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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5월 언론투쟁기록[4] 김태홍 기자, 기협회장으로 언론운동의 중심에 서- 합동통신(1) 〈정남기 80년 합동통신 기협 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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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5.09.0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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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ㆍ26사태로 유신독재의 아성이 무너지자 합동통신 편집국 분위기는 들뜨기 시작했다. 언론과 민주의 본령을 되살리기 위해 기자협회 분회의 전열을 가다듬어 유신 잔재들과의 결전을 서둘렀다. 합동분회는 처음으로 분회보(分會報)를 발행하여 기자들의 투쟁의지를 북돋우면서 김태홍 기자를 기협회장에 입후보시켜 당선시키는 한편 중앙. 경향. 한국일보 등 4개사와 내부적으로 연대하여 언론운동의 중심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광주 시민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기자들도 이심전심으로 광주시민들과 뜻을 모아서 신군부에 저항하지 않으면 다시 군사정권이 들어설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숙지하고 있었다. 기자협회를 중심으로 전국의 기자들이 한 덩어리로 뭉쳐 싸운다면 기자들의 펜이 능히 총칼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과 이대로 방관만 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기자들을 행동으로 내몰았다. 기자협회가 드디어 각사 분회의 역량을 모아 전국 기자들의 역사적인 항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합동통신 분회는 기자협회의 결정에 따라 1980년 5월 20일부터 검열 및 제작거부에 들어가 서울시청의 계엄사 검열단에 나가 있던 기자들을 철수시키고 신군부에 정면으로 맞섰다. 5월 22일 계엄사가 회사 임원을 앞세워 제작거부를 철회토록 통첩을 해왔고 기자들의 도전을 방관하지 않겠다고 위협해 왔다. 기자협회 합동분회는 즉각 분회 관리위원 20명과 부차장 20명으로 구성된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다시 제작거부를 놓고 격론을 벌였으나 최종 표결 결과는 차장급 1명을 제외하고는 19명이 투쟁을 지지하여 행동통일을 보여주었다.

5월 24일 회사는 제작거부를 주도하던 정남기 분회장. 윤후상 부분회장. 고승우. 정수용. 박원근 기자 등 5명에게 군 당국에서 잡으러 온다는 첩보가 있으니 피신하라고 종용, 도피자금까지 지원해주었지만 이들은 편집국을 떠나지 않았다. 합동분회는 광주시민과 함께한다는 굳은 결의로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회사와 신군부의 훼방과 위협은 강도를 더했지만 기자들은 광주에서 전해오는 전황에 축각을 곤두세웠다. 광주에서 시민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처절한 현지소식이 편집국으로 전해온다.

5월 27일 광주민중항쟁의 불꽃은 허망하게 꺼졌다. 밤낮을 잊은 채 숨 가쁘게 달려온 기자들은 망연자실, 지향을 잃어버린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기자들은 또다시 패배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주시민들에게 한없이 부끄럽고 살아남은 자의 절망감으로 치를 떨었다. 예상대로 제작거부 주동자들에 대한 군부와 회사의 눈초리가 독기를 뿜기 시작했다.

1. 제작거부 전야, 뜨거운 철야토론

기자협회가 제작거부를 선언한 직후 군인들이 기협 사무실에 들이닥쳐 쑥대밭을 만들었고 언론사마다 정문에 탱크와 집총한 계엄군이 도열한 급박한 상황에서 5월 19일 밤샘토론이 벌어졌다. 합동 편집국은 안팎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긴장감에 감돌았다.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항쟁의 상보가 시시각각 텔렉스를 타고 입전될 때마다 회의장의 공기는 열도를 더해갔고 제작거부에 대한 기자들의 찬성과 반대 목소리는 날카롭게 부딪쳤다.

80여명의 참석자들은 지칠 줄 모르고 자기주장을 폈으나 초저녁에 시작한 토론이 자정을 넘겨 새벽에 이르자 반대의 소리는 잦아들고 찬성 쪽이 확연한 우세를 보였다. 반대파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떴고 나머지들도 기세가 꺾여 제작 거부를 찬성하는 기자들이 장내 분위기를 장악했다. 표결로 토론을 종결하자는 의견이 많았지만 양측의 감정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실력행사에 따른 부작용을 의식, 분회 집행부는 결정을 미루면서 아침을 맞았다.

5월 20일 광주에서의 항쟁은 더욱 치열해져가고 분회 집행부는 아침 8시 20인 관리위원회를 소집, 만장일치로 즉시 제작 거부에 돌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곧이어 편집국에서 기자총회가 열렸고 정남기 분회장은 분회 관리위원회 결정대로 상오 9시부터 일체의 통신제작 업무를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일부 차장급들이 볼멘소리를 냈지만 제작거부 서명에 들어가자 반대파 기자들도 투쟁대열에 동참하여 행동의 일치를 보여주었다.

지루한 찬반토론 과정에서 회사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어느 고참 기자는 눈물을 흘리며 만류하기도 하고 혹은 위협적 태도로 젊은 후배기자들을 윽박지르기도 했다. 발언자의 대부분은 기자들이 통신제작을 거부하는 사태가 회사와 국가에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올 것인지 불안감을 토로하는 언설과 이를 반박하는 주장으로 채워졌다. 토론을 통해 드러난 색깔과 강도가 훗날 군부와 회사의 보복과 상벌 등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리라는 것을 모르는 기자는 없었다. 그러나 정동채. 유희락 등 젊은 기자들은 놀라운 열정과 순발력으로 구렁이같은 고참들의 회유와 훼방을 압도해 나갔다.

강경파로 분류되는 몇몇 기자들은 유신언론인의 퇴진을 강도 높게 외치는가 하면 어느새 리스트를 작성하여 회사 안팎에 뿌렸다. 편집국 여기저기서 고성이 오가고 몸싸움도 벌어지면서 유신잔당으로 지목받은 인사들은 젊은 기자들의 위세에 눌려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2. 후퇴는 없다 일치된 행동통일

합동통신 분회는 20일 통신제작을 거부하는 사상 초유의 투쟁에 들어갔다. 신문과 방송사 기자들이 제작을 거부한다 해도 통신이 정상적으로 발행된다면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통신제작 거부야말로 전국 기자들의 거국적인 투쟁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열쇠나 다름없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사인 동양통신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혹시나 투쟁대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동양 김영진 분회장과 긴밀하게 연대해 나갔다. 합동이 완벽하게 제작을 중단해도 동양이 통신을 제작한다면 투쟁효과는 반감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자협회가 마비됨으로써 총지휘부가 무너진 마당에 제작거부 투쟁은 각개약진의 양상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다른 언론사의 투쟁정보를 소상하게 파악하기 어려웠다. 합동분회는 경향 등 주요 언론사에 밀사를 보내 그쪽 사정을 염탐하고 투쟁수위를 조절해 나갔다. 서울의 언론사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제작거부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광주의 항쟁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는 소식은 자신감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5월 22일 회사는 주동자급 5명에게 수배령이 내려졌다고 알려주며 도피자금까지 마련하여 1인당 5만원씩 지급한 후 빨리 피신하도록 압박했다. 그러나 이들 주동자들은 도피를 거부하고 편집국의 투쟁현장을 끝까지 지켰다. 그 불온자금은 반납되지 않고 투쟁자금으로 요긴하게 사용되어 투쟁열기에 기름을 부은 꼴이었다.

5월 25일 회사측의 요청으로 분회 관리위원. 부차장 연석회의를 열어 제작거부 투쟁을 재론하였으나 결과는 회사측의 기대와는 반대방향으로 흘렀다. 열띤 토론 끝에 결국은 표결에 부쳐졌는데 절대다수가 변함없이 제작거부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5월 26일 편집국장은 전날 신군부의 실력자와 만나고 돌아와 분회 관리위원과 부차장들을 모아놓고 신군부의 강경입장을 장황하게 전달했다. 편집국장은 이어 열린 기자총회에서도 공개적으로 투쟁중단을 강권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분회 집행부는 편집국장의 요구를 즉각 거부하고 단합된 힘으로 끝까지 광주항쟁에 동참한다는 결의를 다시 확인했다.

5월 27일 새벽 광주에서 뜻밖의 비보가 쏟아져 들어왔다. 계엄군들이 총칼을 앞세워 도청을 장악하고 시민군을 무참히 살육했다는 것이다. 삽시간에 광주가 무너지는 엄청난 반전을 보면서 기자들은 넋을 잃었다. 허탈과 분노로 가득한 편집국에서 기자총회가 열렸다. 항전의 보루인 광주가 무너진 마당이라 기자들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정남기 분회장은 27일 상오 9시부터 모든 기자가 제작에 복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7일간의 자랑스러운 전투는 또 하나의 패배로 끝났다. 이는 언론이 다시 군화에 짓밟히는 참담한 현실의 체험이며 동시에 오래토록 빛을 뿜어낼 언론신화로 기록될 일이다.

3. 주모자는 자른다 12명 해직

6월로 접어들어 예상한 대로 신군부와 회사측의 복수극이 펼쳐졌다. 하루하루 흉흉한 루머로 가득한 편집국에서 분회간부들이 차례로 합동수사본부에 끌려나갔고 몇몇은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합수부의 수사방향은 제작거부 투쟁에 그치지 않고 주동자들이 오래전 독서회라는 용공서클을 조직하여 반정부 활동을 계속해 왔다고 덮어씌우려 했다. 합수부가 독서회의 실체와 활동내용에 주목하고 있다는 설이 사내외에 유포되어 주동자들은 엄청난 곤욕을 각오해야만 했다.

7월 19일 도피중이던 김태홍 기협회장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은신 및 도피의 편의를 제공한 기자와 일반인 다수가 잡혀가 심한 고문을 당했는데 정동채. 정수용, 박영규. 유숙렬 기자 등 4명은 이때 강제해직되었다.

전사원의 일괄사표라는 형식을 빌려 의원면직으로 처리된 주동자 해직은 안기부 파견관이 대상자 명단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고 회사측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발뺌했다. 회사는 임원들이 배석한 자리에 대상자를 한사람씩 불러 내용을 통고했는데 이 자리는 최후진술의 기회를 주기위해 마련된 것이다. 이 자리에서 정남기 분회장은 직급과 상관없이 분회장을 해직자 맨앞에 세울 것과 젊은 기자들의 해직을 최소화하도록 회사에 요청했다.

8월 4일 편집국 입구 벽에 드디어 방이 나붙었다. 정남기. 이문승. 박석기. 윤후상. 고승우. 박원근. 서재빈 등 7명이었다. 김태홍 기협회장을 비롯한 정동채. 정수용. 박영규. 유숙렬 등 5명과 함께 모두 12명의 집단해직이 공식으로 확정되었다. 해직기자 명단을 보고 사내외에서는 제대로 가려냈다는 평가가 많았으나 일부의 경우는 의아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윤후상 기자는 1주일 전쯤 공보처로부터 본인이 해직자 명단에 포함되었음을 알고 미리 마음을 정리한 상태였으며 고승우 기자는 일괄사표 제출 때 완강히 거부하다가 막판에야 사표를 던졌다. 고승우 기자는 회사측으로부터 보안사에서 주목하고 있다는 통보와 함께 사표를 내지 않아도 당연히 해직된다는 협박 때문에 더이상 버티지 못했다.

4. 저항의 불씨는 77년 초에 타오르다

합동통신은 두산그룹의 계열사로 오래전부터 편집국에는 친정부, 친경영주 색채가 짙었고 이를 불변의 전통으로 삼아온 언론사였다. 이러한 사내 분위기와 유신 말기의 언론현실에 분개해오던 젊은 기자들이 1977년 2월부터 모이기 시작하여 오랜 세월 길들여진 제도언론의 타개책을 모색하였다.

김태홍 기자를 중심으로 윤후상. 정수용. 정지창. 고승우. 정동채 기자가 월례회를 가졌으며 정남기. 조재필. 박원근. 박영규. 유희락 기자 등이 동참하여 양심적인 후배들을 영입했다. 이들은 왜곡된 언론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봉급 이외의 소득(촌지)은 전액 토해내도록 하여 사회에 환원시키고 올바른 기자상을 실천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실제로 적지 않은 액수의 금액을 모아 당시 원풍모방 노조의 투쟁기금으로 또는 동아. 조선투위의 지원금으로 전달되었다.

이들이 처음 행동에 나선 것은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인 YH 여공들을 경찰이 폭력으로 해산시킨 1779년 8월 11일이었다. 경찰은 당시 어린 여공뿐 아니라 국회의원. 기자 등 닥치는 대로 구타하여 취재기자 15명이 집단테러를 당한 것이다. ‘경찰이 기자면 다냐? 기자 좋아하네’ 등의 폭언을 일삼으며 유신의 주구로 군림하자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였고 따라서 합동기자들도 저항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합동통신 기자 100여명은 8월 20일 상오 9시 편집국에서 기자총회를 열고 경찰의 기자폭행에 대한 성토대회를 가졌다. 문공부와 안기부 그리고 회사에 대해 순종만 해오던 합동의 분위기로서는 이례적이었으며 이러한 움직임은 패기에 찬 젊은 기자들에게 고무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기자들은 이날 결의문에서 이순구 서울시경국장의 즉각 파면을 요구하고 외부압력 배격, 무책임한 보도자세 반성, 진실보도를 위해 노력할 것 등을 다짐했다. 또한 이날 총회에서는 기협분회의 활성화를 위해 분회장을 직접 선출하기로 못을 박았다.

5. 분회장 선거 둘러싸고 이변 속출

1975년 동아, 조선 사태 이후 기자협회는 극도로 침체되어 기자들은 무력감에 시달렸고 자연 각사 분회도 형체만 있을 뿐 활동은 없었다. 따라서 자유롭게 선출되어야 할 기자협회장이나 분회장의 존재조차 망각한 상태였다. 유신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1979년 후반기부터 양심적인 기자들은 그 어느 해보다 따뜻한 봄소식에 목말랐다. 동아, 조선 사태가 남의 일이아닌 언론전체의 과제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기자협회를 정상화하여 빼앗긴 자유언론을 되찾고 기자의 정도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각 사별로 은밀하게 벌어졌다.

합동통신 분회는 1979년 12월 15일 편집국에서 전체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실로 오랜만에 가슴 설레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기자협회 분회장은 회사와 안기부 파견관이 협의하여 정치부나 사회부 기자를 지명하는 것이 관례처럼 굳어진 판국이라 선거다운 선거는 처음 경험하는 일이다. 이날도 경영진과 이해를 같이하는 고참 기자 집단(주로 견습 출신으로 정치. 경제. 사회 등 취재부서)을 축으로 하는 세력과 비견습, 내근부서, 젊은 기자들로 구성된 양심세력간의 팽팽한 대결로 진행되었다. 선거는 12ㆍ12사태 등 경색된 정치ㆍ사회적 분위기로 연기를 거듭하였고 그러는 사이 회사간부들은 지금까지의 관행에 반하는 움직임을 방해하거나 특정후보에게 사퇴를 종용하는 등 극단적인 양상으로 치달았다.

선거 전날 밤 양심그룹은 정릉의 정남기 기자 집에 모여 선거 전략을 세우느라 새벽까지 숙의를 거듭하였다. 그날 밤의 결론은 세가 불리하니 분회장 후보를 내지 않는 대신 부분회장과 총무를 확보하자는 차선책이 채택되었다. 아침 일찍 대책회의 소식을 접한 유희락 기자 등 소장그룹은 크게 반발했다. 김태홍 기자 등 선배들을 붙들고 분회장 후보를 내세워 당당하게 투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강요하고 나선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일로 곤경에 빠진 분회활성화 세력은 새벽에 내린 결정을 번복하고 급조된 후보 정남기 기자를 띄웠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선거일이 토요일인지라 밤샘 근무조는 이미 귀가했고 다른 기자들도 일찍 퇴근을 서두르고 있어 오후 1시 선거는 참패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분회 활성화를 염원하는 집단은 부랴부랴 퇴근한 기자들을 다시 회사로 불러들이고 투표라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세라 동지를 규합하며 부산을 떨었다.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분회장 선거가 양 진영의 찬조연설에 이어 두 후보의 소견발표가 진행되는 동안 편집국내 공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차가웠다. 차분하게 투표가 끝나고 개표가 진행되자 빠르게 승패의 윤곽이 드러났다. 경영주가 밀었던 후보의 당선을 확신했던 고참 기자들은 실망감을 숨기지 않았다. 과격한 고참들은 고함을 지르는가 하면 의자를 걷어차며 편집국 밖으로 사라졌다. 정남기 후보가 자유선거에 의해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분회 활성화 세력의 윤후상 부분회장 후보까지 압승을 거두었다.

6. 합동통신 기협분회가 활성화되다

활성화의 열기로 달아오른 합동분회는 첫 사업으로 분회보를 발행했다. <기협 합동분회 소식>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 6페이지로 1979년 12월 29일자로 인쇄되었는데 분회장 선거 결과, 사업계획, 관리위원 선임, 기협회비와 분회비 납부, 기협회원 자격 재심, 신규가입 독려 등의 내용으로 채워졌다.

분회보가 회원들에게 배포되자 활성화 저해세력들은 이를 지하신문이라고 매도하면서 분회집행부에 발행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해왔다. 회사가 발행하는 사보가 아닌 사내매체를 처음 접하는 경영주측도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탄압에 나섰다. 그러나 활성화의 상징이요 기자들의 기대와 약속의 산물인 분회보의 발행 중단은 상상할 수 없었다. 1980년 2월 12일 분회소식 제2호가 나왔고 3월 14일에 제3호, 4월 7일에는 제4호가 발행되었다.

합동분회는 내적인 활성화와 더불어 기자협회의 정상화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1월 18일 정성진 18대 기협회장의 뒤를 이은 19대회장의 승계과정을 독자적으로 조사한 다음 정남기. 윤후상 등 대표가 기자협회를 방문, 이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했다. 또한 관행으로 굳어진 기자협회의 비민주적. 비효율적인 운영에 대하여 항의하는 대표를 여러 차례 파견했다. 기자협회는 창립된 이래 정치부 기자들이 권력층과 밀착하여 18차례나 회장직을 나눠 맡았고 사회부 기자가 단 한차례 회장직을 차지했을 정도로 정치부 기자들의 독무대였다. 당시 정치부 소속인 기협회장은 다음에는 합동에서 정치부소속이 아닌 부서의 기자가 기협회장을 맡으면 될 일 이라고 얼버무렸다.

분회는 3월 14일 첫 관리위원회를 열고 동아, 조선투위 해직자들의 복직문제를 집중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는 첫단계로 해직기자들의 복직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하고 기자협회에 적극적인 노력을 요청하는 공한을 발송하기로 결정했다. 3월 18일 제2차 관리위원회에서는 기협회장 입후보와 관련, 회사의 압력을 받아 휴직원을 제출한 김태홍 기자의 원상회복을 회사측에 요구했다.

기자협회 합동통신 분회는 5월 9일 하오 7시부터 9시 40분까지 총회를 열고 언론자유 실천방안에 대한 자유토론을 벌인 끝에 언론검열 철폐 등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날 총회는 정남기 분회장으로부터 10ㆍ26 이후 언론일지를 비롯한 분회업무 보고를 들은 다음 계엄령 등 언론의 당면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한 후 자유언론을 실천하는 ‘행동수칙’을 마련하여 91명의 서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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