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20일 10기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회는 방문진 역사상 가장 치욕스런 날로 기록될 것이다. 이날 6인의 여권추천 이사들은 ‘애국진영’의 전사가 되어 방문진을 저열한 이념과 진영의 선전장으로 만들었다. MBC의 공적 책무와 경영의 관리?감독이라는 방문진 본연의 책무는 애초부터 설 자리가 없었다.

이날 주요 안건은 ‘고영주 이사장의 거취에 대한 건’이었다. 지난해에도 고 이사장은 ‘문재인 공산주의자’ 등 극단적 이념편향 발언으로 불신임의 심판대에 섰지만 다수의 힘으로 부결시킨 바 있다.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고 이사장은 MBC경영진의 불법과 부도덕을 비호하느라 여념이 없고, 이사회 운영은 독선과 편파가 극에 달했으며, 방송독립과 언론자유에 대한 인식은 천박한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 마디로 고 이사장은 방문진 이사장으로서의 자격과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공인으로서 자신의 독선과 언행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도 없었으며, 그로인해 MBC 파행을 더욱 증폭시킴으로써 다시 불신임의 심판대에 선 것이다.

여권추천 이사들은 이번 ‘고 이사장 불신임 건’에 대해 “외부 정치세력이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것”,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충성경쟁” 등으로 매도했다. 이는 안광한 사장 해임안이 제기됐을 때 나왔던 주장과 판박이다. 불법과 비리가 난무하고 무능으로 얼룩진 안 사장의 해임 사유에 대해 어떤 구체적인 반론도 제기하지 못했던 6인의 ‘애국진영’ 전사들의 말과 행동은 이번에도 똑같았다.

고 이사장은 자신의 불신임 사유에 대한 설명이 끝나자 미리 작성해 온 해명 차원의 문건을 읽어내려 갔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유에 대한 개개의 비판이나 반론은 없었다. 오로지 지난 9월에 있었던 자신의 명예훼손 소송 1심 판결에 대해 무려 30여분에 걸쳐 불만을 토로했다. 불리한 법원 판결이 있을 때마다 고 이사장이 해왔던 낯익은 모습이다. 법률가로서 법을 존중하고 수용하는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방문진 이사회는 졸지에 고영주 이사장의 항소심 공판의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어서 이인철 이사의 필리버스터가 이어졌다. 고영주 찬양, 문재인 성토, 고영주 관련 법원 판결에 대한 항변이 담긴 극우 논객들의 글과 기사를 모은 내용이다. 특정 정파와 특정 이념의 글들을 모아 1시간 40여분 동안 읽어 내린 이인철 이사의 이날 행위로, 방문진은 더 이상 공적 기구가 아니고 정당보다 더 정파적인 ‘애국진영’의 선전장이 됐다. 야권추천 이사들이 “발언을 제지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고영주 이사장은 “들어보고 싶다”며 거부했다.

교수 출신의 유의선 이사(이화여대 미디어학부)는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한 사상검증은 “당연하다”고 밝혔고 “방문진 구성상 정파성은 있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천박한 이해와 방문진의 위상에 대한 퇴행적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영국정부는 BBC경영의 감독기구인 트러스트 위원 12명을 모두 임명하지만, 트러스트에서 선임된 그레그 다이크 사장은 토니 블레어 수상과 이라크전쟁 보도로 갈등을 빚은 바 있다. 정파와 거리를 두는 BBC를 방송학자인 유의선 이사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날 ‘애국진영’의 도발은 ‘고 이사장 불신임’에 대한 안건설명도 하기 전에 시작됐다. 여권추천 이사들이 일사부재의의 원칙을 내세우며 안건이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여권 이사들이 과거 수차례 써먹었던 회의방해 수법이다. 이들은 그동안 ‘속기록 보존 및 회의록 작성방식’, ‘백종문 녹취록 사건’, ‘안광한 사장 해임결의의 건’ 등 현 경영진에 불리한 이슈 때마다 ‘일사부재의’를 전가의 보도처럼 악용함으로써 논의 자체를 못하게 막아왔다.

국회법에는 “한번 부결된 안건은 같은 회기 중에 다시 발의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고 ‘회기’는 정기국회의 경우 100일, 임시국회는 30일로 제한되어 있다. 일사부재의 위반은 2009년 미디어법 처리 과정에서 이윤성 국회 부의장이 정족수 미달로 부결된 의안을 다시 투표해 날치기로 통과시켰던 사례가 있다. 방문진법이나 정관에는 ‘회기’에 대해 별도의 규정이 없지만 굳이 따진다면 2주에 한번 열리는 이사회를 방문진의 ‘회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3년의 방문진 임기가 방문진의 회기라고 억지를 부리며 일사부재의를 강변하는 데는 할 말을 잃는다. 이들 주장대로라면 아무리 잘못된 결정이라도 3년 동안에는 재논의가 불가능하며 오류를 수정하고 개선할 어떠한 방법도 없는 셈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6인의 ‘애국진영’ 전사들은 법과 규정도 ‘다수의 힘’으로 무력화시켰다. 방문진 정관 13조 2항에는 “이사회의 의결사항과 직접 이해관계가 있는 이사는 당해 안건에 관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이사장의 거취를 결정하는 이사회에서 고 이사장은 방문진 정관에 따라 명백한 제척 대상이다. 그러나 고 이사장은 야권추천 이사들의 제척요구를 표결에 붙여 정관의 제척규정을 무력화했다. 다수의 힘으로 규정에도 없는 ‘회기’와 ‘일사부재의’를 운위하며 논의를 못하게 막고, 다수의 힘으로 법과 규정을 짓밟은 어이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기본 원칙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충분한 토론이 전제되어야 하고 소수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하며 절차상의 하자가 없어야 한다. 이러한 기본 전제를 모두 무시하고 다수가 법과 규정까지 어겨가며 모든 의사를 독점하는 것은 ‘다수의 폭력’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교수, 변호사 등 소위 지식인이라고 자처하는 6명의 ‘애국진영’ 전사들이 다수를 내세워 법과 민주주의를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애국’이라는 숭고한 말이 저열한 극우주의자들로 인해 혐오의 언어가 되어버린 지금, 공영방송 MBC를 ‘애국진영’에 맡겨놓고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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