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에서 가장 잘못 쓰이고 있는 말 중의 하나로 나는 ‘보수''라는 용어를 꼽고 싶다. 가령 ’보수 단체‘라는 이름을 내건 어떤 단체의 시위나 발언을 접할 때 나는 과연 거기에 내가 아는 한의 ‘보수’가 있는지가 매우 의심스럽다. 보수라는 말을 굳이 쓰려고 한다면 그 앞에 ‘이른바’ ‘자칭’을 붙여 ‘이른바 보수’ ‘자칭 보수’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희귀한 것을 들라고 할 때 나는 그래서 ‘진짜 보수’ ‘보수다운 보수’를 꼽고 싶은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얘기되는 보수, 우리 언론들이 말하는 보수는 ‘보수 없는 보수’, ‘보수의 이름으로 보수를 부인하는 보수’다.

예컨대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에 대한 극단적인 혐오감을 극히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드러내는 이들을 차마 보수라고 할 수는 없다. 보수가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보다 민족이며 인간의 존엄일 텐데 나라의 주권과 민족의 자주를 부인하는 듯한 친미(親美) 친일(親日) 사대의 행태, 인간의 고귀한 가치를 존중하는 보수의 진면목이 무색하게 인권의 억압에 대한 찬동을 넘어선 선동을 보이는 이들을 도저히 보수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들에게 보수라는 명명은 너무도 당치 않은 호칭이다. 보수보다는 ‘몰양식’, ‘몰상식’이 맞을 것이며 극우(極右)라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들에게 보수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면 차라리 반(反)보수가 합당할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보수라고 자부하고, 남들에 의해 보수로 규정되는 우리 사회의 보수집단이 대체로 하나의 질환에 걸려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건 바로 ''보수(補修) 결핍증''이다. ''보수의 보수 결핍증''이다.

보수는 현실과 현재에 대해 대체로 긍정하고 그에 자부심을 갖는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현재를 지키기 위해서는 현재를 절대 긍정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진짜 보수라면 현실의 문제를 늘 고치고 수리해야 한다. 그런 보수공사 없이는 진짜 보수가 못 된다. 현재를 무조건 지키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현재를 잃어버릴 수 있다. ''보수를 하지 않는 보수''의 위험성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보수에는 고쳐야 할 현실, 보수함으로써 보수할 가치를 갖게 되는 보수의 본질에 대한 고찰이 거의 없다. 아니 전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보수’라고 자임하는 이들의 행태에 실망스러운 것은 누가 봐도 극우라든가 몰상식한 집단이 발흥할 때 이들이 보이는 태도다. 보수를 욕되게 하는 이들, 보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이들이 창궐할 때 진짜 보수라면, 이른바 건전한 보수라면 그걸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보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보수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보수 자신이 먼저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보수는 사이비 보수, 유사(類似) 보수에 대해 결코 제동을 걸지 않는다. 그들을 꾸짖지 않는다. 자신들은 그들과는 다르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지지하며 그들과 함께한다. 사이비 보수와 연대한다. 그럼으로써 자신들 역시 같은 부류임을 보여주고야 만다.

보수의 보수 결핍증. 이 병은 결코 불치의 병이 아니다. 현대의학의 발달로 좋은 치료법들도 있고, 탁월한 의사들도 많다. 그러니 나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게 좋겠다. 단, 그러자면 먼저 해야 할 게 있다. 우리의 속담에도 있듯이, 또 많은 의사들이 얘기하듯이 먼저 병을 스스로 드러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발전에 긴급하게 필요한 한 가지는 ‘진보(眞保)’의 등장이다. 즉 진짜 보수, ‘진보(眞保)''의 출현이다. 진정한 보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보수, 자기 잘못을 교정할 때 발전이 있다는 것을 아는 보수, 그런 ’진보‘가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하다.

사이비 보수와의 단호한 결별, 그것은 ''보수를 죽임으로써 보수를 세우는 것''이다. 가짜 보수를 죽여서 진짜 보수를 세우는 것이다.

중국의 사상가 순자(荀子)는 세상을 바르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것 중의 하나로 ‘정명(正名)’을 들었다.

“지금 만일 명칭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다른 형체의 물(物)에 대해서 사람들은 서로 다른 마음으로 각각 멋대로의 명칭으로 이해하게 되고, 그 결과 잡다하게 서로 다른 만상에 대해서는 명(名)과 실(實)이 혼란되고 엉키어서 귀한 것과 천한 것의 구별이 흐려지고 같은 것과 다른 것이 분별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되면 마음은 반드시 깨닫지 못하는 병폐가 있게 되고, 일(事)은 반드시 곤궁하고 실패하는 화(禍)를 당하게 될 것이다. ”

이는 공자가 정치의 출발점으로 얘기한 “이름을 바로잡는 것(正名)”을 잇는 것이었는데, 결국 세상 모든 일의 출발은 이름을 바르게 하는 일, 정의(定義)를 제대로 하는 데에 있을 것이다.

보수가 보수가 되는 것, 보수가 보수답게 되는 것, 보수가 보수라는 이름에 값하는 보수가 되는 것, 거기에 우리 사회의 발전과 진보의 한 길이 있다.

군사독재를 종식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보수의 출현이라는 과제를 제기했던 87년 6월로부터 28년이 지나 다시 맞은 6월, 우리 사회는 그러나 아직 그 과제의 달성에 턱없이 못 미쳐 있다. 아니 지금의 보수의 행태는 오히려 후퇴이며 역행이라고 해야 할 정도다.

보수 없는 보수가 지배하고 있는 사회, 보수의 부재와 결핍. 그러나 그것은 ‘이른바 보수’ 집단에게만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다. 빈곤한 보수를 있게 하는 한 기반, 거기엔 빈곤한 진보가 있다. 자칭 보수의 맞은 편, 그 상대편의 진보의 빈곤이 결국 보수의 빈곤을 받쳐주는 한 기반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보(眞保)의 부재에 대한 지적과 질타, 그것은 결국 진보 진영의 자기반성이어야 한다. 건전한 ‘진보(眞保)’의 출현, 그것은 진정한 ‘진보(進步)’, 역량 있는 진보(進步), 더욱 진보다운 진보가 있을 때 상당 부분 가능할 것이다. ‘진보 대 진보’, 그것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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