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협주곡 9번 Eb장조 ‘죄놈’(Jeunehomme)
(피아노 미츠코 우치다, 제프리 테이트 지휘 영국 실내 관현악단)
▶ https://youtu.be/k-wbyyI-380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 곡을 처음 들은 것은 중학교 시절이었습니다. 돌아가신 누나가 남겨 놓은 LP 컬렉션에 있었지요.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연주로, 피아노협주곡 8번 C장조 K.246과 론도 A장조 K.386이 함께 들어 있는 데카 레이블의 원판이었죠. 첫 주제에서 천국이 열리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현악 파트의 트레몰로는 사춘기에 접어드는 꼬마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고요. 수줍은 듯한 2주제에 이어지는 상쾌한 불협화음에서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이 곡을 들을 때 행복하다는 걸 숨기고 싶었지요. 모차르트를 사랑한다는 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지요.

70년대만 해도 이 곡은 그리 주목받지 않았고, 어떤 음악 해설서도 이 곡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 연구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고 새로운 발견과 평가가 계속되고 있었으니까요. 수많은 평론가들과 음악애호가들이 이 곡을 높게 평가하기 시작한 건 한참 뒤였습니다. 이 곡은 이제 27곡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중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히며, 피아노 협주곡의 역사에서도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9번 Eb장조 K.271은 놀라운 작품입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 밑에 있을 때인 1777년 1월 작곡했는데, 봉건 시대 작품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유분방하지요. 규모도 이전 작품들의 두배에 육박합니다. 1악장 시작 부분, 오케스트라가 팡파레를 연주하면 독주 피아노가 화답합니다. 이렇게 곡 첫머리에 독주 악기가 등장하는 것은 협주곡 역사상 이 곡이 최초입니다. 오케스트라와 독주자가 대등하게 대화하며 발전하는 협주곡의 낭만적 이상형은 바로 이 곡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러한 대담한 출발은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4번 G장조와 5번 <황제>에서야 다시 나타나지요.

훗날 모차르트는 빈에서 자유음악가로 활약하며 수많은 피아노협주곡으로 기량을 뽐내게 되는데, 이 곡은 후기 협주곡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걸작입니다. 베토벤의 <에로이카>가 교향곡의 역사에 혁명을 가져왔다면 모차르트의 이 곡은 피아노 협주곡의 혁명이라 할 만 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이 곡을 ‘모차르트의 에로이카’라 부르기도 합니다.

1악장 알레그로의 첫 주제는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듯 생기있고 아름답습니다. 제2주제는 수줍은 듯 미소 짓다가 행복한 함박웃음으로 발전한다. 오케스트라의 서주가 끝날 즈음 오케스트라의 속삭임에 피아노가 트릴로 화답하는데, 이렇게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대화를 나누는 건 그때까지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참신한 발상입니다. 오케스트라의 팡파레에 피아노가 한 번 더 화답한 뒤 음악은 자유롭게 발전합니다.

링크 2분45초 지점의 경과구(經過句)에서도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대화를 들을 수 있지요. 3분22초 지점, 제2주제를 오보에가 연주할 때는 피아노가 반주를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악기가 솔로를 맡고 피아노가 반주하는 것도 협주곡 역사상 이 대목이 처음입니다. 전개부의 폭과 깊이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4분55초 이후 제1주제가 발전하는 부분은 모차르트가 훗날 쓴 3대 교향곡의 깊이를 예감케 하지요. 팡파레의 주제가 단조로 변형되리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요? 5분39초 지점부터는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와 대등한 규모로 활약합니다. 재현부로 들어가기 직전에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아예 역할을 바꿔서 대화를 나눕니다. 피아노가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모방하는 기법은 베토벤에서 출발하여 프란츠 리스트에서 일반화됐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모차르트의 이 협주곡에서 처음 나타난 것입니다. 이 협주곡은 19세기 낭만시대 협주곡을 예감케 하는 자유분방함을 갖고 있습니다.

C단조의 2악장 안단티노는 깊은 비탄의 정서를 노래합니다. 베토벤 <에로이카> 교향곡의 ‘장송행진곡’처럼 어두운 C단조로 돼 있는데, 잘츠부르크에서 만든 곡으로서는 아주 이례적입니다. 짙은 비애 속에 검은 강처럼 흘러가는 제1주제에 이어 행복했던 옛날을 회상하는 듯한 제2주제가 등장합니다. 피아니스트 강충모는 MBC와의 인터뷰에서 이 주제를 가리켜 “두 눈엔 눈물이 고여 있는데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한 바 있지요.

3악장 프레스토는 화려한 피아노의 질주로 시작한다. 3악장은 크게 봐서 론도 형식이지만 중간에 메뉴엣과 4개의 변주곡이 삽입되어 있는 특이한 형식입니다. 예상을 뛰어넘는 형식 파괴라고 할 수 있지요. 음악은 대담하고, 화려하고, 심각하고, 우아하고, 장엄하고, 섬세하고, 당당합니다. 이 곡은 모차르트가 각별히 공을 들여서 작곡한 게 분명합니다. <모차르트, 그 인간과 음악>을 쓴 알프레드 아인슈타인은 이 곡을 가리켜 ‘기념비적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온전히 모차르트 자기의 모습이다. 대중에게 영합한 작품이 아니라 독창성과 대담성으로 대중을 휘어잡으려 한 작품이다.” (Alfred Einstein, , Oxford University Press, p.294)

모차르트가 이러한 걸작을 쓰도록 영감을 준 사람은 누구일까요? 프랑스의 피아니스트 빅투아르 죄놈(Victoire Jeunehomme, 1749~1812),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모차르트보다 7살 연상인 죄놈은 모차르트 아버지의 친구인 발레 교사 장 조르쥬 노베르의 딸로, ‘뛰어난 피아니스트’라고 알려져 있을 뿐, 더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습니다. 그녀는 1776년말 잘츠부르크를 방문했고, 모차르트는 그녀를 위해 1777년 1월 이 곡을 완성했습니다. 졸저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2006)에서는 “모차르트가 죄놈에게 잘 보이려고 꽤나 애를 쓴 것 같다”고 농담조로 언급했지만, 실제 그녀가 어떤 연주자였길래 모차르트에게 이처럼 강력한 영감을 주었는지 알려 줄 더 이상의 정보는 없습니다. 모차르트의 편지에 두 번 그녀의 이름이 나오지만 그 뿐이지요. 아인슈타인 또한 안타까움을 표하면서 “그녀는 전설적인 인물일 뿐”이라 했습니다.

1777년 1월 죄놈의 독주로 초연됐고, 그해 10월 4일 모차르트 자신이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놀랍고 독창적인 이 9번 Eb장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출판업자들은 완전히 새로운 이 음악을 대중이 좋아할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곡의 출판을 망설였습니다. 모차르트 사후인 1793년에야 비로소 출판됐고, 자필악보는 베를린 도서관에 있습니다. 자유 음악가로 거듭나기 전의 작품이지만, 모차르트는 이 곡에서 이미 봉건 시대의 속박을 훌쩍 뛰어넘어 자유로운 음악혼을 불태우고 있었습니다.

* 모차르트의 초기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은 모차르트가 평생 작곡한 음악 장르였습니다. 4살 때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하는 모습을 아버지와 친구 샤흐트너가 목격했다고 하지만, 그저 작곡하는 흉내를 낸 거에 불과하겠지요. 1번부터 4번까지는 11살 때 호나우어, 라우파흐, 에카르트, 쇼베르트의 작품을 공부 삼아 편곡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모차르트의 작품이 아닌 셈이죠. K.107에 묶여 있는 3곡의 쳄발로 협주곡도 16살 때인 1772년, 요한 크리스찬 바흐의 작품을 편곡한 ‘습작’입니다. 모차르트가 본격적으로 피아노협주곡을 쓰기까지 기나긴 수업 기간을 거쳤음을 알 수 있지요.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첫 피아노 협주곡은 5번 D장조 K.175로, 17살 되던 1773년 12월에 썼습니다. 이 곡에 대단한 애착을 갖고 있었던 모차르트는 빈에 정착한 뒤 좀 더 단순하고 알기 쉬운 3악장 론도를 새로 써서 연주했습니다. 이 론도 D장조 K.382는 칼 하인츠 로츠 감독의 영화 <모차르트를 찾아서>(Looking for Mozart)에 나오지요. 하르타 마을의 고아원 어린이들이 드레스덴 로열 오케스트라와 음악대결을 벌이게 되는데, 이때 연주할 론도 D장조의 악보를 구하기 위해 모차르트를 찾아갑니다. 주인공 트리나는 모차르트를 만나기 위해 남장을 하기도 하지요. 어린이들이 이 곡을 익혀나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묘사한 영화에 바로 이 론도 D장조가 나옵니다.

론도 D장조 K.386 (피아노 알프레드 브렌델)
▶ http://youtu.be/t_tDfnYVHMY (QR코드를 스캔하거나, 링크를 클릭하시면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6번 Bb장조 K.238와 8번 C장조 K.246는 사랑스런 작품이지만 아직 그 시대 전통의 한계 안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F장조 K.242는 로드론 백작부인과 두 딸을 위해 쓴 화려한 작품으로, 요즘은 세 명의 거장이 한데 어울리는 특별한 경우에 아주 가끔씩 연주될 뿐이지요. 10번 Eb장조 K.365는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으로, 누나 마리아 안나와 함께 연주하기 위해 작곡했습니다. 한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대화가 재미있지만,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은 이에 더하여 두 피아니스트 사이의 대화도 있기 때문에 내용이 한결 더 풍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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