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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5월 언론투쟁기록[19] 1980년 5월 나는 계엄사합수부에서 ‘빨갱이 기자’가 되었다- 부산일보사 (1) 〈이수언 부산일보 기자, 80년 기자협회 부회장〉
  • 관리자
  • 승인 2016.11.08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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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사에서는 1980년 8월 1일 전 사원이 ‘일신상의 이유로 사표를 제출한다’는 내용의 사직서를 일괄 제출한 뒤 13일 1차로 16명이 해직됐으며, 2차로 지방주재기자 5명 등 모두 22명이 해직됐다.
기자들은 편집부를 중심으로 교열부가 가세해 7월에 15일간 봉급수령을 거부하며 제작거부와 함께 봉급인상 투쟁을 벌여 회사 쪽과 대립을 보였다. 이때 젊은 기자들의 신망을 받던 편집부 김형석 차장이 ‘배후 조종자’란 이유로 이유 없이 해직자 명단에 포함된다. 당시 논설위원이던 김수성 씨는 4·19를 맞아 쓴 사설이 문제가 돼, 박주석 논설주간이 휴직을 당한 것 등이 뒤늦게 빌미가 돼 해직 때 박주석 주간과 함께 회사를 떠나야 했다. 또한 당시 서울지사 정치부 기자였던 이수언 기자는 기자협회 부회장 활동과 관련하여 해직됐다.
해직기자들은 당시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세력이 반대쪽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숙정’을 악용한 측면이 짙다며 뚜렷한 기준도 없이 회사 쪽에서 명단을 작성해 올렸다고 주장한다.

2014년 6월 어느 날 햇볕이 따가운 오후 나는 서울지하철 1호선 남영역 승강장에서 담 너머 검은 벽돌로 지은 창문이 좁은 5층 건물을 바라보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34년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1980년 5월 17일 자정이 막 지난 18일 밤 12시30분쯤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자다 일어난 아내가 전화를 받으니 “이 선생님 계십니까?”라고 물어 잔다고 하자 전화가 끊어졌다. 뒤이어 초인종이 울리고 대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며 “전보요”하는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동네 개가 요란하게 짖어댔다. 놀란 아내가 대문을 열자 4명의 괴한들이 들이닥쳤다.
17일 오후 치과에서 앓던 사랑니를 뽑은 나는 퇴근 후 광화문 부근 술집에서 몇몇 후배들과 20일 0시부터 결행하기로 한 검열거부 후속 대책에 대한 의견을 나눈 후 11시쯤 수유리 집으로 와서 진통제를 먹고 막 잠이 들려 하는데 대학선배 국회의원의 전화가 걸려왔다. 계엄군이 오늘밤 계엄확대 조치를 하면서 동교동과 기자협회를 덮치려하니 피신하라는 거였다. 도망갈까 생각해보니 집 뒷산인 북한산 아니고는 갈 데도 없었다. 날이 밝은 후 결정하기로 하고 잠을 청하고 있는데 놈들이 쳐들어온 것이었다.

마루에서 “이 선생 좀 봅시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에서 나와 신분을 묻자 그들 중 한 놈이 신분증을 얼핏 보이고는 “다 알면서 뭘 그래. 계엄사 합수부야.”라고 했다. 반말이었다. 놈들은 사복차림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그 중 한 놈이 사진을 꺼내더니 손전등으로 얼굴을 비추었다. 사진은 기자협회 부회장이 된 후 사무처에 제출한 것이었다. 다른 한 놈이 출근할 때 입었던 옷을 입으라고 했다. 나는 안방으로 들어가 점퍼를 입어면서 안주머니에 있던 수첩을 서랍장 뒤로 던졌다. 수첩에 적힌 지인들이 나 때문에 피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아내에게 놈들은 “잠깐 밖에서 물어보고 들어오실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등을 밀었다. 문 밖으로 나가자말자 팔을 뒤로 젖혀 수갑을 채우고는 군홧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주저앉자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입에서 피가 나왔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나는 어제 사랑니를 뽑았다고 했다. 입을 벌리게 한 후 한 놈이 손전등으로 확인했다. 주춤하는 것 같았다. 끌려가면서 보니 10여 명의 사복들이 집주변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도망치면 잡으려고 집을 포위했던 경찰들인 것 같았다.

집에서 조금 떨어진 큰길에 검은색 승용차가 시동을 건 채 대기하고 있었다. 뒷좌석 중간에 앉히고는 검은색 안대로 눈을 가린 후 머리를 아래로 처박으며 “이 새끼 너 이빨 때문에 덕본 줄 알아” 했다. 그러면서 수첩을 가져왔느냐고 물었다. 잊어버렸다고 하자 “이 새끼 지능범이야, 누구한테 거짓말을 하려고 해” 하면서 수갑 찬 팔을 비틀었다. 수첩을 서랍장 뒤로 던졌으니 들어내지 않으면 찾을 수 없을 거라고 잔머리를 돌린 게 어리석었다. 한 놈이 집으로 다시 들어가더니 수첩을 갖고 나왔다. 수첩은 재수 없게 서랍장 뒤로 넘어가지 않고 위에 걸쳐 있었던 것이다. “이 새끼야 우리가 간첩을 잡는 베테랑인데 이까짓 수첩하나 못 찾을 줄 알아?”라면서 다시 머리를 바닥에 처박으며 팔꿈치로 등을 내리찍었다.

4명 중 두 놈은 가택수색을 하느라 차가 떠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수첩보다도 장롱 위에 숨겨둔 김제규의 법정진술과 그를 미화한 글들을 모아 역은 책이 우려스러웠지만 찾지 못 할 리 없었다. 가택수색을 마친 놈들이 돌아오자 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눈을 가린데다 머리까지 처박혀 있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얼마쯤 달렸을까 한 놈이 “성균관대로 탱크가 들어간다”는 얘기가 들려 명륜동을 지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서빙고동 보안사로 가려면 종암동 고려대쪽으로 가야할 텐데 보안사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차가 멈추었다. 나를 끌어내린 놈들은 엘리베이터를 태웠다. 지하로 내려갈 줄 알았는데 위로 올라갔다. 철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안으로 밀어 넣고는 안대를 풀어주었다. 일순 나는 아찔해졌다. 형광등의 강렬한 불빛에 눈이 부셨지만 나를 더 현기증 나게 한 것은 좁은 방의 벽이 온통 핏빛이어서 소름이 끼쳤다. 서너 평 남짓한 방구석에 역시 붉은 색 타일을 붙인 낮은 벽 뒤쪽에 욕조와 함께 변기가 보였고, 일인용 침대가 벽 쪽에 붙어있었다. 철제책상과 두 개의 의자는 모두 다리가 바닥에 고정돼 있었다.

어리둥절해 있는데 한 놈이 군대식으로 정강이를 걷어차며 “여기서 거짓말하면 병신 되든지 행불(행방불명)로 처치되니 알아서 해.”라며 무릎을 꿇리고 군홧발로 밟았다. 두 놈이 번갈아가며 조지고 있는데 험상궂은 시커먼 얼굴에 머리를 짧게 깎은 건장한 체격의 또 한 놈이 몽둥이를 들고 들어오더니 다짜고짜로 “이 새끼가 주동이야, 기자 좋아하네. 빨갱이 새끼들이지. 너 김일성이와 김대중한테 돈 받고, 지령 받아 검열거부 선동했지? 이 새끼야.”라며 몽둥이로 허벅지를 내리치고는 사정없이 주먹과 발길질을 했다. 눈을 감고 버티고 있는데 한 놈이 “이 새끼 어제 어금니를 뽑았대”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먹질이 멈추어졌다. 그러더니 “어디 봐”하면서 억센 손으로 입을 벌려 들여다보면서 “이 새끼 재수 좋네.”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저희들끼리 ‘이 소령’이라고 부르는 그 놈이 다른 방으로 끌고 갔다. 어두컴컴한 방 벽에 몽둥이, 주전자, 물통이 있었고 이상하게 생긴 전기기구 같은 것도 보였다. 놈은 비닐장판을 덧씌워놓은 침대에 눕히고는 침대에 달린 끈으로 몸을 묶은 후 얼굴에 수건을 덮더니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코로 물이 들어오자 이빨 뺀 자리가 아려왔다. 놈들끼리 뭔가 수군대더니 물 붓기를 그쳤다. 그 자는 “앞으로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여기서 병신 되니 알아서 해.” 라며 묶었던 끄나풀을 풀어주었지만 정신이 어찔했다.

다시 방으로 끌고 온 놈들은 수갑을 풀고는 팔을 비틀고 군홧발로 정강이를 걷어차면서 “지금부터 거짓진술을 하면 아까 ‘칠성판’(놈들이 말하는 고문용 침대)에서 다시 매운맛 좀 보여줄 테니 알아서 해. 이 새끼야.”라며 다리를 고정시킨 철제의자에 끌어다 앉히고는 뭔가 적힌 종이를 책상 위에 내놓았다. 거기에는 1.김대중과의 관계 2.김홍일과의 관계 3.한화갑과의 관계 4.김옥두과의 관계 5.기자협회 참여과정 등 5개 항목이 적혀 있었다. 그때야 나는 신군부의 기자협회에 대한 시나리오가 무엇인지 눈치 챘다. 기자협회 회장단에서 나만 정치부 기자이기 때문에 나에 대한 수사는 기자협회와 김대중과의 관계에 맞추어져 있음을 알았다. 나는 71년 대통령선거 때부터 김대중 후보 유세를 수행 취재했고, 그 후에도 줄곧 야당과 재야를 담당해 왔기 때문에 동교동 측근들도 잘 아는 사이였다.

신군부의 시나리오는 광주 출신 김태홍 회장과 야당 출입기자였던 내가 김대중의 사주와 자금을 지원받아 기자협회장 선거에 출마하고 검열거부를 주도했다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김대중을 본 것은 3·1절을 기해 연금이 해제된 후 동교동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뿐이었는데 돈을 받은 사실을 자백하라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정치부 기자를 하면서 취재한 김대중에 대한 기억을 모두를 끄집어내 진술서를 작성했지만 놈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김대중이나 김홍일이나 한화갑이나 김옥두에게 돈을 받았다는 것만 고백하면 쉽게 끝날 텐데 왜 피곤하게 하느냐.”고 윽박질렀다. 김태홍 회장에게 물어보라고 하자 “그 새끼 이북으로 도망쳤다.”고 해서 김 회장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5개 항에 대한 진술서는 잠을 재우지 않은 채 같은 내용을 계속 반복해서 쓰도록 했는데 기억이 헷갈려 시간과 장소가 조금만 틀려도 머리를 바닥에 처박는 군대식 ‘원산폭격’을 시키면서 다리를 걷어찼다. 방안의 욕조에 물을 담아서는 머리를 처박기도 했다. 샤워기도 달려 있지 않은 욕조는 고문용이었다. 어쩌다 꾸벅 졸기라도 하면 뒤통수를 잡고 그대로 책상에 처박았다. 두 놈은 침대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감시했고, 나는 놈들이 제시한 5개항에 대해 반복해서 같은 내용을 쓰고 또 쓰도록 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놈들도 벽이 붉은 방에서 취조하는 게 피곤했던지 다른 방으로 옮겼다. 형광등 불빛에 비치는 붉은 색깔 때문에 더 어지러웠는데 산만함이 다소 가라앉는 듯했다.

김태홍 회장 체포에 혈안이 되어 있던 놈들은 수사과정에서 김 회장이 17일 밤 수유리로 갔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수유리에 살고 있는 나에게 집중적으로 행적을 캐물었다. 수유리와 우이동에는 김 회장과 친한 서울문리대 출신 후배들과 고려대 출신 내 친구가 몇 명 있었다. 김 회장과 나는 자주 이들과 어울렸지만 놈들은 내가 고대를 나왔기 때문에 서울대 후배들은 모르는 줄 알고 다행히 추궁하지 않았다. 집히는 데가 있었지만 시치미를 뗐다(뒷날 내 친구에게 들었는데 17일 밤 김 회장은 수유리 우리 집 근처의 친구네에서 자고는 다른 곳으로 피신했는데 체포된 후 내 친구도 잡혀가 고역을 치렀다).

문제는 다른 데서 불거졌다. 가택수색을 하면서 압수한 김재규 사건을 의거로 본 재야법조인들의 유인물과 판금서적인 〈해방신학〉(구티에레즈 저)과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에 밑줄 친 내용과 집에서 찾아낸 수첩에 적혀 있는 고려대 후배들의 이름을 보고 놈들은 ‘용공’으로 몰기 시작했다. 특히 놈들에게 〈해방신학〉은 북한의 이른바 ‘남조선해방’에 내가 동조하고 있는 것으로 몰았다. 김대중 관계나 검열거부는 뒷전이었다. “이 새끼 보니까 진짜 빨갱이네.”라며 지금까지 쓴 진술서는 접어놓고 다시 심문을 시작했다.

놈들은 내 수첩에 적혀 있는 후배들을 잘 알고 있었다. 74년 박정희가 학생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고대 간첩단사건’에 연루된 후배들을 담당했던 놈이 공교롭게도 내 담당이었던 것이다. 간첩조작 사건으로 3~5년의 감옥살이를 한 후배들의 이름이 모두 수첩에 있으니 놈들로서는 ‘한건’ 잡은 셈이었다. 다른 수사관놈들도 와서는 빨갱이라며 발길질을 했다. 당시 사건을 1면 톱으로 보도한 경향신문 복사본을 가져와 내가 담당한 역할을 실토하라고 윽박질렀다. ‘이 소령’이라는 놈이 또 나타났다. 스스로 합기도 8단이라는 놈은 아예 간첩취급을 하면서 때리고 팔을 비틀며 자백을 강요했다. 허위자백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죽어도 간첩은 되기 싫었다.

취조를 당하면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실은 실토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허위를 사실로 자백할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후배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첩에 적혀 있는 1백여 명 사람들과의 관계를 육하원칙에 따라 진술서에 작성하도록 해 쓰고 또 썼다. 두 명의 수사관놈들은 교대로 침대에 자면서 진술서를 써는 걸 감시하다가 꾸벅 졸기라도 하면 여지없이 손찌검을 했다. 의자에 앉아 꾸벅 조는 게 잠이었다. 맞아도 졸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몇 날이 갔는지, 며칠이 되었는지 몰랐다. 방안에 있는 변기통 물에 비친 얼굴의 수염을 보니 날짜가 많이 지나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염이 난 후 가장 길게 자란 수염이었다. 잠은 재우지 않아도 밥은 굶기지 않았다. 군대식 식기에 몇 가지 반찬이 담긴 밥은 방으로 배달되었다.

어느 날 놈들이 철수하고 나이가 들어 보이는 다른 수사관이 들어오더니 “고생이 많았다.”고 했다. 이제야 수사가 끝났음을 알았다. 그자는 친절(?)하게도 우리 집에 갔다 왔다면서 아이들이나 아내가 별일 없이 잘 있더라는 얘기도 했다. 잇몸이 부어 있는 걸 보고는 약까지 사다주어 어쨌거나 고마웠다. 그러고는 야전침대를 가져와 누워서 자도 된다고 했다. 의자에 앉아서 깜빡 조는 체질이 되어버렸는지 야전침대에 누워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며칠인지 물어보니 6월 5일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18일 동안 진술서를 쓰고 또 썼던 것이다.

이틀쯤 지나자 수염을 깎으라며 1회용 면도기와 손거울을 갖다 주었다. 점심을 먹은 후 다시 수갑을 채우고 검은 안대로 눈을 가리고는 차에 태워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수갑과 안대를 풀어주어 보니 서대문경찰서 유치장이었다. 기자협회보 김동선 편집실장과 안양노 회보 기자도 와 있었다. 반가웠다. 각각 독방에 수감시켰다. 이틀 후 계엄사수사관 놈들이 오더니 다시 수갑을 채우고는 우리들을 서대문 서울구치소로 데리고 갔다. 개인 소지품을 영치시키는 대기실에는 박정삼 감사와 동아방송 천승준 부장, 심송무 기자가 먼저 와 있었다. 구치소 간수가 “기자 분들이 오셨으니 제일모직으로 만든 최고급 옷을 드린다.”며 푸른 죄수복을 나누어주고 죄수번호가 적힌 팻말을 들게 하고는 사진을 찍은 후 각자 배치된 감방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는 모두 흩어져 독방에 수감되었다. 내방은 2층 건물 아래층인 4사 23방이었다.

비 내리는 유월이 그렇게 추운지 몰랐다. 구치소에서 준 담요가 축축하고 냄새가 나서 도저히 덮지 못해 그냥 새우잠을 잤지만 두 평 남짓 되는 독방은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해방의 광장’이었다. 화장실냄새도 역겹지 않았다. 일순 나는 더 이상 ‘빨갱이기자’가 아니어도 된다는 안도감에 젖어들면서 아이러니 하게도 ‘자유인’이 되었다는 희열감을 맛보았다.

일주일이 지나서야 한 달 가까이 행방불명된 남편의 엽서를 받은 아내가 면회를 와 담요를 넣어주었다. 구치소 담요를 베개로 폭신한 집 담요를 깔고 덮고 누우니 오랜만에 느껴보는 포근한 잠이 엄습해왔다. 쇠창살 밖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1980년 6월의 을씨년스런 빗소리가 가슴을 헤집고 있었다.

훗날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났을 때에야 내가 끌려간 곳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이며, 나를 김일성이와 김대중의 지령을 받은 빨갱이라며 고문한 험상궂게 생긴 녀석이 이근안인 줄 알았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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