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한 ‘혼용무도(昏庸無道)’는 2015년에 대통령 박근혜가 한국사회를 얼마나 절망적인 상태로 몰고 갔는지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가 더할 나위 없이 세상을 어지럽혔다는 것이다.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 후보로 5개를 놓고 교수 88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무려 524명(59.2%)이 ‘혼용무도’를 선택했다고 한다. ‘혼용무도’를 추천한 이승환(고려대 교수)은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연초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로 온 나라의 민심이 흉흉했으나 정부는 그것을 통제하지 못하고 무능함을 보였다. 중반에는 여당 원내대표에 대한 청와대의 사퇴 압력으로 삼권분립과 의회주의 원칙이 크게 훼손됐고, 후반기에 들어서는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으로 국력의 낭비가 초래됐다.”

메르스 대란이 국민경제에 큰 악영향을 끼치는 동시에 대중의 심리를 공황 상태로 몰아넣은 사실은 새삼 재론할 필요도 없다. ‘무능하고 어리석은 군주’는 메르스 대란을 예방하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을 향해 단 한 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다. ‘국정화’라는 이름의 역사쿠데타는 지금 밀실에서 진행되고 있다. 박근혜는 국민 대다수가 반대하는 국정화가 ‘올바른 역사 교육의 길’이라는 강변을 거두어들이지도 않았다. 행정부 수장인 박근혜는 최근 자신의 ‘관심법안들’을 직권상정으로 처리해 달라고 국회의장 정의화를 겁박하고 있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관련 단체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노동악법(새누리당이 노동5법이라고 부르는 것)’, 가뜩이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국가정보원에 ‘여의봉’을 쥐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는 테러방지법안 등을 하루라도 빨리 직권상정 하라고 청와대 정무수석을 정의화에게 보내 노골적인 압력을 가했다. 대한민국 헌법은 입법·행정·사법부의 삼권 분립을 명시하고 있는데 행정부의 수장이 1970년대 유신독재 시기처럼 입법부를 ‘시녀’로 만들려고 거친 언사를 서슴지 않고 쏟아내는 것을 보고 ‘입법권 침탈’이라고 비판하지 않을 수 있는가? 정의화는 청와대 고위관리와 새누리당 지도부, 그리고 이른바 ‘친박’을 통한 박근혜의 압박에 대해 “초법적 발상 행하면 더 큰 혼란이 온다”고 경고했다.

그는 ‘국가비상사태’를 주장하며 법안 직권상정을 요구하는 집권세력에 대해 “국회를 행정부의 거수기로 취급한다”고 비판하는 한편 “차라리 성을 갈지언정 직권상정은 하지 않겠다”고 단호한 어조로 밝혔다. 새누리당 출신으로서 의장 임기 직전에 당연히 복당해야 할 그가 보이는 결의는 참으로 인상적이다. 그의 강골(强骨)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과거에 여러 번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2014년 8월 17일에 열린 ‘장준하 39주기 추모식’에서 그가 다음과 같이 단언한 것이었다.

“저는 신경외과학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입니다. 시신 감식에 관해서는 유명한 법의학자들 못지않게 경험을 쌓아 왔습니다. 저보다 더 많은 두개골 외상 환자를 치료한 의사는 없다고 자부합니다. 2011년 8월 폭우 때문에 무덤에서 밖으로 나온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 사진을 보는 순간 타살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장준하는 유신독재자 박정희가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한 언론인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장준하의 죽음’에는 언제나 박정희 정권 관련설이 꼬리를 물었다.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정의화가 ‘장준하 타살’을 공언한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니었다. 그 이후 그가 국회의장으로서 수행한 직무는 합리적이고 중립적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무능하고 어리석은 군주’와는 참으로 대조적이었던 것이다.

박근혜는 지난 11월 14일 제1차 ‘민중총궐기’ 때 경찰의 물대포 조준사격을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는 68세 농민 백남기와 가족에 대해서도 전혀 사죄를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혼용무도’의 정수를 보여준 것이다.

미군이 서울 용산기지에 2009년부터 치명적 살상무기가 될 수 있는 탄저균을 15 차례나 반입한 사실이 최근 밝혀졌는데도 박근혜는 “한국의 주권을 무시하고 어떻게 그렇게 위험천만한 짓을 저지를 수 있느냐”고 미국 정부에 항의하지 않았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대통령으로서 직무유기를 저지른 셈이다.

<교수신문>이 발표한 올해의 사자성어 2,3,4,5위도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집권세력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사시이비(似是而非)’-“겉보기에는 맞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사자성어를 추천한 석길암(금강대 교수)은 이렇게 해설했다.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를 비롯한 최근 정부 정책을 보면 국민을 위한다거나, 공정하고 객관적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근거를 왜곡하거나, 사실을 날조해 정당성을 홍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국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갈택이어(渴澤而漁)’-“못의 물을 모두 퍼내 물고기를 잡는다.”

‘위여누란(危如累卵)’-“달걀을 쌓은 것 같이 위태로운 형태.”

‘각주구검(刻舟求劍)’-“판단력이 둔해 융통성이 없고 세상일에 어둡고 어리석다.”

이렇게 무능하고 아둔한 정권에 지혜롭게 대응하는 작업은 정의화 같은 합리적 지도자만의 힘으로는 버겁다. 야권이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해 대연합을 이루어 내년 총선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책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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