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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5월 언론투쟁기록[15] 시민 화염병 받아 시커멓던 광주역 앞 KBS 건물- KBS(2) 34년전 보다 병 깊어진 현실, 역사의 죄인 ‘기자’
〈최성민 당시 KBS 기자〉
  • 관리자
  • 승인 2016.06.0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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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자의 길에 들어섰을 때(1979년 11월 KBS 입사)는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총성으로 막을 내리고 ‘서울의 봄’이라는 민주주의의 훈풍이 막 불어오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오랫동안 캄캄하게 얼어붙었던 동토 위로 불어오는 한 가닥 훈풍에 기대를 걸며 들어간 KBS에서의 기자 생활은 그러나 서울시청에 진을 친 계엄사 말뚝들에게 보도원고 검열 심부름 다니기를 ‘수습 과정’의 일부로 삼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런 와중에서 KBS 보도국에서는 ‘KBS의 나아갈 길’에 대한 자유토론회 등 언론자유 수호 운동이 불을 지피고 있었다.

‘계엄’을 무기로 한 전두환의 정권탈취 야욕이 기승을 더해가고, 이에 항거하는 자유언론수호 투쟁의 불꽃이 막 타올라가고 있던 1980년 5월초 내 입사동기들 10명은 관행에 따라 각 지역국으로 1년간 파견되어 내려갔다. 나는 나처럼 전라도가 고향인 김용관 기자와 함께 부산방송국으로 내려갔다. 연고지인 광주로 가고 싶었으나 집이 광주에 있는 고광남 기자(현 YTN감사)와 광주가 고향이면서 결혼을 목전에 둔 고 조달훈 기자(이후 KBS 노조위원장 등의 직책을 역임했으나, 광주민중항쟁 도중 겪은 고문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작고)에게 양보하고 누나와 형이 살고 있는 부산으로 간 것이다.

부산에 간 지 며칠 안 되어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계엄사의 엄격한 보도통제로 광주와 전라도 바깥사람들에게 광주민중항쟁 소식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부산은 예외였다. 일본과 가깝고 일제 컬러 TV가 많이 들어와 있던 부산에는 NHK 등 일본 방송들이 거의 실시간으로 보내주는 ‘광주사태’ 실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태극기 덮인 관들이 셀 수 없이 늘어놓여져 있고, 관 위에 얼굴을 묻고 통곡하는 가족들..., 도청 앞 광장에서 포효하는 광주시민들과 골목까지 쫓아가 어린 학생들을 두들겨 패는 계엄군들, 이를 보도하는 일본 방송 기자들 목소리에도 피가 맺혀 있는 듯했다.

그러나 부산의 분위기는 지극히 평온했다. 얼마 전 ‘부마사태’가 일어났던 도시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시장도 북적거렸고 학원가에서도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부산방송국 보도국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예민한 현안이나 정치적 사안에는 짐짓 무관심한 채 방송(공정보도 문제를 포함한) 외적 문제로 너스레떠는 것에 개인기를 발휘하곤 하는 ‘KBS 문화’가 그때도 지배하고 있었다. 보도국에 설치한 모니터용 TV에 ‘광주’에 관한 일본 방송의 처참한 광경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긴장하거나 놀라는 기색 없이 ‘소 닭 보듯’ 하고 있었다. 일부 의식이 있는 선배들은 그런 보도국 분위기에 눌려 수동적으로 강요되는 얼굴관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심지어 당시 보도국장은 “광주 폭도...” 운운을 서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부산진경찰서 출입기자실은 분위기가 달랐다. 10·26 이후 전국 최초의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발표했고 나도 1기 앞(KBS 공채 5기) 선배이자 나중에 같은 날 강제해직의 칼을 맞은 이희찬, 전종옥 선배와 함께 거기에 참여했다.

1980년 5월 16일 저녁으로 기억된다. 부산방송국 보도국은 부산에 내려온 나와 동기 김용관 기자 등 두 신입사원을 위해 부산 코모도호텔에서 신입사원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코모도호텔 지하 디스코장에서도 컬러TV 화면에 ‘광주학살’에 관한 일본 텔레비전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술에 취한 군중들은 당시 한창 유행이던 디스코 열풍에 휩싸여 있을 뿐이었다. 남녀들이 뒤엉키다시피 하여 디스코 리듬을 타고 있던 밤 12시 무렵, 화장실에 갔다 오던 한 선배가 다급한 목소리로 디스코음악에 묻혀 있던 KBS 부산방송국 보도국 기자들 귀를 찾아다니며 ‘계엄령 전국 확대’가 선포되었다고 알렸다.

이튿날 부산방송국 보도국 분위기는 무거웠다. 계엄 확대의 상황과 그 압박 밑에 죽어가고 있을 광주 시민들을 위한 걱정보다는 혹시 자신들에게 미쳐올지도 모르는 피해를 걱정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 가운데 광주 출신 심상대 선배가 광주 출신 김용관 기자와 신안 출신인 나에게 “광주에 가자!”고 제안했다. 국제신문 기자였던 조갑제가 개인 휴가를 내서 이미 광주에 가서 동료 기자들 데스킹 활동을 하고 있거나 하러 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조갑제는 당시 그만큼 진보적인 기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고 광주 시민을 ‘폭도’라고 게거품을 무는 보도국장이 불붙고 있는 광주쪽을 향해 그쪽 기자 세 사람에게 한꺼번에 휴가를 허락할 리가 만무했다.

우리는 모든 길이 막혀 있는 광주에 가는 방법을 궁리하다가 며칠이 지났다. 그 주 주말에 고속도로 통행이 재개되었다. 우리는 첫차를 탔다. 광주는 이미 ‘진압’이 끝나고 곳곳에 전두환 군대가 갈긴 총탄 흔적과 시민들이 항거한 화염병으로 그을린 흔적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 중 가관은 시민들의 화염병 세례를 받아 시커먼 몰골로 서 있는 광주역 앞 KBS 건물이었다. KBS 기자들과 방송요원 상당수는 계엄군의 선무방송을 위해 상무대쪽으로 ‘끌려’갔다고 했다.

우리 셋은 가까운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신분을 벗고 모이는 곳에서 무슨 말이라도 들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목욕탕엔 사람들도 별로 없었지만 목욕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붙이려 해도 넋을 잃은 양 말이 없었다.

우리가 부산에 돌아온 지 며칠 뒤 부산보안사에서 광주에 함께 갔던 심상대 선배를 불러갔다. 이삼일 뒤 심 선배가 “통닭을 먹고 싶다”는 전화를 해왔다. 면회를 갔더니 앞코와 뒷발 축을 떼어낸 고무신을 신고 반 송장이 된 듯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렇게 한 보름 동안 부산 보안대에 있다 풀려났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가 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KBS 본사에서 ‘강제해직’을 위한 사직서가 인쇄되어 내려왔다. 보도국장 등 몇 명은 ‘이럴 때 잘 보이는 시범’을 보이기라도 하듯이 앞 다투어 사직서에 서명을 했다. 가장 젊고 비교적 패기만만했던 우리 공채기 4명(전종옥, 이희찬, 김용관, 최성민)과 광주에 함께 갔던 심상대 선배는 사직서 서명을 거부했다. 그러나 인쇄된 사직서는 그 뒤에도 세 번이나 더 내려왔다. 사장 이하 모든 사원이 일괄사표를 쓴다고 했다. 나는 병을 얻어 잠깐 서울에 올라간 동기 김용관 기자를 위한 대리서명과 함께 사직서에 서명을 했다. 나중에 일괄사표는 선별수리의 마각을 드러내는 목적을 달성하여 우리 넷은 1980년 8월 24일 한꺼번에 길거리로 내 팽개쳐졌다.

1987년 올림픽 개최를 일 년 앞두고 KBS에서는 자체 필요상 ‘올림픽 요원’이라는 미명하에 해직자들을 재취업시킨다고 했다. 이에 대비해 해직자들의 모임이 새로 떠서 전에 없이 활성화됐는데, 가관이 벌어졌다. 이전 해직자 모임에서는 ‘듣보잡’이었던 사람들이 맹렬한 ‘민주투사’가 되어 두각을 나타냈다. 아나운서 출신 어떤 여성은 거의 날마다 ‘김밥’ 등 먹을 것 선심을 쓰면서 마이크를 잡고 아나운서 장기를 발휘해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는 그 뒤 KBS에서 매일 시사프로그램 앵커를 맡는 등 승승장구하다 그 덕에 집권당 국회의원까지 지내고 중진 반열에 올라 있다. 창간 발의인으로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했던 나는 한 사람이라도 밖에서 KBS 해직의 상징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노조위원장 등을 거치며 계속 한겨레신문에 남았다.

34년 전의 기억을 더듬는 지금, ‘1980년 언론대학살’ 때 갓 수습이 떨어진 막내였던 나는 이미 반백의 정년퇴임자가 되어 있다. 함께 거리에 내몰려서 나를 이끌어주었던 선배들 가운데 돌아가신 분들도 적지 않다. 34년 전과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병이 깊어진 현실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 글에서 나는 자백하고자 한다. 나는 ‘기자’라는 이름의 ‘역사의 죄인’이었다. 10·26 총성 뒤 어렴풋한 기대를 걸고 들어간 KBS에서 계엄군에 보도검열 심부름 다니는 것으로 일을 마치고, 전두환 계엄군에 학살당한 광주 민중의 관들이 즐비한 광경이 쏟아져 나오는 일본 컬러TV 화면 아래 부산 코모도호텔 디스코텍에서 신입사원 환영을 받고, 광주에 총알이 빗발칠 때는 보도국장의 ‘광주 폭도’ 소리를 들으며 아무 소리도 못하고, 나중에 열린 길로 광주에 들어가 그을린 광주의 흔적을 기억에 담은 것 외에 기자로서 아무런 역사적 증언자료를 확보하지 못한 ‘면피용’ 죄를 지었음을 자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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