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이 7월 8일 새누리당 원내대표 자리에서 추방당하면서 남긴 말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박근혜의 ‘유승민 죽이기’ 강압에 굴복한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과 대다수 국회의원들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유승민을 쫓아내버렸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의 정체성을 잃은 지는 오래 전이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에 미흡하게나마 유지되던 민주적 체제는 ‘전과 14범’이라는 전력을 가진 이명박이 대통령 자리에 앉으면서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수십조원을 낭비하는 4대강 사업이 주권자인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이며 강행되었고, 국고를 탕진하는 ‘자원외교’가 공적 기구의 감시를 벗어나 비탈길을 내려가는 자전거처럼 질주를 계속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대통령의 감독을 받는 국가기관인 국정원, 보훈처, 사이버사령부가 새누리당 대선후보 박근혜를 위해 노골적으로 선거부정을 저질렀다는 사실이다. 이명박은 ‘민주공화국’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지닌 대통령으로서 자신과 사적 인맥만을 위한 영리행위에 몰두함으로써 국가적 파탄의 위기를 불러왔다.

박근혜는 친인척 부정이나 비리와는 거리가 먼 듯하지만, 국가를 사조직처럼 움직이려 든다는 면에서는 이명박보다 그 정도가 훨씬 더 심하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총리후보자를 지명한 뒤에 엄청난 부정이나 위법행위가 밝혀져도 끝까지 사퇴를 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이른바 ‘정윤회 문건’을 통해 청와대 ‘십상시’ 또는 ‘문고리 3인방’의 존재가 명확히 드러났는데도 단 한마디 해명이나 사과도 하지 않았다.

새누리당 대표 김무성 등이 박근혜의 유승민 추방 요구에 굴복하기 직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이종걸은 “대통령의 거부 의사가 담긴 국회법 개정안 투표에 새누리당이 불참한 것을 두고 국민들은 새누리당이 ‘박정회(朴政會)’가 됐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1972년 10월 17일 ‘유신’이라는 미명 아래 헌정쿠데타를 저지른 뒤, 전국구 국회의원 73명을 실제로 지명해서 만든 ‘유정회’를 빗대 말한 것이었다.

박정희 유신독재의 서슬이 퍼렇던 1970년대 중반에 시인 양성우는 ‘겨울공화국’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의 한 연(聯)을 소개하겠다.

“총과 칼로 사납게 윽박지르고 / 논과 밭에 자라나는 우리들의 뜻을 / 군홧발로 지근지근 짓밟아대고 / 밟아대며 조상들을 비웃어대는 / 지금은 겨울인가 / 한밤중인가 / 논과 밭이 얼어붙는 겨울 한때를 / 여보게 우리들은 우리들을 / 무엇으로 달래야 하는가”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군림’하고 있는 지금은 총과 칼만 보이지 않을 뿐 실질적으로는 ‘겨울공화국’이다.

유승민은 수구보수세력이 지배하는 새누리당에서 보기 드물게 합리적이고 주체성이 강한 정치인이었다. 2005년 1월 한나라당 대표이던 박근혜의 비서실장으로 ‘발탁’된 그는 그 해 총선 때 대구에서 출마해 당선된 이래 ‘원조 친박’으로 불렸다. 2012년 대선 이후 박근혜의 비민주적 행태에 실망해 그와 결별한 유승민은 현직 대통령을 향해 곧은 소리,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유승민은 2015년 한여름 새누리당 집행부와 다수 의원들이 보인 갈지자 행보를 예견이라도 하듯이 2013년 5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박 대통령의) 성격이 차갑고 무섭기는 하죠. 그렇지만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뽑는 것도 아니고, 물론 공천에 영향을 많이 미쳤지만 2016년 총선 때 현 대통령이 공천을 할 것 같지는 않고, 그런데 의원들이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정치학적 의미의 민주공화국은 ‘국가의 주권이 전체 국민에게 있는 공화국’이다. 쉽게 풀어 말하면 ‘국민이 주인이 되어 함께 어울려 사는 나라’이다. 그런 나라를 지향하던 유승민은 부당하고 무리한 사퇴 압력을 가하는 박근혜에게 국회법 개정안 파동과 관련해 일단 ‘사과’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민주공화주의자 유승민에 대해 박근혜는 ‘배신자’라는 낙인을 찍고 끝내 원내대표직을 박탈했다.

‘승리’를 거두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박근혜의 실체를 어떤 말로 규정해야 할까?

성균관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이자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인 후지이 다케시는 최근의 박근혜에 대해 “조선왕조 실록을 보는 기분”이라면서 그가 “유아적 사고를 표출했다”고 단정했다.

박근혜의 ‘겨울공화국’은 그저 춥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얼어붙은 땅과 같다. 세월호 참사 가족들은 1년 8개월이 가까워지도록 ‘국정 최고책임자’로부터 어떤 사과나 따뜻한 위로의 말도 듣지 못하고 있다. ‘메르스 대란’의 희생자 가족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중대한 사건들은 잠정적으로나마 ‘유승민 죽이기’에 가려져 버렸다. 이런 ‘겨울공화국’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하나? 제2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재야세력이 주권자인 국민과 함께 따뜻한 ‘민주공화국’을 세우는 날이 빨리 오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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