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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5월 언론투쟁기록[18] 5·27 신흥 민주화운동 등 취재하고도 검열로 보도 못해- 전북일보 (1) 〈김종량 당시 전북일보 기자〉
  • 관리자
  • 승인 2016.11.0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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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여름은 혹독하고 유난히 길었다. 민주언론의 탄압에 저항하는 언론인 대학살은 전북에서도 피해갈 수 없었다. 10·26으로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전북언론인들은 사전 검열을 받으면서 수난이 시작되었다. 특히 5·18광주민주항쟁으로 계엄령이 제주도까지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더욱 기사 사전검열과 신문검열이 심해졌다. 신군부는 유신체제하에서 억눌린 민주화 요구를 분출하려는 언론에 대해 교묘한 방법으로 탄압하고 기사와 신문을 검열했다. 10·26이어 12·12사태 후 전두환 신군부는 궁극적으로 정권을 잡기 위해 먼저 언론을 길들이려는 시나리오를 만들어 언론인을 정화한다며 대량 언론 학살을 감행한 것이다.

전북에는 언론사로 전북신문(현 전북일보), KBS전주방송, MBC전주문화방송, 기독교전북CBS, 서해방송 등 5개사 기자 약 70여명이 80년 광주항쟁을 전후로 사건현장에서 뛰고 있었다. 종이 신문으로는 전북신문이 유일했다. 70년대 유신이 선포되어 1道 1社가 되면서 15년 동안 獨也靑靑하다가 1987년 6·29 선언에 의한 민주화로 모든 규제가 풀리면서 신문사 설립도 자유로워져 지금은 190만 명에 턱걸이하는 전북 인구에 무려 14개 일간 언론사가 난립하고 있어 신문시장 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있다.

언론인 대학살 조짐이 잡히는 시기는 광주항쟁 직후부터였다. 사실 그전부터 감이 보이기는 했으나 노골적으로 드러난 것은 역시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을 학살하고 난 후 언론에 대한 감시가 더욱 심해졌고 언론검열이 혹독했다.

지방 언론 이중삼중 검열 받아 고통 배가

특히 지방신문은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서울에 있는 중앙통신(당시 합동통신, 동양통신)에서 계엄 중앙검열단으로부터 검열을 통과했다(‘검열 필’)며 보내온 기사를 그대로 글자 한 자 고치지 않고 편집하여 지방 검열단에 가면 “왜 이런 기사를 넣느냐. 당장 빼고 다른 기사로 채워 검열을 받으라”며 호통 치기 일쑤였다. 이로 인해 검열단에 파견 나온 보안사 요원과 시비가 붙고 ‘계엄 업무방해’라며 협박이 다반사였다. 결국 신문제작이 몇 시간씩 지연되어 신문을 제시간에 받아 보지 못한 독자들의 항의로 수난을 격어야 했다

전북신문기자들은 5·18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이틀 전인 1980년 5월 16일 오후 5시 한국기자협회 전북신문분회(분회장 김종량 정치부차장)기자 31명이 편집국에 모여 언론검열 철폐 등 언론자유 수호 공정보도 실천을 선언했다. 간부들의 회유와 반대를 뒤로한 기자들은 이날 선언문을 통해 지난날 직필과 곡필의 갈등 속에서 언론본연의 자세를 정립하지 못한 과오를 통감하며“정론을 펴는 냉혹한 증인으로 영원히 썩지 않는 소금이 될 것”을 다짐했다. 또한 기자들은 결의문을 통해 “언론탄압 중지 검열거부”등을 주장하고 알권리를 위해 공정한 보도, 내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배격하며 어떠한 세력과도 야합하지 않는다는 등 7개 행동 실천 강령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결국 이러한 언론수호 선언에 따라 전북신문 기자들은 분회장인 김종량을 비롯하여 한국기자협회 전북지부장인 고정길(전북신문 사회부기자) 전북신문정치부장 서흥석 정종석 경제부 차장 김현기 조사부 차장 동학제에 참석한 김대중 선생을 밀착 취재한 김승일 정읍 주재, 그리고 강병옥 진안 주재, 원유길 김제 주재, 조용규 순창 주재 등 9명이 해직됐다. 중압감에 시달리던 기자들은 7월 하순부터 회사 임원의 지시를 받은 편집국장의 명에 따라 일괄사표 제출을 강요당했고 8월13일 위의 기자들은 강제해직되었다. 전북신문 해직기자들의 공통점은 언론자유 실천 결의와 함께 광주민주화운동 취재, 김대중 씨 정읍 동학제 밀착 취재, 전주신흥고등학교 학내 시위, 도내 대학생들의 연일 데모 취재 보도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80년 광주민주화 운동 실상. 취재하고도 보도 안 돼 기자들 통한!

전북신문 기자들은 광주민주항쟁이 계속되자 특별취재반(반장 이광영 부장, 김승일 정지영 기자)을 편성, 전남도청을 중심으로 충장로 일대의 상가 음식점 등을 10여 일 동안 취재했다. 특히 전남도청과 이웃 상무관 건물에 선명하게 드러난 총탄자국과 여기저기 피 묻은 흔적들을 촬영하고 당시 현장을 목격한 시민, 학생, 음식점 종업원 등을 인터뷰했다. 광주로 들어가는 모든 차량이 계엄군의 제지로 전남북도계에서부터 몇 시간을 걸어가는 동안 광주 외곽에서는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사살된 양민들의 시신을 마대로 덮어 달구지에 싣고 가는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카메라에 담는 등 생사를 넘나들며 광주의 진상을 보도하려고 노력했지만 광주 관련 기사는 계엄사의 공식발표 외에는 단 한 줄도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이것이 ‘5·27 신흥 민주화운동’이다

전북언론은 도내에서 일어난 고등학생들의 광주 관련 시위조차 단 한 줄도 군 계엄검열에 걸려 보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 기자로서 큰 죄책감을 느끼고 참을 수 없는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일제시대 항일투쟁으로 폐교까지 당한 전통을 갖고 있는 전주신흥고등학교 학생들이 전국에서는 최초이자 유일하게 “광주에서 계엄군의 총칼에 애국시민들이 꽃잎처럼 사라져 가고 있다”며 들고 일어났다.

신흥고등학교 전교생 1천5백여 명은 5·18항쟁이 일어난 지 꼭 10일 만인 27일 아침 1교시 시작종을 신호로 운동장으로 몰려나와 스크럼을 하고 시위에 들어갔다. 운동장에 집결한 학생들은 ‘오 자유’등의 노래를 부르며 “비상계엄 철폐하라”, “유신잔당 척결하라”, “전두환 물러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빠져나가려 했다. 학생들은 마이크를 잡고 “애국 신흥인에게 고함”이라는 유인물을 낭독하고 우리를 막는 자는 역사의 반역자가 될 것이라고 외치며 시가데모를 시도했다. 학생들은 또 스크럼을 하고 “우리들은 정의파다 훌라훌라. 같이 죽고 같이 산다 훌라훌라”라며 무장군경이 막고 있는데도 교문 돌파에 안간힘을 쏟았다. 그러나 학생시위 정보를 미리 알고 있는 계엄군과 경찰은 이미 교문밖에 군병력과 경찰병력 수개 중대를 배치시키고 군 헬리콥터로 학생들을 감시하며 교문을 철통봉쇄하며 학생들의 시위를 막았다. 그러면서 학생시위를 중단할 것을 학교 측에 요구하고 학생들이 교실로 들어갈 것을 끈질기게 종용하고 협박을 했다. 그래도 학생들이 수그러들지 않고 마이크로 구호와 함성을 지르자 학교로 들어가는 전신주에 올라가 전기선을 끊어 방송을 중단시켰다.

신흥고등학교 학생들은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6시간 동안 점심도 거른 채 구호를 외치며 계속 교문 밖으로 진출을 시도했지만 군경의 철통 봉쇄에 막혀 단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기진맥진했다. 군경 합동 진압부대는 이미 “만일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오면 발포하라”는 명령까지 내려 있는 상태라는 것을 학교 측에 통보하고 빨리 해산시키지 않으면 병력을 학교에 진입, 강제해산시키고 주동학생을 색출 연행하겠다며 학교당국을 압박했다. 교문을 가로막아 학생들의 교문접근을 만류하던 선생님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위기감을 느끼고 전전긍긍, 좌불안석이었다. 잘못하면 제2의 광주항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오자 출장 중인 교장을 대신하여 정옥동 교감을 비롯한 전 교사들이 학생설득에 나섰다. 학년담임이 중심이 돼 학생들을 설득하고 만류하면서 자제를 호소했다. 그 결과 학생들이 교사들의 말을 듣기 시작하면서 강당으로 모여들어 기도를 하고 시국토론회를 하며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위기에 있던 정부는 물론 계엄당국, 전북교육위원회는 신흥고학생들의 시위소식이 또 다른 학교로 번져 학생시위가 일어나면 광주항쟁 그 이상의 사태를 불러올 수 있다고 판단하여 언론통제와 검열을 혹독하게 하면서 전주신흥고등학교에는 우선 5월 28일부터 6월 2일까지 휴교령을 내렸다. 이날 시위는 기독학생회 3학년 간부학생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전주신흥고등학교 학생들은 다른 학교학생들보다 일제에 항거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까지 당한 전통이 저변에 깔려 있어 집단적으로 좀 더 의식화되어 있는데다가 전체 재학생 약 20%가 이웃 광주, 전남 출신으로 부모 형제 가족들로부터 “공수부대 군인들이 민간인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있다”는 소식을 수시로 듣고 자연스럽게 이 소식이 학내 학생들에게 전파되면서 학생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안았다.

신흥고등학교 주동학생들은 5월 19일부터 22일까지 중간고사 기간인데도 전주성광교회에서 전주고, 전주사대부고, 전주여고, 성심여고, 기전여고 등 전주시내 10개 고등학교 대표들과 회동, 광주민주항쟁에 따른 참상을 소개하고 여러 학교가 동시에 시위를 하자는 논의를 했다. 따라서 5월 24일을 기해 전북고등학생 시위를 결의하였으나 그날이 마침 전주여교의 개교기념 휴일로 연기되어 하지 못하고 결국 27일 신흥고등학교만 행동에 나섰던 것이었다.

박영화를 비롯하여 주동학생들은 광주 참상이 깊어가는 24일, 시위결행을 점검하는 최종회의를 전주 팔복동 신상교회에 열었다. 참석자들은 신흥고 3학년 박영화, 허천일, 김인수와 2학년인 허민 이외도 완산여상 이상호 교사, 한일장신대생 김명희, 사대부고의 유창훈 등 15명이 모여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입이 임박한 광주 상황과 그에 따른 엄청난 살육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라도 “광주의 참상을 외로운 섬으로 방치할 수 없다”는 절박감에 전주를 비롯한 전국적으로 고등학생 데모를 확산 전두환 군부 학살정권을 끝장내자는 결론을 내리고 신흥학생들은 5월 27일 시위를 감행하게 된 것이다.

전북 신문기자들은 이날 전주신흥학교에 시위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학교로 달려갔으나 이미 학교 정문을 굳게 닫혀 있는데다가 학교 밖에는 군경 시위진압 부대가 이중 삼중으로 바리게이트를 치고 모든 사람들의 학내 진출입을 철통같이 막고 있었다. 취재기자 신분임을 내세워 학교 출입을 요구했으나 묵살당하고 하는 수 없이 몰래 담을 넘어 학내에 진입하여 취재하여야 했고, 취재기자를 알아본 교직원은 학생들이 자극할 수 있으니 학생들 눈에 제발 띄지 않고 취재하여 빨리 학교를 떠나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석간인 전북신문은 이 날짜 사회면에 “고등학교 전국최초 신흥고등학교 학생들 광주민주항쟁 관련 데모”라는 제목을 뽑고 기사를 편집하였으나 결국 군 계엄 당국의 신문검열에 걸려 그 기사 자리는 형식적인 광고로 채워야 했다.

한편 당시 전주신흥고 시위를 주동했던 81회 졸업생들은 졸업 30년만인 지난 2011년과 2012년 만나 지난날을 회고하는 문집을 내고 특히 교내에 ‘五二七亭 ’이란 정각을 세우고 그 아래 ‘오이칠정을 세우는 뜻’을 비문에 새겨 후배들이 민주주의의 소중함과 광주민주화 운동을 외쳤던 선배들의 그날의 함성을 잊지 않도록 기념비를 만들어 놓아 학생들뿐 아니라 교내를 방문한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하고 있다.

신흥고등학교는 군 당국과 교육위원회로부터 주동학생들의 끈질긴 징계 요구에 견디지 못해 박영화, 박일규, 고석, 채범석, 김인수, 이재유, 허천일, 허민, 무기정학 등 주동 학생 총17명에 대해 1주일에서 길게는 무기정학까지 처벌을 했으나 후에는 ‘신흥을 빛낸 선배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김영수 교장선생님의 전언).


김대중 씨 정읍동학제 참석, 10만 관중 운집 경악. 광주항쟁 단초?

사실 5·18광주 문제는 5월 11일 김대중 씨가 전북을 방문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80년도 봄은 계엄령 하이었지만 민주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유신 이래 구금되었던 재야인사들이 복권되고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소위 3김이 민주화를 위해 협력하기로 하면서 민주화는 거스를 수가 없었다.

김대중 씨는 복권이 되자 첫 지방 활동으로 전북을 찾았다. 김대중 씨가 1980년 5월 11일 동학농민혁명 86주년 기념식에 참석차 정읍을 방문하자 정읍시민뿐 아니라 전남, 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김대중 씨를 보려고 약 10만여 명이 몰려왔다. 결국 신군부는 김대중 씨의 대중적 인기에 경악, 꼭 일주일 후 김대중 씨를 사회불안 조성 부정 축재 등 혐의로 긴급 구속함으로써 광주의 5·18민주항쟁의 단초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지울 수가 없다.

김대중 씨는 정읍농고에서 있은 기념식에 참석, 축사와 별도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이양 스케줄을 명백히 밝히라고 요구했다. 김대중 씨는 개헌공청회 폐지, 정치스케줄 월별 발표, 과도정부 지도자 불출마선언, 학원·노사·민생문제 등의 책임 있는 행동과 과감한 실행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대중 씨는 “동학농민운동은 극심한 학정으로 백성들이 원성을 임금에게 상소했으나 들어주지 않아 마지막으로 봉기한 것”이라며 동학농민혁명은 민주주의 정신과 일치하다고 강조하자 군중은 열띤 환호와 함께 큰 박수갈채를 보냈다.

전북신문은 김대중 씨가 동학제에 참석해 한 축사와 기자회견 내용을 5월 12일자 정치면(1면) 중간 톱과 사회면 머리 톱 등 2면 상자기사로 편집하여 신문을 제작했다. 이밖에 김대중 씨가 홍토현 전적비까지 가서 참배하는 모습 등 모든 동선을 스케치하여 신문을 제작하여 배포함으로써 계엄당국의 심기를 크게 상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김대중 씨를 밀착 취재했던 기자들은 결국 해직의 한 빌미가 되었고 평생 큰 고통을 받아야 했다.

언론인 해직은 보안사 주도, 사전에 짜 놓은 각본대로 비리 찍어 숙정

전북도내 언론매체인 KBS의 채철수 기자, CBS의 최유철 기자들도 연일 계속되는 학생시위 데모 경찰의 과잉 진압, 김대중 씨의 정읍동학제 참석 등을 여과 없이 보도해 이로 인해 숙청을 당했으며 여기에 건강이 좋지 않은 기자까지 끼워 넣어 해직을 시켰다. 사회현실에 직필을 서슴지 않고 공무원들의 비리를 파헤치자 기자들이 눈엣 가시가 되어 소위 문제기자로 찍어 정보를 올리고 그에 따라 군부가 언론사주를 협박해 내보내도록 했던 것이다. 정부는 특히 군부는 언론인들의 해직은 언론사 자체적으로 자율적으로 이뤄진 것처럼 진행했다. 그러나 이름뿐인 자율이고 정화였다. 보안사가 선정한 해직대상자가 언론사가 작성한 명단에 빠졌을 땐 그 기자를 은밀히 사주에게 통보하여 해직을 종용하고 그래도 안 될 경우 긴급 체포하여 사주가 할 수 없이 두 손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해직을 시킨 후에야 풀어주었다. 이런 경우가 전북신문 해직기자들이 대표적이다.

서흥석, 김종량, 김현기, 정종석, 김승일, 고정길, 강병옥, 원유길, 조용규 등 9명의 기자들이 그렇게 해직 당했다. 회사는 해직에 대한 아무 이유도 밝히지 않았으며 편집국장 역시 피해 다니며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신군부는 해직자들을 사회 부조리자로 지목 누명을 씌워 척결한 것이다. 이들 기자들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집에서도 친지들한테도, 그 누구 한데도 신문사에서 쫓겨났다는 소리도 못하고 공원으로, 산으로 전전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걱정해야 했다. 도내 해직언론인 중에는 전북신문 정종석, 김현기, 원유길 기자, KBS 탁병용 기자, MBC 이채훈, 최유철 기자들이 유명을 달리했는데 이들 중에는 화병으로 또는 생활고로 시달리다 통한의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전북지역 각 언론사별 해직기자는 다음과 같다.

- 전북신문 : 서흥석, 정종석, 김현기, 김종량, 김승일, 고정길, 강병옥, 조용규, 원유길
- KBS전주방송 : 강호경, 채철수, 탁병용, 오방원
- MBC전주문화방송 : 배기창, 정준모, 이채훈
- CBS기독교전북방송 : 최유철
- 서해방송 : 박진수
(이 명단은 ‘80년 언론인 해직 백서’에 수록된 것임)

김대중 정부 들어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등 법률’과 시행령이 공포되어 해직언론인들도 여기에 기대를 걸고 명예회복 신청을 했으나 대부분 해직사유가 민주화와 관련이 없다며 회신을 해옴에 따라 이들을 두 번 죽이는 꼴이 되었으며 해직자들은 한 결 같이 특별법이 제정돼 늦게나마 명예회복이 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전북신문 서흥석 정치부장은 정치분야 팀장으로 모든 정치관련 기사의 취재 보도에 책임을 물어 해직된 것이 분명하다. 김승일 정읍 주재기자는 김대중 씨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제 참석 취재반의 일원으로 밀착취재한데다 광주민주화운동 특별취재반 일원으로 10여 일 동안 광주에 있으면서 양민학살 현장을 심층 취재하는 등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것이 죄가 된 것이다. 김승일 씨는 해직통보와 함께 경찰에 연행 B급 판정을 받아 사단에 끌려가 9일 동안 혹독한 훈련(삼청교육 1980년 8월20일∼29일)을 받고 풀려났다. 김승일은 정읍 주재기자로 있으면서 특히 경찰의 비리를 고발하는 기사를 연일 보도함으로써 그들의 보복을 받은 것이다.

고정길 사회부 차장은 한국기자협회 전북지부장으로 기자협회 기자들에게 언론검열 반대, 언론자유 실천결의를 촉구하고 현군부가 하루빨리 민간정부에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왔던 것이 화근이 되었다. 고 기자는 해직을 10여일 앞둔 7월말 새벽에 전주경찰서에 영장도 없이 강제 연행돼 기자협회장으로 있으면서 어떤 일을 했는지 전말서를 작성토록 강요받기도 했다. 그는 유치장에서 3일을 지내는 동안 똑같은 내용의 전말서를 반복해서 내야만 했다.

강병옥 기자 역시 한국기자협회 전북신문분회 기자들의 언론자유 실천결의대회에 참석 신문검열 반대운동이 실효를 거둘 수 있도록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등 강성발언을 한데다가 진안 주재로 있으면서 “광주민주화 운동에 나선 시민 학생들이 무장군인들로부터 무차별 살육을 당하고 있다”는 광주에 취재 나갔던 김승일 기자로부터 들은 내용을 주변 지인들에 해준 것이 군기관의 첩보에 잡혀 지역보안대에 끌려가 전말서와 각서를 써주고서야 풀려나왔다. 강병옥 기자는 본사 전무로부터 해직통보를 받고 해직이유를 묻자 “상부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 더 묻지 말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참담할 수가 없었다고 증언록에서 밝히고 있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된 강 기자는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할 정도로 절박하여 다방 주방장 등을 하면서 만 4년을 버티다 복직됐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언론인 해직은 공권력에 의한 결론

불혹의 40에 해직을 당한 김종량은 나은 편이라 할까? 김종량은 한국기자협회 전북신문 분회장으로 80년 5월 16일 편집국 기자 31명과 언론자유 수호 결의대회를 주도, 검열반대와 계엄업무에 불평불만을 쏟아내고 학생데모를 조장하며 신흥고등학생이 전국 최초로 광주민주화 시위를 한 것을 미화하고 김대중 씨를 밀착취재하고 계엄업무 방해 등 죄목으로 불법 체포된 것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해직기자들과 달리 정부가 그의 해직을 공권력에 의한 해직으로 판정 인정해 준 것이었다. 그리고 얼마간 생활보조금도 지불받았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김종량의 명예회복 신청에 대한 결정문을 다음과 같이 보내왔다.

1. 조사결과 국가(신군부)의 현저히 부당한 공권력 행사로 인해 헌법상 보장된 언론의 자유.직업선택의 자유. 신체의자유등의 침해 행위가 규명되었다.
2. 신군부는 권력 장악에 필수적인 언론 통제를 위해 언론인 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을 계획하고 저항적이거나 비판적인 언론인을 해직 조치했다.
...(중략)...
5. 언론인 해직은 실제적으로 보안사가 신군부에 비판적인 언론계인사들을 선정해 명단을 작성 이를 언론사에 전달하여 해직케 하였다. 당시 언론사는 보안사로부터 지시받은 일정비율에 따라 자체적으로 해직 대상자를 선정한 후 부조리나 무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해직시켰다. 해직된 언론인 가운데 일부는 삼청교육대에 입소시키고 해직이후에도 취업을 제한하여 생존권을 위협 하는 등 공권력을 위협 부당하게 행사하였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제28조의 규정에 의하여 위와 같이 결정되었음을 통지합니다.

해직언론인 특별법 만들어 공권력에 무너진 삶 보상받아야

이런 결정문만 놓고 보더라도 해직당한 서흥석, 김승일, 강병옥, 고정길 등 그 누구도 해당 안 될 해직기자가 없다. 그 기준에 부합되고 넘친다. 해직기자에게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했고, 저항하거나 비판적인 언론인을 조치하였으며 보안사가 신군부에 비판적인 언론계 인사들을 선정해 명단을 작성 언론사에 전달하고 해직 대상자를 선정 후 부조리나 무능하다는 이유를 들어 해직시켰다. 일부는 삼청교육대에 입소시켰으며, 해직 후에도 취업을 제한하는 등 생존권을 위협하며 부당한 공권력이 행사되었다는 것은 해직자 모두에게 공통으로 적용되고 개개인의 해직이유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그동안 해직자들은 통한의 세월을 보내며 명예회복이 하루빨리 이뤄져 그동안의 불명예를 씻고 떳떳이 가족 앞에 나서기를 갈망하고 있다.

부끄러운 과거언론 상처 치유가 시대정신 개혁 서둘려야

부끄러운 과거언론, 언론의 치욕을 하루빨리 청산 차원에서도 해직언론인 특별법이 반드시 만들어져야 한다. 특히 전북지역 언론인 해직을 주도했던 보안부대 대장과 주무과장은 비리로 형사처벌을 받아 계급이 이등병으로 강등되는 등 법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북 언론인 숙청작업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입증되고 증명된 것이다. 민주화를 요구하다 희생된 1천여 해직기자들이 뒤늦게나마 국회가 특별법을 제정하려는 노력에 마지막 희망을 걸며 하루빨리 그 희망이 결실을 맺기를 소원하고 있을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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