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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5월 언론투쟁기록[12] 전두환 군부에 치열한 항거, 대학살과 내부 밀고경향신문(1) 기자 대규모 강제해직한 이진희, 장관과 사장 등 승승장구
〈윤덕한 당시 경향신문 외신부 기자〉
  • 관리자
  • 승인 2016.03.0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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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30대 중반의 혈기왕성하던 나도 이제는 70대의 노인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세월의 무상함을 새삼 느낀다. 흘러간 세월과 함께 항쟁 당시의 기억들도 빛바랜 사진처럼 많이 희미해져 갔지만 그때의 그 피 끓던 울분과 불안, 좌절감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제 34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고 각종 기록들을 참고삼아 80년 광주항쟁 당시 경향신문 동료들과 함께 전두환 군부에 항거하여 언론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던 나름대로의 투쟁을 증언하고자 한다.

두환 군부의 대국민 심리전 도구로 전락한 언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피살된 후 12ㆍ12 군사반란을 통해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군부는 사회 각 부문의 민주화 요구에도 불구하고 명분 없는 계엄과 언론검열을 8개월째 지속하고 있었다. 특히 80년 3월 보안사에서 20여 년 동안 대공업무에 종사하던 이상재 준위가 언론검열단에 합류하면서 검열이 한층 더 교활해지고 권력찬탈의 흑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군의 정치개입 명분을 쌓기 위해 각계의 민주화 요구 시위를 사회불안 요인으로 매도토록 유도하고 김대중 씨 등 야당 정치인들이 북한에 오판하지 말라는 경고 성명을 내도 기사화하지 못하도록 검열에서 기사를 삭제했다.

야당 정치인들의 대북한 경고 성명을 기사화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장차 그들을 용공세력으로 몰기 위한 야비한 의도였다. 언론검열을 정권 탈취 수단으로 악용하고자 하는 전두환 군부의 의도가 점점 더 노골화되면서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검열 거부 움직임이 벌어진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이런 가운데 80년 5월 6일 발생한 중앙읿보 장성주재 탁경명 기자에 대한 기관원들의 집단 폭행사건과 이를 기사화한 중앙일보 기사를 검열에서 삭제한 사건을 계기로 마침내 각 언론사들은 언론검열철폐 운동을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경향신문 기자들은 5월 8, 9일 이틀 동안 기협 분회 주도로 국장단과 부장단을 포함해 1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편집국 총회를 열고 경향신문의 보도행태와 관련, 통렬한 자기비판을 하는 한편 언론검열 대응방안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10일 오전 9시 기자일동 명의로 “유신체제에 안주했던 우리 기자들은 이제 계엄체제에 안주하고 있다”고 자책하고 ①계엄을 조속히 해제하고 언론검열을 80년 5월 18일까지 철회하라. ②검열이 계속될 경우 5월 19일부터는 검열에서 삭제된 부분을 공백으로 제작한다. ③기관원의 편집국 출입을 일체 금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결의문 발표와 동시에 편집국 입구에 「기관원 출입금지」표지판을 붙였다. 그 후 며칠 동안 실제로 기관원의 출입은 중단되었다.

착검을 한 수경사 헌병이 24시간 신문사 현관을 지키고 짧은 머리칼에 검은 양복을 걸친 보안사 요원이 편집국을 무시로 드나들던 시절 계엄해제와 언론검열 철회를 날짜를 못 박아 요구한 것은 전두환 군부에 대한 정면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경향신문 기자들이 다른 언론사에 비해 이처럼 분명하고 강경한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기협 분회 가운데 경향신문 분회가 가장 탄탄한 조직력과 투쟁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위 여권 매체로서 이미 만신창이가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경향신문 편집국내에서 명맥이 끊이지 않고 있던 저항정신이 이러한 투쟁력으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 74년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이 통합한 이후 입사한 젊은 통합기 기자들의 자유언론에 대한 열정이 더해졌다. 이들 통합기 기자 30여명은 79년 초부터 통합동지회를 만들어 사회부 고영재 기자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져오면서 경향신문 보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의 개선을 위해 투쟁해왔다. 기협 경향 분회는 80년 3월 기자협회 개편에 대비해 통합기 기자들의 주도로 편집부 김충용 차장을 분회장으로 해서 새롭게 진용을 정비한 상태였다.

시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정국의 연속이었다. 군부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그동안 자제해오던 대학생들의 시위가 5월 13일부터 확산되면서 모두 숨을 죽이고 전두환 군부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당시 외신부 동료 기자들을 비롯해서 기협 분회 집행부원들은 대부분 거의 매일 퇴근 후에도 회사 근처에서 삼삼오오 모여 시국을 개탄하면서 앞으로의 정국 전망과 대처방안을 논의했다. 이때 오갔다는 얘기가 그 뒤 제작거부에 앞장선 경향신문 기자들을 반공법으로 엮는 빌미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월요일인 5월 19일 아침 경향신문 편집국 안은 뭔가 착잡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전두환 군부의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에 항의하는 전남대 학생들의 전날 시위를 의도적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이 발단이 되어 광주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나 전화를 포함해서 일체의 통신이 차단되어 현지 사정을 알 길이 없었다. 외신부의 텔렉스를 통해 긴급뉴스(URGENT)로 광주관련 기사가 들어오고 있었지만 아직은 너무 단편적이라 사태의 전모를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5월 19일 밤 국장단과 부장단을 포함한 경향신문 기자 1백여 명은 편집국 총회를 열고 5월 10일 결의한 대로 검열에서 삭제된 부분을 공백으로 제작하는 방안을 논의하는 한편 이중 50여명은 17일 밤에 있은 기자협회 간부들의 불법적인 연행에 항의해 철야농성을 벌였다. 17일 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동시에 전두환 군부는 대대적인 민주인사 검거에 나서 기자협회 간부들도 6명을 체포했다. 당시 기자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고영재 기자도 이날 밤 집에서 체포되어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 당했다.

5월 20일, 광주에서의 학살극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지만 당시 우리는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광주의 참상을 알려주는 유일한 통로는 외신부의 텔렉스롤 통해 들어오는 단편적인 외신뿐이었다. 우리는 항쟁의 전체 실상은 알 수 없었지만 외신을 통해서 엄청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신문과 방송은 광주의 참상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못하고 계엄군에 저항하는 광주시민을 난동분자, 폭도로 몰고 광주시가 황폐화될 수 있다는 소위 계엄사령부의 협박 포고문만을 앵무새처럼 되뇌었다. 당시 계엄사령부의 이른바 포고문이라는 것은 광주시민을 여타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고립시키고 이간질시키는 보안사식의 심리전 선전문과 같은 것이었다. 언론은 이제 전두환 군부의 대국민 심리전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신문제작에 참여하는 것은 역사에 죄를 짓는 짓이며 따라서 제작을 거부하는 것이 기자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는 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5월 20일 밤, 경향신문 기자 1백여 명은 다시 편집국 총회를 열고 비장한 심정으로 21일부터 평기자 전원이 제작거부에 들어가기로 결의했다.

21일부터 우리 평기자들은 일단 신문사에 출근했다가 모두 편집국에서 나와 집회를 열고 외신에 보도된 광주항쟁 관련 정보를 교환하면서 제작거부 의지를 다졌다. 출입처에 나간 일선 기자들도 기사를 송고하지 않았다. 신문은 각 부별로 부장과 차장 이상 3~4명이 통신 기사를 중심으로 만들어내 발행이 중단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제작거부가 계속되면서 23일부터는 8면이 4면으로 줄고 그나마 기사를 채우지 못해 백면이 절반이 넘는 경우도 있었으며 1판만 발행되기도 했다. 이경일 외신부장은 부장급으로는 유일하게 평기자들의 제작거부에 합류했다.

제작거부에 앞장선 기자들은 광주항쟁 기간 동안 수사기관의 검거를 피해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관을 전전했다. 5월 27일 새벽 나와 표완수, 박우정 기자는 불광동의 한 여관에서 광주 시내에 계엄군이 진입해 ‘폭도’들을 진압했다는 뉴스를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이제 제작거부 운동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진실보도를 위해 투쟁한다는 다소 궁색한 명분을 내걸고 제작에 복귀했다. 당시 언론계는 광주항쟁 기간 동안 군부에 집단적으로 저항한 유일한 세력이었다. 광주가 무너지면서 신문사 편집국은 깊은 좌절감과 함께 공포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전두환 군부가 광주항쟁 기간 동안 그들에게 정면도전한 기자들을 그대로 놔둘 리는 없었다. 광주 다음은 언론계라는 것을 기자들이라면 누구나 감지하고 언제 보복의 칼날이 들어올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기자 대학살과 비열한 내부의 밀고

6월 9일, 전두환 군부의 비수가 마침내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날 오전 9시 반쯤 되었을까. 외신부의 내 자리에서 한참 통신지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7, 8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편집국 안으로 들어와 그 중 두어 명은 국장석으로 가서 국장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누고 나머지는 외신부 쪽으로 와서 홍수원 기자와 박우정 기자를 데리고 나가려했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요원들이었다. 일부 기자들이 연행을 저지하기 위해 그들을 둘러싸고 1시간 가까이 고함을 지르며 실랑이를 벌였으나 두 기자는 결국 편집국 밖으로 끌려 나갔다.

당시에는 경향신문에서 정확히 몇 명이 연행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그로부터 3시간가량 후에 나온 그 날자 석간 경향신문을 보고서야 서동구 조사국장을 비롯해서 8명이 반공법과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연행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서 국장은 사무실에서, 이경일 외신부장과 표완수 기자는 그날 새벽 집에서 잠을 자다가 연행되었고 홍수원 기자와 박우정 기자는 주소지와 실제 거주지가 달라 허탕을 치게 되자 출근 시간 직후에 형사들이 신문사로 들이닥쳤던 것이다.

기협 분회 총무를 맡고 있던 편집부 박성득 기자는 그날 아침 편집부로 넘어온 기사 속에 자신의 이름이 연행 대상자 명단에 끼어 있는 것을 보고 급히 자리를 피하려다가 신문사 현관에서 형사들에게 붙잡혔다. 문화방송에서는 노성대 보도국 부국장과 사회부 오효진 기자가 연행 당했다. 합수부 수사관들은 서동구 국장을 연행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간에 서 국장의 집에 들이닥쳐 영문서적 20여권을 압수해갔다.

합수부는 이들을 연행하는 것과 동시에 이들이 제작거부를 하면서 “월남은 망한 것이 아니라 통일되었다”느니 “고려연방제는 통일의 밑거름이다”라는 등의 악성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국론통일과 국민적 단합을 저해한 혐의가 농후해 부득이 8명의 현역 언론인을 연행했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날 석간신문은 모두 이 기사를 1면이나 사회면 사이드 톱으로 보도했다.

편집국 안은 공포와 경악으로 뒤숭숭했다. 전두환 군부가 광주항쟁을 진압하고 나면 항쟁 기간 중 제작거부 운동을 벌였던 언론계에 보복의 칼날을 들이댈 것으로 예상은 하고, 어느 정도 각오도 하고 있었지만 설마 형사들이 편집국 안에 직접 들어와서 기자들을 잡아가리라고까지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래도 신문사고 기자들인데’라는 일종의 특권의식 같은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살벌했던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에도 형사들이 편집국에 들어와 기자들을 잡아간 전례는 없었다.

그런데 전두환 군부는 광주항쟁 기간 중 가장 격렬하게 제작거부 운동을 벌였던 경향신문을 찍어 편집국을 물리적으로 짓밟는 시범을 보였던 것이다. 제작거부에 앞장섰던 경향신문 기자들에게 반공법 위반죄를 뒤집어 씌워 구속한 것은 전 언론계에 대한 경고였으며 동시에 얼마 후 닥쳐올 대대적인 언론인 강제해직의 전주곡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합수부는 어떻게 제작거부에 앞장섰던 기자들을 그토록 족집게처럼 집어낼 수 있었으며 ‘고려연방제 찬양 운운’하는 반공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씌울 생각을 해낼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 경향신문에서 가장 격렬하게 제작거부 운동을 벌였던 부서는 외신부였다. 그리고 ‘월남 통일’이니 ‘고려연방제 찬양’이니 하는 발언을 한 것도 외신부 기자들인 것으로 수사기관이 지목했다.

내부에서 제작거부 주동자를 찍어주고 그들이 이런 ‘불온한’ 언동을 하고 다닌다고 밀고하지 않았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 남영동과 군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이런 내부 밀고의 혐의는 여러 차례 감지되었다. 언론계에 대한 환멸과 절망을 뼈저리게 느낀 것이 이때였다.

서동구 조사국장은 남영동으로 연행당한 직후 수사관으로부터 “이번 사건은 수사기관의 인지가 아니라 신문사 내부의 첩보에 의해 조사하게 되었으니 협조해주기 바란다”는 말을 들었다. 수사관은 그 뒤 조사과정에서도 서 국장에게 “신문기자 사회의 의리와 풍토가 그 정도 수준이냐”고 비웃는 말을 던졌다고 한다.

서 국장은 수사관으로부터 반공법 위반과 유언비어 유포 혐의 외에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연계시켜 김대중 씨를 지지하는 사내 세력을 선동해 검열거부 운동을 사주했다는 혐의도 받았다. 반공법 부분은 워싱턴 특파원으로 있을 때 구입해 갖고 있던 영문서적 가운데 공산주의 경제이론을 해설한 책 두 권과 베트남의 게릴라 전법을 소개한 책을 문제 삼았다. 또 79년 9월 경향신문의 보도태도와 관련 편집국장의 사퇴와 사실보도에 충실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주도했다가 편집국에서 조사국으로 발령난 통합기의 고영재, 표완수 기자와 연수실로 밀려난 박우정 기자 등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고려연방제 등에 동조하는 발언을 했다는 혐의도 추궁 받았다.

유언비어 유포 혐의는 광주항쟁 무력진압 다음날인 5월 28일 조사국장실에서 이경일 외신부장과 광주 사망자 숫자에 관해 “현지인들이 1천명 죽었다고 본다”는 외신보도에 대해 이야기 했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씌워진 혐의는 모두 완전히 날조된 것이다. 서 국장은 김대중 씨와 일면식도 없는 처지였다. 경향신문 내의 누군가가 제작거부에 앞장선 기자들과 서 국장을 제거하기 위해 날조된 첩보를 수사기관에 제보했음에 틀림없었다.

짧게는 5, 6년에서 길게는 20년 넘게 같은 직장에서 한 솥밥을 먹으며 동고동락해온 동료와 후배 기자들에게 터무니없이 날조된 혐의를 씌워 수사기관에 밀고를 한 것이다. 사회의 비리를 고발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사회의 목탁이니, 무관의 제왕이니 하고 뽐내던 소위 ‘언론인’이라는 자들이 뒤에서 이런 비열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어떤 직장이나 조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인간성 파탄의 극치가 바로 80년 6월 이 나라 언론계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오죽했으면 수사관이 “신문기자 사회의 의리와 풍토가 그 정도 수준이냐”고 비아냥댔겠는가. 경향신문과 문화방송 기자 8명의 구속은 80년 7,8월의 언론인 대학살극을 여는 서막이었다. 그리고 그 학살극은 내부의 밀고로부터 촉발되었다. 밀고 혐의자들은 그 공으로 전두환 군사정권 내내 신문사 편집국장과 사장, 국회의원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가장 반언론적인 인격 파탄자들이 이성과 양심의 소리를 대변해야 할 언론계의 상층부를 독점했던 것이다.

대학살 이후 살인마 향해 낯 뜨거운 충성경쟁

보안사가 해직 언론인의 명단을 작성하고 있을 때 언론계 일각에서는 벌써 대규모 해직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 진원지는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이었다. 당시 이 회사의 사장은 유정회 의원을 지낸 유신 언론인 출신으로 전두환과 육사 11기 입학동기인 이진희가 맡고 있었다. 그는 서울신문 주필로 있으면서 12ㆍ12 반란 이후 서울신문에 전두환 군부를 찬양하고 군부집권의 불가피성을 강조한 글을 쓴 것이 눈에 띄어 6월 25일 주식회사 문화방송 경향신문 사장으로 전격 영전하게 되는데 취임하는 날 해직사태를 예고하는 폭탄발언을 한다.

그는 취임사에서 “언론인은 국가관이 투철해야하며 체제의 수호자가 되어야한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 물러나야 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7월 10일에는 “반국가 언론인은 정화하겠다”고 선언했다. 7월 14일에는 서울신문 편집부국장 정구호가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왔다. 전두환 군부의 대리인들이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을 완전히 점령한 셈이었다. 곧이어 전 직원을 대상으로 사표를 제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나는 사표 제출을 완강히 거부하고 차라리 명예롭게 해직시키라고 요구했다.

부국장까지 나서서 “그렇지 않아도 당신이 주목받고 있는데 이러면 다친다”면서 간곡한 어조로 사표 제출을 종용했다. 할 수 없이 편집국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사표를 써냈다. 그리고 7월 18일, 아직 다른 언론사들이 기자 해직과 관련해 어떤 구체적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있을 때 차장 이하 56명의 해직자 명단이 나붙었다. 해직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조금은 어리둥절한 기분이었다. 이틀 후인 7월 20일 오전 11시쯤, 내 이름 한 명이 적힌 해직 발령이 벽에 붙었다고 누군가 알려주었다. 짐은 이미 싸둔 상태였다. 내 눈으로 해직 발령을 확인하고 자리로 돌아와 짐을 챙겨들고 부장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부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그래 가봐”라고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편집국을 나설 때 안됐다는 표정으로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준 동료는 문화부의 여기자 한 명뿐이었다.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이 이처럼 다른 언론사에 앞서 대량 해직을 자행한 것은 전두환 군부의 언론인 숙정 계획을 미리 안 이진희의 선수치기였다. 기자들의 목을 치면서 전두환 군부에 과잉 충성한 공로로 이진희는 82년 문공부장관, 86년에는 서울신문 사장을 하는 등 전두환 집권기간 내내 언론 관련 요직을 지냈다.

언론인 대학살로 이제 언론계에서는 권력에 대한 저항의 싹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언론의 체질은 완전히 체제순응적으로 바뀌었다. 학살의 공포에서 살아남은 기자들에게는 위로금조로 특별 보너스가 지급되었다. 뒤이어 이번에는 전두환과 신군부에 대한 언론의 충성 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신군부의 시책을 무조건 지지하고 전두환에 대한 날조된 찬양 작업이 전개된 것이다. 이번에도 깃발을 들고 선두에 나선 것은 이진희가 사장으로 있는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이었다. 이진희는 직접 자신이 분장사까지 데리고 국보위로 찾아가 전두환을 새 시대의 영도자로 치켜세우는 인터뷰를 했다. 이어 경향신문으로 하여금 8월 19일부터 4회에 걸쳐 ‘새 역사 창조의 선도자 전두환 장군’이라는 시리즈를 전면에 싣게 해 그를 ‘새 시대의 새 영도자’로 치켜세우며 차기 대통령으로 부각시키도록 했다. 이 기사를 시발로 모든 신문들이 ‘인간 전두환 시리즈’를 다투어 게제하며 온 국민으로부터 살인마로 저주받던 학살범을 향해 낯 뜨거운 충성경쟁을 벌였다.

어디 그뿐인가. 사치와 경망한 행동으로 끊임없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렸던 그의 처 이순자에 대해서도 전두환에 못지않은 미화와 아첨 기사를 실었다. “이 여사는 가계부와 씨름하는 군인의 아내들에게 식료품비, 교육비, 난방비 등을 예산대로 딱딱 봉투에 갈라 넣고 그 한도 내에서만 지출하면 적자를 줄일 수 있다는 가계의 지혜를 들려주기도 하고 오이지 등 밑반찬을 맛있게 담그는 비결을 알려주기도 했다”

전두환은 언론의 이 같은 충성경쟁과 여론조작을 발판으로 80년 9월 1일 최규하를 밀어내고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권력을 찬탈하기 위해서는 먼저 언론을 장악해야 된다는 전두환 군부의 작전은 일단 들어맞은 셈이었다.

참고자료

경향신문 80. 5.10~8. 24
경향신문 50년사
한국언론바로보기 100년 (다섯수레, 2000)
80년 5월의 민주언론 (나남출판, 1997)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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