모두 7명이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동아투위는 나를 위원장 대리로 선출했다.

그 해 연말, 동아투위는 가족과 민주인사 등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송년모임에서 구속된 7명의 동지를 하루 속히 석방하라고 촉구하는 성명서를 채택하고 동지들의 근황 등을 소개한 ‘동아투위소식 송년 특집호’를 배포했다. 그러자 경찰은 이를 문제삼아 나와 이기중, 성유보 3명을 긴급조치 위반혐의로 추가로 구속했다. 동아투위 동지 10명이 한꺼번에 영어의 몸이 된 것이다.

1979년 1월은 유난히 추웠다. 특히 연행되어 조사를 받으며 갇혀 있던 중부서의 일주일은 잊을 수가 없다. 하늘은 내게 무슨 큰일을 맡기시려고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 벌여 놓은 사업이나 가족을 생각하면 심난하고 답답했다. 그런 내 마음을 다잡아준 것은 돌아가신 선친의 삶이 보여준 교훈이었다. 내 선친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우다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르셨다. 또 해방 후에는 민족의 분단을 막아보려고 공산정권이 들어선 북한 땅에서 거사하여 싸우시다가 체포되어 희생되셨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결단한 일에 온 몸을 던지신 나의 아버지. 그분은 내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나의 결단이 요구될 때 늘 나를 인도하는 별이 되어 주셨다.

1월 15일 서대문구치소로 이감돼 독방에 갇히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놓이고 편해졌다. 차가운 마룻바닥이지만 춥지도 않고 아늑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첫 밤을 보내고 날이 밝자마자 먼저 구속된 홍종민 씨가 나를 찾아왔다. 감옥 안에서 동지를 만나니 눈물이 나게 반가웠다. 그는 감옥 안 생활에 필요한 이러저런 오리엔테이션을 해주고 돌아갔다.

감옥 안에선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제약을 받으니 나처럼 굼뜨고 요령 없는 50대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사람은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일까? 차츰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기도 하고, 약간의 청각장애가 있어 잘 들리지는 않지만 민주화운동을 하다 구속된 젊은 학생들과 통방을 하게도 되었다. 바깥의 가족이 걱정이지 나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아버지가 없어도 성대한 딸의 결혼식

구속된 지 두 달쯤 되던 1979년 2월 24일. 그 날은 딸아이가 시집가는 날이었다. 기상하자마자 홍종민 씨가 찾아와 “선배님 축하합니다. 술 한 잔 하셔야지요” 하며 감방에서 미리 발효시켜 만들었다는 사과술을 우유팩에 담아 건넸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엔 평소부터 여러 모로 우리를 보살펴 주던 J교도관이 찾아와 “윤 선생님, 오늘 하객이 800명입니다. 제가 직접 다녀왔습니다. 민주인사들이 많이 참석한 아주 성대한 결혼식이었으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 하고 소식을 전해주었다.

‘공동체의 힘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하객 여러분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당신 참 수고가 많았소.’ 나는 가슴속이 멍멍해지며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간신히 울음을 삼키고 있는데 J씨가 담배에 불을 붙여 건넸다.(교도소 안에선 담배를 피울 수 없게 돼 있으니 이건 분명히 특별한 배려였다)

3.1절 날이었다. 감옥 안에서 민주인사들이 통방으로 기념식을 가졌다. 동아투위 성유보 동지의 기념사에 이은 만세삼창,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른바 ‘반체제 인사들’이 넘쳐나면서 구치소 안은 수감자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와 이를 강제 진압하려는 당국의 입장이 맞서 매우 소란스러워졌다. “식사 질을 개선하라” “도서검열을 폐지하라”는 구호가 터져 나오고, 구치소 측의 강제진압이 자행되고, 끌려가 깨지고, ‘감옥 속 감옥’이라 불리는 독방에 처박혀 곱빼기 옥살이를 하고…. 견디다 못한 소장이 박형규 목사와 동아투위 안종필 위원장에게 사태 수습을 간청했다. 그렇게 구치소 측도 동아투위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 같았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탄을 맞아 목숨을 잃은 뒤 13일만인 1979년 11월 8일, 나는 동아투위 동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감옥에서 풀려난 뒤 밥줄인 파이프 가게 사정을 살펴보니 그 동안 자본금이 많이 축나 있었다. 무엇이 가장 큰 문제인지 점검해 보았다. 조금 기반이 잡힌다 싶으니 자만한 나머지 가게 규모를 확장한 것이 첫째 화근이었다. 새로 시작하는 자세로 되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 해도 이미 사업에 합류한 동생과 나,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빠져야 했다. 온 몸을 던져 그나마 기초라도 다져놓았는데 빚까지 안고 손을 떼야 하다니! 앞길이 막막하고 분통이 터졌다.

유신독재체제가 종식되면서 부풀어 올랐던 민주화의 꿈은 신군부의 등장으로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80년 그 짧았던 ‘서울의 봄’ 동안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제적됐던 학생들이 복학되고 해직교수들이 복직되었지만 해직언론인들의 복직문제는 전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신군부가 아주 잠시 동안 유화국면을 보이자 기회주의 생리를 버리지 못한 동아일보사가 여러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화해 제스처를 보내는 듯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교활한 제스처일 뿐이었다.

의리의 사나이들 김기팔, 이완호, 김종성

그런 어느 날 옛 동지들이 찾아왔다. 우리가 동아방송에서 쫓겨나올 때 우리와 뜻을 같이하고 붓을 꺾었던 〈정계야화〉의 작가 김기팔 씨와 방송제작 거부에 자진 참여하고 동아를 떠난 성우 이완호·김종성씨 세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니 참으로 반가웠다. 자리를 옮겨, 한 순배 돌았을 때 김기팔이 말문을 열었다. “형님, 죄송합니다. 형님한테는 꼭 말씀드리고 승낙을 받아야할 것 같아서…. 다시 작품을 쓸까 합니다.”

긴급조치가 해제되고 신군부가 잠시나마 유화책을 쓰는 듯하니까 KBS와 MBC가 각각 방송작가 모시기에 팔을 걷고 나섰던 모양이다. 그러니 김기팔 같은 작가를 그대로 놔둘 리가 없었다. 김기팔이 어떤 사람인가? 역사의식이 투철하고, 다큐멘터리 극작법을 개척한, 대한민국 제일의 방송작가가 아닌가. 그는 시류에 휩쓸려 정권의 프로파간다에나 동원될 그런 작가가 결코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이른바 ‘동아사태’ 이후 붓을 꺾은 채 어머니의 단추 장사를 도우며 살아왔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또 이완호 씨와 김종성 씨는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지금도 국민성우로 대접받으며 현업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탁월한 실력이 있는 그들이 우리가 동아방송을 떠난 뒤 방송계를 떠나 한 사람은 빈대떡 장사, 또 한 사람은 복덕방 거간 노릇을 하며 여러 해 동안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들이 현업에 복귀하기 전 나를 찾아와 상의해준 것이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뒷이야기이지만, 작가 김기팔은 50세를 갓 넘긴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다. 노태우 정권 때 땅 투기에 혈안이던 권력과 재벌들의 광란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100회 기획의 TV 드라마 〈땅〉을 쓰다가 권력의 온갖 압력 때문에 중도 하차한 뒤 갑작스럽게 별세한 것이다.

1980년, 동아투위는 신군부의 속셈이 군사정권 재창출에 있다는 것을 일찍이 간파하고 있으면서도 머지않은 장래에 새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동아투위는 5월 17일 수유리 ‘명상의 집’에서 ‘새 시대 새 언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오후 늦게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김대중 씨를 비롯한 많은 민주인사들이 연행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는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새벽 일찍 해산하기로 했다. 그리고 감옥을 다녀온 사람들은 당분간 피신하는 게 좋겠다고 의논이 되었다.

나는 김학천 위원 동서네 집으로 숨어들었다. 저녁 무렵 집에서 전갈이 왔다. 수사관 둘이 찾아와 이병주 위원장과 동행한 것을 알고 왔으니 어디 있는지 대라고 을러대면서 권총을 풀어놓고 눌러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그들은 집사람을 앞세우고 친척 집들까지 샅샅이 뒤지고 돌아다녔다. 치가 떨렸다. 어릴 때 일제 치하에서 겪었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불시에 벌컥 문이 열리고, 형사들이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들어와 장롱이며 다락방이며 마구 들쑤시고 다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럴 때면 나는 무서워서 벌벌 떨곤 했다. 나는 한 달 넘게 이리저리 피신해 다니다 체포 선풍이 수그러든 7월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알로에 가게를 차리다

파이프 장사에서 손을 뗀 뒤 아무 벌이 없이 1년이 지났다. 하루하루가 막막했다. 집사람의 신용으로 이리저리 생활비를 변통하며 버텨나갔으나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고 가장의 체통도 서지가 않았다. 빚이 800만원이나 쌓였다. 그럴 즈음 후배 송관율 위원이 꽤 그럴듯한 제안을 했다. 알로에라는 신비의 약초를 재배하는 화훼농이 있는데, 동업으로 알로에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다. 게다가 따로 투자도 필요 없고 다만 방송 홍보만 책임져 주면 지분을 나눠주는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방송을 통해 알로에가 널리 알려지면 승산이 있다고 했다.

알로에 동업을 제의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김정문 씨였다. 그는 당시 알로에 농장 2천평 정도를 확보해 놓고 일본 공략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 일본 등의 알로에 연구현황과 알로에의 효능에 대한 확신에 찬 설명을 듣고 나니 믿음이 갔다.

도깨비에 홀린 셈치고 몸을 던지기로 작정했다. 광화문 덕수초등학교 근처에 점포를 냈다. 나는 점포에서 판매를 하고 송관율은 KBS, MBC, CBS 등 방송가를 부지런히 뛰어다니며 홍보활동을 벌였다. 다행이 여러 지인들의 도움으로 방송을 통해 알로에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2주쯤 지나고 나니 방송의 홍보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리 점포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줄을 섰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니 김정문 알로에 농장의 재고가 바닥났다. 김정문 씨가 급히 일본으로 날아가 알로에를 수입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김정문 씨는 자금을 끌어들여 주식회사로 간판을 바꾸고 알로에 재배농장도 8천평으로 확대하면서 한 단계 도약을 준비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나는 여섯 달 만에 빚 8백만원을 모두 갚아버렸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미국에서 ‘알로에 겔(주스)’이 수입되면서 잘 나가던 알로에 사업이 치명타를 맞게 된 것이다. 그들은 ‘만병통치약 알로에 겔’ ‘마시는 알로에’라는 문구를 캐치프레이즈로 내세워 광고전단을 뿌렸다. ‘마시는 알로에’라니 얼마나 편리한가. 게다가 미국산이라지 않는가. 우리가 파는 생초 알로에는 하루가 다르게 소비자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그런데도 김정문 씨는 초지일관 생초만을 고집했다.

그 후 수입 ‘알로에 겔’은 ‘만병통치’라는 과대선전을 일삼다 보건당국의 철퇴를 맞아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자취를 감췄다. 그 사이 생초 알로에는 간신히 살아남기는 했지만, 이미 회사는 만신창이가 되어 굴러갈 힘을 상실했다. 나는 다시 1,300만원이나 되는 큰 빚을 지고 가난뱅이 신세로 돌아갔다.

두 번이나 사업에 실패를 하고 나니 맥이 풀렸다.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점포 간판을 바꿔달았다. 이번에는 ‘암스텔담’이라는 이름의 꽃가게였다. 꽃가게로 간판을 바꿔달게 된 데는 동아투위 후배 성유보 위원의 적극적인 권유가 크게 작용했다. 동아투위 동료들 중에도 큰 기업체에 취직한 사람들이 여럿 있으니 개점휴업은 면할 수 있을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거래처를 늘려나가는 건 차후문제라며 결단을 독려했다. 그러나 그 일 역시 생각과는 달랐다. 가게는 무료할 정도로 조용했다. 무엇보다 1,300만원의 빚이 문제였다. 이자가 불어나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살던 집을 팔아 빚을 청산했다. 집을 팔고 빚에서 벗어나니 날아갈 것 같았다.

또 한해가 지난 1984년 5월, 집사람에게 직장이 생겼다. 미국여선교회가 베트남 난민을 도우려고 설립한 ‘현희 공예원’이라는 데였다. 대단한 벌이는 아니었지만 집사람 얼굴에 생기가 도는 것 같아 기뻤다.

그 무렵 동아투위를 비롯한 해직언론인들을 중심으로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결성됐는데, 나는 여기에 실행위원으로 참여했다. 민언협은 월간지 〈말〉을 발행, 유신정권보다도 더 악랄한 5공 정권의 언론탄압에 맞서 언론기본법 폐지 등을 주장하며 진실 보도를 위해 분투했다. 월간 〈말〉은 모든 제도언론이 권력의 눈치를 보며 숨죽이고 있는 상황에서 나름대로 대안언론으로서 충실히 역할을 해나갔다. 그러니 자연히 탄압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걸핏하면 잡혀가고, 압수당하고, 처음부터 곡예의 연속이었다.

나는 새로운 저항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적극 참여했다. 하고 있는 일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직장에 매여 있는 동료들을 대신해 자리를 메우는 일 또한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는 되지 못하지만, 어떤 일이 옳은지 그른지는 판단할 수 있고,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력이나마 보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옳다는 판단이 서면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했다.

연일 민주화를 외치는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가열되던 1987년 6월 초, 꽃가게 ‘암스텔담’에 웬 낯선 사람 둘이 찾아왔다. 당시 내가 살고 있던 안산의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이었다. 왜 찾아왔느냐고 물어보니 그냥 인사차 들렀다고 했다. 그리고 저녁에 귀가하니 그 사람들이 집밖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내가 뭐 그리 중요한 인사도 아닌데 두 사람씩이나 따라붙어 감시를 하나 했더니, 알고 보니 당시 안산에는 나 같은 이른바 ‘요시찰’이 거의 없었는데 내가 이사를 가게 되자 철저하게 감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아침 내가 출근하러 나서는데 그들이 또 따라붙었다. 서울까지 모시겠다고 했다. 나를 시위에 나가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 나이에 무슨 시위에 참가하겠소? 게다가 나는 장사꾼인데 그런 일을 하겠소?” 하며 걱정 말고 가라고 했지만 그들은 한사코 나를 자기들 승용차에 태워 가게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대대적인 시위가 예정돼 있던 6월 10일엔 하루만이라도 서울에 가지 말아달라고 거의 애걸하다시피 했다. 참으로 그들도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운동본부가 주도한 6·26 국민평화대행진이 있던 날이었다. 김인한, 최장학, 최학래 세 동지가 내 가게 ‘암스텔담’으로 찾아왔다. 가게 문을 닫고 우리 네 사람은 시청 앞으로 나갔다. 교통이 차단되고, 경적이 울리고, 최루탄이 터지고…,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 한 여인이 이마에서 흐르는 피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때 군중 속에 발이 묶인 동아일보사 차 한 대가 보였다. 차 안에는 전 편집국장 권 아무개 씨가 타고 있었다. 최학래 씨가 달려가 급박한 상황을 말하고 병원으로 실어다 달라고 부탁했으나 그는 외면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가 그 여인을 가까운 한일병원으로 부축해 옮겨줬다.

1987년 봄부터 초여름까지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민주의 함성은 마침내 군사정권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냈다. 6·29 특별선언이 있던 날 나는 한없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6월 항쟁의 승리는 우리가 그토록 희망하던 ‘새 신문 창간’의 길을 열어 주었다. 1987년 9월 1일 한겨레 창간사무국이 문을 열고 창간작업에 시동을 걸었다. 나는 꽃가게와 한겨레 사이에서 한동안 갈등을 했다. 동아방송에서 쫓겨난 후 13년 동안 파이프 장사, 알로에 점포, 꽃가게 등으로 사업을 바꿔가면서 그 때마다 가능성만 확인하고 거듭 좌절을 맛본 터에, 후배 동지들이 자유언론의 기치를 높이 들고 ‘새 언론’을 시작한다는데 미력이나마 힘을 보태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전문 직종인 방송이 아닌 신문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선뜻 한겨레 행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겨레 창간의 감격

나는 고민 끝에 결국 한겨레 행을 선택했다. 어려운 때 후배 동지들의 뒷바라지라도 열심히 해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한겨레에서 맡은 일은 주식공모, 주권을 파는 일이었다. 주식공모는 아주 순조롭게 진행됐다. 자유언론을 실천할 수 있는 진정한 ‘새 언론’을 고대하는 민주시민이 그렇게 많다는 데 놀랐고, 동아투위를 비롯한 해직언론인들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다는 데 감격했다. 1988년 2월 목표액 50억원이 거뜬히 달성됐다. 그런데 50억원으로는 아무래도 불안했다. 100억을 더 공모하기로 했다.

5월15일 마침내 한겨레신문 창간호가 나왔다. 우리는 모두 얼싸안고 환호했다.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을 흘리는 이도 있었다.

1994년 3월 나는 한겨레를 떠났다.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일자리이자 내 모든 열정을 바쳤던 신문사를 떠난다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나마 내가 열심히 지원했던 〈한겨레 21〉의 창간기념 리셉션까지 보고 떠나게 되어 위안이 되었다.

내 나이 이제 여든 살,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보면 어떻게 그 험난한 길을 어떻게 헤쳐 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이다. 그동안 온갖 고생을 다 시킨 아내와 아이들에겐 죄를 지은 듯하여 면목이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또다시 내 앞에 1975년과 같은 상황이 전개된다 하더라도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만큼 나는 내 자신에게, 내 선친에게, 역사 앞에 떳떳한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나는 언제 이 세상을 떠나도 큰 여한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무슨 큰돈이라도 만져보려고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지 않으면 또 그런 잘못이 되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국가가 저지른 과거의 모든 잘못은 반드시 바로잡혀야 한다.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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