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언론역사 80년언론투쟁사
80년5월 언론투쟁기록[8] 언론투쟁, 강제해직, 양심적 자퇴까지-동아일보ㆍ동아방송 (1) 〈전진우 80년 동아방송 기자〉
  • 관리자
  • 승인 2015.11.19 14:16
  • 댓글 0

아침은 아직 오지 않았다. 어둑새벽이었다. 김성진 문공부 장관이 녹색 칠판에 백묵으로 ‘朴正熙 大統領 有故’라고 썼다. 1979년 10월 27일 오전 4시 20분께였다. 실내로 기어들어온 검푸른 새벽빛을 받아 어둔 색을 띤 칠판에 백묵으로 쓰인 흰 글자는 돋을새김을 한 듯 생경해보였다.

서리처럼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누군가 물었다. “유고가 무슨 의미입니까?”또 다른 누군가 뒤이어 물었다.“대통령께 변고가 생긴 겁니까?” 허우대가 큰 장관이 무겁게 답했다. “지금은 아무 말씀도 드릴 수 없습니다. 현재 시각 정부 발표는 이것이 답니다.”몇몇 질문이 힘겹게 이어졌으나 장관은 등을 돌렸다.

순간 동아방송 전진우 기자는 온몸으로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박정희가 죽었다’그는 신음했다. 그러나 신음이 말이 되어 나올 수는 없었다. 주어진 팩트는‘有故’일 뿐이었다. 입사한지 만 3년이 채 안 되는 경찰 출입기자가 맞닥뜨리기에‘대통령의 유고’는 너무 엄청난 사건이었다.

야근으로 서울 시내 경찰서를 돌고 자정이 지나 회사로 돌아온 그는 책상 위에 깔아놓은 매트리스에서 담요를 덥고 새우잠을 잤다. 그를 깨운 것은 보도국을 울린 전화벨 소리였다. 차장급인 당직 데스크는 어젯밤 늦게 아침 5시 뉴스 기사를 올려놓고 귀가한 모양이었다.

“문공부에서 중대발표가 있다는데, 빨리 기자 보내라는데.”보도제작국 야근기자가 그에게 말했고, 그는 등 떠밀리듯 황망하게 중앙청 안 문공부로 달려왔던 참이었다.

회사에 전화를 걸자 당직 데스크는 그 새 보도국에 나와 있었다. “생방송 물릴 테니 그냥 두 번 읽으라구!”그는 같은 내용을 두 번 읽었다. “정부 대변인 김성진 문공부 장관은 오늘 새벽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를 발표했습니다. 유고의 자세한 내용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정부 대변인 김성진 문공부 장관은------.” 얼마나 지났을까. 중앙청을 출입하던 남찬순 기자가 헐레벌떡 달려와 그와 교대했다.

어둠이 벗겨지는 새벽거리, 중앙청 앞 세종로에 새벽방송을 들었는가, 흰옷을 입은 노인들이 한둘 모여들고 있었다. 그의 눈에 그들은 임금을 잃은 조선의 백성 같아 보였다. 문득 뭔가 모를 불길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쳐갔지만‘대통령 유고’의 역사적 현장에서 이듬해 8월 강제해직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운명은 알지 못했다.

동아방송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 결의

‘10ㆍ26 사태’ 직후부터 동아방송의 몇몇 중견ㆍ소장 기자들은 은밀히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유신독재로 강요되었던 침묵의 치욕을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다는 공감은 신속히 이루어졌다. 1979년 11월 18일. 일요일이던 이날 저녁, 해외부 선임이었던 백환기 기자의 서울 송파구 신천동 아파트에 15명의 기자들이 모였다. 이들은‘10ㆍ26’이후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 우려를 표명하고 언론자유에 대한 결의를 하자고 논의했다. 그러나 막상 집주인인 백 기자가 빠져 결의는 다음으로 미루어졌다. 공교롭게도 백 기자는 그날 오후 가까운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해 급히 병원으로 가는 바람에 자기 집에서 열린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다.

사흘 후인 11월 21일 밤, 기자들은 용산구 동빙고동 김근 기자(사회문화부) 집에 다시 모였다. 그들은 경찰을 출입하던 서정훈ㆍ박종렬 기자가 준비해온 초안을 바탕으로 선언문을 작성했다. 몇몇 중견 기자들은 계엄 하에 너무 위험한 일이라며 선언문 채택에 반대했으나, 다수 소장기자들은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1979년 11월 22일, 동아방송 기자 전체의 이름으로‘자유언론 실천을 위한 결의’가 발표되었다. “절대 권력자의 극적 퇴장을 몰고 온 10ㆍ26 사태 이후 국내의 여러 상황들은 큰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언론자유에 대한 어떠한 방향 설정도 보이지 않은 채 현재의 언론은 제도언론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나락을 헤매고 있다”로 시작한 선언문은 기자의 양심과 이성의 명령에 따라 성실하게 기사를 취재하고 편집하며 보도할 것을 결의했다.

동아방송 기자들의‘자유언론 실천을 위한 결의’는 10ㆍ26 이후 언론계에서 처음으로 나온 언론자유 선언으로 그 후 1980년 봄까지 들불처럼 타오르던 언론자유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동아방송 기자들의 자유언론 선언은 누구보다 동아일보 기자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경영진과 편집국 간부들은 보도국에서 시작된 언론자유운동의 불씨가 편집국으로 번지는 것을 우려해 기자들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12ㆍ12 반란’으로 신군부의 권력 야욕이 극명히 드러나면서 시국은 급변하였고, 기자들 또한 급변하는 상황을 불안한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자유언론 선언

해가 바뀌면서 편집국 기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회부 심송무 기자와 경제부 김용정 기자를 중심으로 정치부 사회부 외신부의 중견ㆍ소장 기자들이 비밀리에 회합을 가졌다. 그 첫 결실은 1980년 3월 19일, 편집국에 뿌려진 유인물이었다.

기자들은 유인물에서“그동안 검열과정에서 드러난 설득력 잃은 검열의 사례를 유형별로 보면 특정 정치인에 대한 보도의 집요한 통제, 정치적 상황전개에 대한 편향보도 강요, 경제 부조리 및 노사문제에 대한 지나친 규제, 학원 자율화에 관련된 기사의 전면 삭제, 특정 재벌기업이나 국가기관에 대한 비판적 보도금지 등의 실례가 허다하다. 또 동일한 내용의 보도에 대해서도 각 언론매체마다 적용하는 검열기준이 형평을 잃고 있는 사례도 적지 않게 노출되어 왔다”며, 언론자유 실천의 핵심이 검열철폐운동에 있음을 분명히 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검열철폐 주장은 신군부를 긴장시켰고, 압박을 받은 회사 경영진과 간부들은 기자들을 상대로 회유와 설득, 방해 공작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한번 불붙은 언론자유운동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4월 들어 일단의 대학생들이 편집국에 들어와‘언론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공개장’을 낭독했다. 젊은 기자들은 자조하고 분노하며 자유언론을 향한 의지를 가일층 다져나갔다.

각 부서 대표들은 비밀 회합을 거듭하였고, 4월 15일 중구 다동 맥주집‘보리밭’에 모여 선언문 작성 소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거사에 착수했다. 그리고 이틀 후인 4월 17일 오전 9시, 기자들은 마침내 편집국 단독의 기자 총회를 개최하는데 성공했다. 이날‘자유언론을 위한 선언문’이 발표됐다. 김재홍 기자(외신부)가 초안을 잡고, 강성재 기자(정치부)와 김용정 기자(경제부)가 데스크를 본 선언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자유언론을 위한 선언문

민족의 해방과 4월 혁명이래 최대의 변혁기를 맞은 새 시대의 문턱에서 우리 동아일보 기자 일동은 현시국과 언론 상황에 관련하여 역사의 방향을 가늠하는 일단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한다.
민주주의란 국민이 원하는 정권을 선택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 근본원리이며 이의 실현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개진 없이 불가능하다.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통로가 되고 정치권력 및 경제 사회 제반에 대한 국민의 여론을 수렴해야 될 우리는 민주주의의 파수꾼으로서 무거운 책임과 사명을 통감한다.

언론자유는 모든 자유와 권리의 기본이며 민주발전의 요체다.
민족사의 발전이나 국리민복, 나아가 통일과업도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없이는 이룩될 수 없다. 개개인의 의사가 자유롭게 교환되지 못하고 약자의 항변이 묵살된 채 강자의 논리만이 통해온 사회가 얼마나 불신을 심화시키고 국민적 일체감을 저해했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연면한 민족사에 얼룩을 남겼던 암울한 과거를 상기하며, 권력의 횡포로 민중의 자유가 억압되고 언론의 본질마저도 왜곡됐던 아픔 또한 기억한다.

체제유지를 지상목표로 삼아왔던 권력으로부터 숱한 제약을 강요당한 우리는 긴 세월동안 언론의 참모습이 잠식되는 현장에서 스스로 무력했음을 시인한다.

우리는 또 언론의 자유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끈질긴 투쟁의 소산임을 믿으면서도 자유언론의 구현을 위해 과감하지 못했음을 자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거스르는 거센 역류 속에서도 자유언론 및 민주주의를 향한 꿈과 의지를 꺾지는 않았다.

오늘 이 순간 우리는 자유를 제약하여 경직된 질서를 정착시켰던 구체제하의 시련을 딛고 일어나 어떤 압력이나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보도에 충실할 것이며 자유와 사회정의실현에 앞장서고자 한다.
10ㆍ26 사태 후 우리는 대망의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해 의연한 자세를 보여 왔던 국민들과 더불어 시국의 전개를 주시해왔다.

이에 본격적인 민주화 작업이 역사의 필연이라고 판단하는 우리는 과도정부가 민주적 공동체 건설을 위해 구체적 통치발상을 버려야 할 것이며, 비상계엄은 하루빨리 해제돼야 할 것임을 주장한다.
이와 함께 오늘 우리들의 선언은 민주주의 구현을 위해 정론을 수호하려던 지금까지의 자유언론운동과 맥락을 같이함을 확인한다.

구체제 하에서 자유언론실천운동이 타율적으로 이간 분열되어 동료 간의 불신, 질타, 매도, 자조의 풍조가 만연했던 비극이 더 이상 반복돼서는 안 된다.

언론자유운동은 이제 역사의 물결 속에 다시금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 하며. 해직언론인들의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기를 바란다. 더 이상 좌절할 수 없는 자유언론실천을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결 의
一, 우리는 국민의 알권리와 언론의 알릴 의무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며, 검열 사찰 압력 간섭 등 언론에 대한 모든 타율로부터 벗어나 자유언론을 실천한다.
一, 우리는 일부 지식인과 언론인들의 기회주의적 지식오용이 국가와 사회에 해독을 끼쳤던 구시대의 타락상에 유의하면서 곡필아세(曲筆阿世)를 엄중 경계하고 정론을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자세를 가다듬고 동지애로 뭉친다.
一, 우리는 해직기자들이 벌였던 자유언론실천운동의 근본정신에 원칙적으로 공감하며 이들의 문제가 합리적이고 긍정적으로 해결돼야 한다는 데 뜻을 모은다.
一,이와 같은 우리의 결의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부당한 연행 구속 제재조치가 발생할 때는 모든 기자가 공동대처 한다.

1980년 4월17일
동아일보 기자 일동

이날 선언문에서 동아일보 기자들은 언론자유 의지를 피력하면서 신군부 권력 찬탈의 도구가 되고 있는 비상계엄 해제를 요구하였으며, 1975년‘동아 사태’로 해직된 기자들의 문제를 공식 거론하였다. 다수 동아일보 기자들에게 5년 전 해직사태(동아투위)는 지우기 힘든 트라우마(traumaㆍ심리적 외상)였던 것이다.

그러나 편집국 기자 총회에 방송국과 출판국 기자들은 참여할 수 없었다. 편집국 간부들은 방송국과 출판국 기자들이 합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 편집국 입구에 책상과 의자로 바리게이트를 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동아방송 기자들의 검열거부 선언

1979년 11월 동아방송의 언론자유 선언을 주도했던 김근 기자는 1980년 3월10일부터 4월16일까지 해외취재(DBS 리포트)를 다녀왔다. 김 기자는 보도국 간부들이 소장 기자들의 움직임을 차단하기 위해 자신을 의도적으로 장기 해외출장에 보낸다고 생각했으나 취재보도임무를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김 기자는 귀국한 다음날 동아일보 기자들의‘자유언론 선언’을 지켜보아야 했다.

김 기자는 5월 초 종로1가 ‘무과수 제과’에서 편집국 심송무 기자, 출판국 윤무한 기자를 만나 동아일보사 전체 기자의 이름으로 검열거부를 선언하기로 하고 각각 물밑작업에 나서기로 했다. D데이는 5월 10일. 그러나 계획이 사전에 새나가면서 회사 경영진은 간부들을 총동원하여 편집국과 출판국, 방송국 기자들이 연합하는 것을 막았다.

5월 9일 밤 동아방송 언론자유운동의 핵심 기자들은 여의도의 이규민 기자(정경부) 집에 모여 다음날의 거사를 최종 협의했다. 이때 동아일보사 담당이던 중앙정보부원 김 모씨가 이 기자 집으로 전화를 걸어 누구누구가 함께 있는지를 물어왔다. 기자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여의도 인근 호텔로 자리를 옮겨 검열거부선언 문안을 작성했다. 문안작성에는 편집국 심송무 기자, 출판국 윤무한 기자도 함께 했다.

이튿날 아침, 동아방송 보도국에서 검열거부 선언이 낭독되었다. 기자들은 결의문에서 “민주화를 저지하려는 유신세력에 맞서 민주화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고 선언하고, 사북사태, 학원민주화 운동 등이 제대로 보도되지 못한 것은 제도 언론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언론 자체의 타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기자들은 향후 계엄당국의 부당한 검열행위를 단호히 거부할 것을 다짐했다.

5월 들어 계엄철폐를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선포하면서 본격적인 권력 찬탈에 돌입했다. 김대중 씨를 비롯한 정치인과 재야인사, 각 대학 총학생회 간부 등에 대한 일제 검거령이 내려졌다. 언론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날 밤 자정께 천승준 동아방송 방송위원이 서울 서초구 잠원동 자택에서 합동수사본부요원들에 의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강제 연행되었다. 합수부 요원들은 동아방송 기자들의 자유언론 운동에 천 위원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김대중 씨의 사주를 받은 것이 아닌지를 추궁했다. 저들의 목적은 기자들의 언론자유운동을 김대중 씨의 내란 음모 선동에 엮어 넣으려는 것 같았다.

천 위원은 기자들의 언론자유운동에 관련, 간부회의에서 그들의 얘기를 들어는 보자고 했을 뿐이며, 김대중 씨와는 동향(전남 목포)의 중견 언론인으로서 10ㆍ26 이후 두어 차례 만나 시국에 대한 견해를 나눈 일이 있다고 사실대로 진술했다. 천 위원은 50여일 뒤에야 대공분실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기소유예였다.

동아방송 기자들은 천 위원의 강제 연행 소식에 분노했다. 그러나 젊은 기자들을 더욱 격앙시킨 것은 광주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식이었다. 학살의 만행이 저질러지고 있었으나 계엄사의 검열로 사실은 한 줄도 제대로 보도할 수 없었다. 검열 거부가 안 된다면 남은 것은 제작 거부였다.

80년 5월 19일 밤, 동아방송 보도국에서는 국장 이하 전 간부, 기자들이 모두 모인 가운데 제작 거부를 두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서정훈 기자(사회문화부)가 처음 사회를 보았으나, 서 기자가 지나치게 흥분하는 바람에 입사동기인 전진우 기자(정경부)가 사회를 대신했다.

세 시간 가까이 계속된 열띤 논쟁은 그러나 결론 없이 끝나고 말았다. 간부들과 고참 기자들은 시국의 엄중함에 비춰 제작 거부는 불가하다는 의견이었고, 젊은 기자들은 대부분 제작 거부 강행을 주장했다. 접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틀 후인 5월 21일 오전 7시, 시경 캡이던 전만길 기자의 소집으로 동아일보의 젊은 기자들이 모였다. 최맹호(사회부)ㆍ배인준(사회부)ㆍ이종각(정치부) 기자 등이었다. 이들은 편집국의 언론자유운동을 주도했던 심송무ㆍ김용정 기자 등과 함께 ‘광주 사태’ 보도에 대한 검열거부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 또한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발등의 불은 광주를 취재하는 일이었다. 주재기자에게만 맡겨 놓을 수는 없는 엄청난 상황이었다. 신문의 심송무 기자, 방송의 박종렬ㆍ최유찬ㆍ서정훈 기자가 광주로 내려갔다. 그 무렵 어느 날 밤 전진우 기자는 광주로 내려간 서정훈 기자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서 기자는 거의 울다시피 하며 기사를 불렀다. 그리고 부탁했다.“이 기사 한 줄도 빼지 말고 보도되게 좀 해주라.”그러나 서 기자가 어렵게 부른 기사는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광주 사태’가 계엄군에 의해 무력진압 된 후 서울로 올라온 서정훈 기자는 6월 3일 사표를 냈다. 그는 사표에 이렇게 썼다. "본인의 양심상 더 이상 기자직을 수행할 수 없음.”

80년 6월 9일, 서울 서대문구 홍은동 집에서 출근하던 심송무 기자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강제 연행되었다. 일주일 후인 6월 15일에는 동아방송 박종렬 기자가 출입처인 종로경찰서 기자실에서 합수부 요원에 의해 대공분실로 붙잡혀 갔다. 기자생활 2년이 안 된 젊은 박 기자가 합수부에 연행된 것은 먼저 붙잡힌 심송무 기자의 가택 수사에서 그의 취재노트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광주 사태’초기 광주로 내려갔던 박 기자는 서울로 돌아온 후 자신이 취재한 내용이 담긴 대학노트 두 권을 편집국 선배인 심송무 기자에게 빌려주었었는데, 바로 그 취재노트가 심 기자 집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박 기자는 포고령 위반에, 반공법 위반 혐의까지 덧씌워져 구속되었고, 군사재판에 넘겨졌다가 형집행정지로 100일 만에 풀려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광주를 무력진압하면서 권력은 완전히 신군부로 넘어갔고, 기자협회가 초토화된 이후 개별 언론사의 언론자유운동도 기세가 꺾였다. 남은 것은 신군부에 반대한 기자들에 대한 숙청과 언론통폐합이었다.

의원해직 모양 갖춘 강제해직

80년 8월 5일, 동아일보사의 기자는 신군부의 강압에 의해 전원 사표를 제출해야 했다. 의원해직의 모양을 갖춘 강제해직의 절차였다. 그러나 윤재걸 기자(출판국 신동아부)는 사표 제출을 거부했다. 그것은 해직을 자청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행위였으나 윤 기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80년 8월 9일 오후 동아일보사 광화문 사옥 1층 벽에 해직자 명단이 적힌 방이 붙었다.
명색은 자율정화였으나 실상은 보안사령부 언론대책반(반장ㆍ이상재)의 실무집행에 따른 강제해직이었다.

〈해직자 명단〉
박권상 논설주간, 김진현 논설위원, 한우석 사장실 기획위원, 박원근 기획조정위원, 조용철 기획조정실, 김성환 편집국 화백, 최일남 편집부국장, 이경재 정치부, 강성재 정치부, 김성익 정치부, 이종각 정치부, 김용정 경제부, 전만길 사회부, 심송무 사회부, 최맹호 사회부, 배인준 사회부, 박병서 문화부, 김재홍 외신부, 이정구 지방부. 여태섭 지방부, 박명용 지방부, 이종숙 지방부, 신광연 지방부, 이혜연 지방부, 사상길 지방부, 윤재걸 신동아부, 천승준 방송국 방송위원, 백환기 해외부, 김근 사회문화부, 이규민 정경부, 전진우 정경부, 최유찬 사회문화부, 박종렬 사회문화부(총 33명, 방에 적힌 순서임)

박권상 논설주간은 80년 5월에 사설을 10여회나 게재하지 않았으며, 그달 말에 발족한 국보위 전두환 상임위원장 취임에 대한 사설 집필을 거부했으니 신군부의 눈 밖에 난 것은 정한 이치였다. 최일남 부국장은 해외 순방취재 중 멕시코에서 칠레로 가기 직전 본사에 전화를 걸었다가 해직 소식을 들어야 했다. 늘 언론인의 정도(正道)를 걸어온 최 부국장은 사표도 내기 전에 의원해직된 셈이었다.

동아일보사의 언론자유운동을 주도한 편집국의 강성재ㆍ심송무ㆍ김용정 기자와 보도국의 김근 기자를 비롯해, 이에 적극 협력한 신문 방송의 중견ㆍ소장 기자들의 해직은 이미 예상된 것이었다. 반면에 언론자유운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일부 인사들이 해직자 명단에 포함된 것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국보위의‘언론계 자체정화계획’에 따르면 신군부는 언론인 강제해직의 대상자로 (가) 반체제, 용공 불순한 자 또는 이들과 직간접 동조한 자 (나) 편집제작 및 검열거부 주동 및 동조자 (다)부조리, 부정, 부패한 자 (라)특정 정치, 경제인과 유착하여 국민을 오도한 자,(마)기타 사회의 지탄을 받은 자를 열거했다.

이는 물론 저들의 불법적 언론인 학살을 호도하기 위한 것이다. 설사 일부 부조리, 부정, 부패 또는 정치인 유착 등의 혐의자가 있었다 한들 개별 소명조차 없이 일방적 재단으로 해직을 강제한 것은 명백한 불법이자, 대다수 기자들의 순수한 언론자유운동을 물 타기하고 폄하하려는 비열한 술책에 다름이 아니었다.

강제해직의 칼바람이 불고 일주일이 지난 8월 16일 동아방송 윤종규 기자(사회문화부)가
자원 해직됐다. 윤 기자는 해직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양심적인 선배 동료 후배 기자들이 불의하게 쫓겨난 마당에 기자로 남아있을 수 없다”며 스스로 퇴사한 것이다. 이로써 동아일보사의 80년 해직언론인은 앞서 퇴사한 서정훈 기자를 포함, 모두 35명에 이른다.

1980년 당시 강제해직 대상에서 빠진 기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언론자유운동의 대의를 외면한 것은 아니다. 생활인으로서 어쩔 수 없이 현실에 타협한 것을 불의한 것이라 단 칼에 매도하는 것은 또 다른 편견이요, 만용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군부 권력에 결탁하거나 야합함으로써 출세를 꾀한 자들까지 용서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에 이르러서도 권력에‘부역’하는‘언피아’들의 모습은 끊이지 않는다. 공익(公益)보다 사익(私益)에 매몰된 다수 언론의 민낯도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80년 언론자유운동의 정신은 과거사가 아닌 현재진행형이어야 하는 까닭이다. 언론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이니까.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리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