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는 1975년 3월 18일에 결성된 조직이다.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이래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보도와 논평을 통해 박정희 유신독재와 치열하게 싸우던 언론인 113명이 만든 모임이 바로 동아투위이다. 그들은 긴급조치에 주눅이 든 모든 언론매체가 침묵하던 시기에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박 정권의 인권 유린과 민중 탄압을 국민에게 전하다가 1975년 3월 17일 새벽 동아일보사와 박 정권이 동원한 폭력배들에 밀려 회사 밖으로 쫓겨나서 동아투위를 결성했다.
당시 강제해직당한 기자, PD, 아나운서, 엔지니어 등 113명은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정권 시기에 민주화와 자유언론 회복을 위해 굳건히 싸웠다. 지금까지 동아투위 위원 18명이 정보기관에서 당한 고문과 옥살이에서 얻은 병, 생활고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디어오늘이 지금도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일선에서 후배언론인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동아투위 위원들의 이야기를 특별기획으로 ‘동아투위, 유신시절을 말한다’를 연재해 〈1975년-유신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인카운터)로 펴냈다. 이들 언론인의 증언을 싣는다. /편집자 주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둔 1961년 2월 동아일보사의 제3기 견습기자 공채시험을 보았다. 당시 작문시험 제목은 ‘신문’이었다. ‘4ㆍ19 학생혁명’이 일어난 뒤 미처 일 년도 안 된 때였다. 매일처럼 온갖 요구를 내세우는 데모대가 거리를 누비는 등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들의 욕구가 열화와 같던 때였고,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학생들이 남북교류를 주장하던 그런 시점이었다. 따라서 작문시험에는 ‘한국의 민주주의’나 ‘바람직한 민족통일방안’ 같은 정치색 짙은 것들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나온 터였다.

동아일보 입사시험 작문 제목은 ‘신문’

그러나 시험관이 칠판에 커다랗게 쓴 작문시험의 제목은 덜렁 두 글자, ‘신문’이었다. 작문 시험이 비록 언론에 대한 응시자의 인식수준과 문장력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 치더라도 그렇다. 적어도 신문기자를 뽑는 시험의 제목이라면, 하다못해 ‘민주주의와 언론의 역할’ 정도는 돼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A4용지 크기의 백로지 5장을 채워야만 하는 상황이니 실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작 ‘민주주의와 언론의 역할’이라는 문제가 나왔다 하더라도 나는 답안지를 다 채울만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당시에는 신문방송학과나 언론학과 같은 학과가 아직 대학에 개설되지 않았던 때였고, “여론의 자유시장론”이니 “민주주의와 여론의 다양성” 같은 개념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나는 민주주의가 자유로운 국민여론을 기초로 하여 작동하는 제도라는 사실과, 민주적 제도의 불가결한 요소로 자리 잡은 신문(언론)이 여론의 자유로운 형성과 유통 과정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 내가 알고 있던 지식을 총동원했다. 또한 내 주장의 허약함을 메우기 위해 “신문은 사회의 공기(公器)이자 목탁(木鐸)”이라고 상식적인 주장을 했는가 하면,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는 토머스 제퍼슨을 인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답안지 4장이 텅 빈 채 남아 있었다. 무엇으로든 답안지는 메워야 했다. 나는 궁리 끝에 내가 왜 신문기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며, 그것도 ‘동아일보 기자’가 되기로 작심하게 됐는가를 쓰기로 했다. 지난해 4ㆍ19 그날, 학생데모대에 끼어 광화문에서 목격했던 사건과, 그때 내가 느꼈던 그 개인적인 감동을 말이다.

1960년 4월 당시 서울법대는 동숭동 캠퍼스에 있었다. 4ㆍ19 날 아침 대학 분위기는 여느 날과는 달랐다. 전날 밤 고대생들이 깡패들에게 습격을 당한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4월18일 오후 고대생들은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 몰려가 3ㆍ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를 벌였다. 고교생 김주열 군이 최루탄을 얼굴에 맞고 사망한 마산 데모를 비롯해서 몇몇 지방도시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데모가 벌어지긴 했지만, 서울에서 대학생들이 몰려나와 그런 데모를 벌인 것은 고려대가 처음이었다. 그 고대생들을 깡패들이 습격하여 많은 부상자들을 낸 것이다. 자유당 정권이 동원한 정치 깡패들이 어둠을 틈타 저지른 만행이었다.

4월혁명의 현장으로

다음날 아침 등교한 우리는 삼삼오오 모여서 자유당 정권의 야만성을 침을 튀겨가며 규탄했다. 하지만 우리는 ‘고대생 피습사건’이 우리 현대사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지 미처 짐작도 못했었다. 그리고는 흩어져 각자 강의실로 들어갔다.

제1교시가 시작 된지 한 15분쯤 지나서였을까, 갑자기 강의실 문이 열리더니 한 학생이 뛰어 들어왔다.

“선배 여러분, 지금 뭣들 하고 계십니까? 조국의 민주주의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강의나 듣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1학년이나 2학년 쯤 돼 보이는 젊은 친구였다. 형형한 눈빛이 강의실을 압도했다.

“자, 일어납시다. 오늘 전국 백만 학도가 일제히 궐기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들은 광화문에 집결하기로 했습니다. 선배 여러분, 모두 운동장으로 나갑시다!”

몇몇 수강생들이 책가방을 들고 일어서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나갑시다!” “나갑시다!”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교수님은 더는 강의를 계속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음인지 즉시 휴강을 선언했다. 우리는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대학 본부 앞 운동장에는 이미 수백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고 강의를 중단하고 나오는 학생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는 중이었다. 후배 한 사람이 연단에 서서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전날 밤 각 대학 대표들이 긴급 모임을 갖고 오늘 광화문에 집결하기로 했다는 것과 그 시각 현재 문리대 ‘동지들’이 교문 앞에서 경찰 저지선과 맞서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700~800명쯤 되는 우리도 대오를 짜고 평생 처음 해보는 데모에 나서게 됐다.

교문 앞 좁은 길과 대학로가 만나는 지점에서 경찰 저지선이 우리를 가로 막았다. 우리 데모대 선두가 경찰과 직접 몸싸움을 벌이며 밀고 밀리기를 계속하고 있는데, 경찰 저지선 뒤편에서 한 무리의 동성고 학생들이 교복 차림으로 구호를 외치며 시내 쪽을 향해 달려갔다. 경찰이 당황해 하는 판에 길 건너편 수의과대학 쪽에서 경찰 뒤쪽을 향해 돌멩이가 날아왔다.

경찰들이 돌멩이를 피해 우왕좌왕 하는데, 경찰 저지선을 돌파한 문리대 데모대가 도도한 물결로 전진해 왔다. 그 와중에서 경찰 저지선을 뚫은 법대 데모대는 수의과대학을 끼고 우측으로 진로를 잡았다. 당시 종로4가에 있던 동대문경찰서 앞에서 잠시 저지를 받았지만, 어렵지 않게 돌파해서 종로통으로 나아가 학생 데모대 본류와 합류할 수 있었다.

1960년 4월 19일. 벌써 50년 전 일이지만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뛴다. 종로 4가에서 종로 1가 화신 앞까지 진출하는 동안 우리 데모대는 성균관대 데모대와 흰 가운을 입은 서울의대 데모대와 뒤섞이게 되었다. 서울법대든 서울의대든 성균관대든 학교이름은 의미가 없었다. 우리는 다 같이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젊은 학도들이자 뜨거운 가슴이었던 것이다.

누군가 구호나 노래를 선창하면 이내 합창이 되었다. “압박과 서름에서 해방된 민족?아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울린다”는 〈해방의 노래〉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이라는 〈6ㆍ25의 노래〉는 어쩐지 따라 부르기가 어색했다.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마당에서 〈6.25의 노래〉는 아무래도 걸맞지 않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긴 “맨 주먹 붉은 피로?”라는 가사가 젊은 가슴들 속에 어떤 울림을 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때는 아직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운동권 노래가 없던 때였다.

그날 오후 동아일보사 앞 세종로는 한 마디로 학생 데모대로 꽉 들어찼다. 멀리 남대문로부터 시청 앞 광장과 동아일보사 네거리를 거쳐 중앙청 앞까지, 차도고 인도고 가릴 것 없이 사람들로 넘실댔다. 대학생들만 아니었다. 일반 시민들과 10대 소년들도 뒤섞여 있었다. 멀리 중앙청 앞에서 검정제복의 경찰 병력이 효자동으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하고 있는 게 보였다.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가 그쪽에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직 발포 같은 것은 일어나기 전이었다.

“동아일보다! 동아일보!”

나는 동료들과 함께 상공부 앞 인파 속에 끼어 있었다. 그때 동아일보 깃발을 단 취재용 지프 한 대가 어렵사리 사람들 틈을 뚫고 전진해 오다가 마침내 사람들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젊은 기자 한 사람이 지프에서 뛰어 내렸다. 팔에 ‘보도’ 완장을 차고 있었다. “민주시민 여러분, 동아일보 기잡니다! 길 좀 터주세요!” 젊은 기자는 사명감에 넘치는 목소리로 다시 외쳤다. “동아일보 기잡니다! 보도를 해야죠, 보도를! 민주시민 여러분, 길 좀 터 주세요!” 민주시민들이 여기저기서 소리쳤다. “동아일보다! 동아일보!” “길을 터줍시다!” “길을 터줍시다!” 그러자 바닷물이 갈라지듯 길이 트였고 지프는 앞으로 전진해 갔다. “동아일보다!” “길을 터줍시다!”라는 소리가 계속 앞으로 전달되면서 동아일보 취재 차량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나는 그때 신문기자라는 직업에 큰 감명을 받았다. 신문기자라는 직업이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기자가 국민과 대의를 같이 할 경우 저토록 국민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난생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그때 나도 신문기자가 되기로 결심을 했다. 혼자 결심한다고 신문기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리고 신문기자가 될 바에야 동아일보 기자가 되기로 했다. 평소 동아일보 독자이기도 했지만 당시에는 동아일보가 발행 부수에서나 영향력에서 최고의 신문이었기 때문이다.

4ㆍ19 날 광화문 데모 현장에서 신문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 곧바로 동아일보 기자시험 응시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법대 졸업 예정자에게는 몇 가지 진로 선택이 있었다. 고등고시를 보거나 은행 등 금융기관에 들어가거나 신문기자가 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나는 고등고시는 붙을 자신이 없었고, 은행원은 체질에 맞지 않아 신문기자가 되기로 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신문기자가 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굳이 동아일보를 지망했던 것은 허영이자 교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운명의 수레바퀴가 그 쪽으로 굴러가버린 것을!

어찌됐건 나는 작문시험 답안지에 내가 신문기자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동기와 동아일보사를 지원하게 된 이유를 다소 과장해서 써냈고 다행이도 합격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나는 동아일보 창간 41주년 기념일이 되는 1961년 4월 1일 동아일보사에 첫 출근했다. 동기생은 모두 5명이었다. 나는 동기생 한 사람과 함께 외신부에 배치됐다. 외신부는 오늘날 국제부로 불리는 부서로 외신기사를 다뤘다. teleprinter실에서는 AP, UPI, Reuters, AFP 등 외국 통신사가 송고하는 기사들이 24시간 쏟아져 들어왔다.

견습기자는 문자 그대로 일을 배우는 병아리 기자이기 때문에, 낮 시간에는 선배 기자들이 찢어주는 외신기사를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그리고 외국 정부 부처의 명칭과 그 장의 호칭 등 시사용어를 익혔다. 일주일에 한번 꼴로 밤에 철야근무를 했는데 처음에는 선배기자의 보조로 근무를 했지만 입사 한 달 뒤부터는 혼자서 근무를 했다. 기사의 중요도(value)에 대한 판단력이 없었기 때문에 이것저것 다 번역하느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곤 했다.

견습기자 시절과 관련해서 잊을 수 없는 것은 ‘5ㆍ16 군사 쿠데타’다. 5월15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날 밤 철야근무 당번은 동기생이었는데, 그 친구가 꾀는 바람에 같이 한잔을 하고 들어와 신문사에서 함께 밤을 보내게 됐다.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고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콩 볶듯이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수습기자로 맞이한 5ㆍ16쿠데타

편집국에 있던 근무자들이 총동원돼서 당직 책임자의 지휘 아래 국방부 출입기자에게 연락하고 외신을 점검해보는 등 총소리의 정체를 알아봤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KBS는 밤 12시에 방송이 끝났고, 혹시 뭔가 나올까 해서 미군 방송 AFKN을 틀어 보았지만 계속 영어노래만 흘러나왔다. 결국 새벽 4시 KBS 박종세 아나운서가 읽은 ‘혁명공약’으로 군부 쿠데타임을 알게 됐다.

나는 박 아나운서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4ㆍ19 당시 서울시 일원에 동원된 계엄군 지휘관 김미주 대령의 말이 생각났다.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을 묻는 외신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우리 국군은 남미 군부와는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군부의 중심세력이 아니었단 말인가? 나는 신문에서나 읽었던 후진국의 군사쿠데타가 현실로 들이닥친 상황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책상물림에 불과했다. 1961년 5ㆍ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던 밤, 나는 그 군사정권이 전두환정권 노태우정권으로 이어지면서 31년간이나 지속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10여년 뒤 내가 군사정권에 맞서다가 신문사에서 목이 잘리고 감옥까지 가게 되는, 쓰라린 삶을 살게 되리라고는 짐작도 못했었다.

혁명공약은 “반공을 국시의 제1 의(義)로 삼겠다”고 했다.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라며 남북학생교류를 주창했던 학생들을 비롯해서 통일세력이 철퇴를 맞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재수생’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학생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살아왔었다. 따라서 당장 통일세력으로 몰릴 가능성은 없었지만, 공법연습 졸업논문 이 마음에 걸렸다. ‘북진통일론’이나 ‘흡수통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보면 ‘중립화 통일방안’도 색안경을 끼고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 것은 곧 잊고 말았다. 외신에서 Military Junta로 지칭되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하루가 멀다 하고 잇달아 발표하는 메가톤급 혁명시책에 신경을 쓰랴, 매일 제작된 초벌 신문을 들고 혁명군의 언론검열반에 가서 검열을 받아 오는 등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내 신상에도 중대한 일이 일어났다. 그해 8월 중순께 그동안 대학 재학 중이라 연기돼있던 징집영장이 나온 것이다. 징집일은 8월 말이었다. 때마침 9월 초에 ‘공군 제16기 각종장교 시험’이 공고돼 있던 터라, 나는 대학 동창들과 함께 공군장교 시험에 응시하기로 했다. 응시 접수증을 병사부에다 제출하고 징집을 연기한 다음, 시험을 봐서 합격했다. 나는 9월14일자로 동아일보사에 군 입대에 따른 사직원을 내고 이틀 뒤 대전 기술교육단에 가서 공군에 입대했다. 이렇게 해서 견습기자 생활은 채 6개월도 못돼서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나는 1965년 9월 20일에 재입사 형식으로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로 복귀했다. 나는 소속 부대가 서울 근교에 있었고 상당 기간 공군본부에서 근무하는 바람에 군 복무기간에도 입사 동기생들은 물론 선배 기자들과도 자주 어울릴 수 있었다. 그래서 4년 만에 다시 돌아온 편집국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다. 그동안 동아방송국이 개설되고 여성동아가 창간되는 등 기구가 확장되어 편집국, 방송국, 출판국에 후배 기자들이 엄청 불어나 있었다. 나는 외신부에서 인도와 파키스탄을 전공(major)으로, 중공과 소련 등 동구 공산권을 부전공(minor)으로 맡아 바쁘고도 즐거운 나날을 보냈다.

1967년 1월 초 대학동기이자 공군동기생인 문대탄 기자가 견습 9기로 입사했다. 문 기자는 자신보다 5~6년 후배인 입사동기들과 잘 어울리면서 경찰기자로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는 1968년 3월에 문화부로 자리를 옮겨 영화, 연극, 음악, 무용 등 공연예술(performing arts)쪽을 맡게 됐다.

‘기관원들’이 장악한 언론사들

1967년부터 언론기관에 무상출입하던 ‘기관원들’(정보부, 보안사, 치안본부, 경찰 정보요원)이 “이 기사 빼라, 저 기사는 늘려라”며 제작에 노골적으로 간섭하면서 언론자유는 눈에 보이게 위축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1968년 12월 ‘신동아 필화사건’으로 편집 간부 2명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동아일보사는 정권에 굴복하여 천관우 주필 등 3명을 해직시켰다. 한국 언론은 1969년 3선 개헌파동을 거치면서 누구나 알아볼 정도로 변질돼 갔다.

언론에 대한 대학생들의 비난이 거세지는 가운데 71년 3월24일 서울법대생들이 한국 언론을 규탄하며 ‘언론 화형식’을 가졌고, 25일 서울문리대 학생총회가 ‘언론인에 대한 경고장’을 발표한 데 이어 26일에는 서울대생 50여명이 동아일보사 앞에 몰려와 “민중에게 지은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언론화형식을 가졌다. 때마침 편집국에 있다가 2층 발코니로 가서 후배들을 내려다보는 심정이 착잡했다. 24일자 서울법대생들의 ‘대학생 궐기문’은 “백만 학도여 ‘자유의 종’을 난타하자!”고 했다. 서울법대 <자유의 종>! 4·19 학생혁명 때 희생당한 1학년생의 정신을 기려서 만든 종이 아니던가. 4·19 데모대의 꽁무니나 따라다니다가 멀쩡하게 살아남아 명색이 신문기자로독재 권력에 굴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몰골이 비참했다.

언론인의 사명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데 대해 괴로워하던 동아일보 젊은 기자들은 후배 대학생들의 성토에 자극을 받아 1971년 4월15일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결행했다. 사회부 심재택 기자를 중심으로 몇몇 젊은 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이 선언은 당초 편집국에서 전체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발표될 예정이었으나 간부들의 만류와 일부 세력의 방해 때문에 별관 회의실에서 30여명의 기자들만이 모여 선언대회를 결행됐다. ‘동아일보 기자 일동’의 이름으로 발표된 이 선언문은 “언론의 위기가 한계상황에 이르렀음을 통감하고,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언론의 자유가 완전하게 회복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기자의 양심에 따라 진실을 진실대로 보도하며, 정보요원의 사내 출입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젊은 기자들의 이런 움직임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나는 다시 한 번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이번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주동한 심재택 기자는 누구인가? 서울법대 3년 후배이자 4·19날 아침 강의실에 뛰어들어 강의를 중단시키고 선배들을 데모로 이끌었던 1학년생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고교 동기 동창생이 4·19 때 서울법대에서는 유일하게 희생됐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심 기자와 같은 후배들의 희생에 편승해서 아무런 대가 없이 지금까지 선배 노릇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공연예술 담당기자로 일하다

나는 문화부기자, 그것도 공연예술 담당기자라는 사실에서 숨을 곳을 생각해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처음 맡아보는 분야를 카버하기 위해 이것저것 주어 읽는 가운데 막연하게나마 깨달은 바가 있었다. 모든 예술은 체제와 갈등한다는 사실이다. 예술은 자유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체제가 억압적이라면 그 갈등은 더욱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예술을 담당하는 기자는 그것이 문학이든 미술이든 공연예술이든 당연히 체제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당위에 충실하지는 못했지만 공연예술 담당 기자로서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영화와 연극에서는 사회성이 짙은 작품들을 부각시키려 했다. 영화의 경우, 주로 미국영화지만, 할리우드가 아닌 뉴욕 중심의 New American Cinema에 집중했다. 이를테면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반전영화나 인디언에 대한 미 기병대의 잔혹성을 강조한 영화 같은 것 말이다. 프랑스 영화의 경우 ‘누벨바그’(nouvelle vague)쪽을 소개하려 애썼다. 음악과 무용에서는 한국적인 것을 주목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노력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 국민의 자유와 노동권, 생존권 등 국민의 권리 확대에 무슨 직접적인 도움이 된단 말인가? 도대체 뉴 아메리칸 시네마니 누벨바그가 당장 눈앞의 압제와 투쟁하는데서 무슨 힘이 된다는 말인가? 나는 깊은 자괴감(自愧感)에 시달려야 했다. (계속)


** 이 글은 2013년 5월 10일 초판 1쇄로 발행한 〈1975 - 유신 독재에 도전한 언론인들 이야기〉 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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